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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시인의 더 넓고 깊어진 시세계

김용택 시인(65)에게 궁금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실패로부터 얻은 교훈. 많은 이들이 그를 최고 시인으로 떠올리지만, 거칠게 말하면 그는 이제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세를 얻은 대중 명사. 스타 시인으로서 인기를 소비하며 살 수는 있겠지만, 자신과 일대일로 대결해야 하는 창작자의 삶은 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다시 내놓은 시집'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창비)을 보노라니 걱정을 덜었다. 시인은 "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 / 이 무한한 가치로" 표상되는 자리에 있었다. 하찮고 이유 없는 존재에 관한 경계는 없다는 깨달음. 그는 '필경' 시인이었다. 그러나 묻는 사람이 난처할 정도의 솔직함은 여전했다. '쏠 테면 한번 쏴봐라 / 나는 이제 떨지 않을란다'며 왜곡된 현대사를 정면으로 바라보겠다는 충만한 결기와 비오는 날 '열끗짜리 팔월공산을 피로 때리며 홍단을 치는' 장난기, "매미가 울 때가 지났는데, 무슨 영문인 줄 모르겠다"며 제보 전화를 거는 오지랖까지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작가의 격정적 문제의식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제 몸을 부수며 절정을 넘기는 / 벼락 속의 번개 같은 손가락질'과 같은 삶을 이겨낼 수 있는 건 결국 시가 될 수밖에 없다는 통찰. 이런 그를 두고 판화가 이철수는 '김용택의 노래가 하류에 이를수록 넓고 깊어지는 강을 닮았다. 그 강가에 서서 노래를 듣는 저녁이 이렇게 넉넉하고 아름답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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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10 23:02

【오하근 교수가 말하는 김남곤 시선집 '사람은 사람이다'】시인의 사랑·자비의 인격 고스란히

이 시집의 제호인 '사람은 사람이다'는 제법 철학적인 명제인 듯싶다. 그러나 아니다. 이는 시인이 당연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격식도 논리도 없이 그냥 하는 말이다. 시인은 '사람은 사람이다'라고 입을 세 번만 달싹거려 보면 알 수 있는 말이란다. 물론 '사람이 사람이면 모두가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이어야 사람이 사람을 사람이라고 한다.'라는 반론도 있겠다. 그러나 시인은 '사람은 모두가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이니까 사람이다.'라고 답하고 있다. 그 '사람이니까'의 증거를 시인은 이 시집의 머리에서 우리들은 누구든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지순하기 그지없는 행렬'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동행'하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그 길에는 비도 내리고 바람도 불고 눈보라도 쳤습니다. 정의롭게 살기 위해 고뇌하는 눈물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라고 이 세상이 비록 험악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으려고 흘리는 눈물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이 바로 이 한 권의 시집으로 엮였다. 이 시집은 그런 착한 눈물의 기록이다.이 눈물은 동일시로 형성된다. 타인에게 심리적인 유대감을 느껴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남을 자기처럼 여기는 이 동일시는 사랑과 자비의 바탕이기도 하다.오랜 만에 바닷가에 앉아말없이 겸상을 했다숟가락을 들었다가 놓았다가내가 그렇게 따라했다.어느 한 구석 입맛 누릴 혀끝 자리가 없었다. '라대곤 님의 밥상'중에서바닷가에 앉아 겸상을 하는 기분은 어떨까. 아마도 그 넓은 바다를 다 채워야 할 듯하는 공복을 느낄 것이다. 광활한 바다와 한 점 혀끝자리와의 대비. 물결이 넘쳐오듯 입맛도 그렇게 끌어당길 텐데 상황은 정반대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의 반복운동과 대비해서 입맛이 당기지 않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숟가락의 반복운동은 아이러닉하다. 그러나 어쩌랴. 병이 깊어 상실한 상대방의 입맛이 전이되어 시인의 입맛도 잃었다. 이는 사랑의 동일시이다. 세상에는 상대야 어떻건 제 실속만 차리는 사람이 더러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황당한 사람은 없단다. 사람은 사람이란다. 우리는 모두 겸상하는 존재이다. 착한 눈만이 착한 이를 만나 겸상한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에게 "대사의 얼굴이 돼지같이 보인다."고 하자 대사는 "임금의 얼굴이 부처같이 보인다."고 했다. 웬 욕을 아첨으로 받나 싶어 그 까닭을 묻자 무학대사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단다. 시인은 그런 눈을 가졌다. '살아가면서/ 누구 한 사람/ 서운하게 한 일 없는지/ 돌이켜 보거라'('모자라는 마음')고 시인은 찬찬히 짚어보며 자문한다. 시인은 그런 마음을 가졌다.문수사 가는 길에 산불이 나서하늘도 활활 삼키는산불이 나서나무는나무는 눈 감고 다비에 들고산새들은 산짐승들은 불먹어 떼울음 울며날아가는가 기어가는가천리 밖으로 몸을 사려도 눈 하나 꿈쩍 않는 스님들의 저 허심한 불구경. ('불구경 - 단풍은커녕' 중에서)이 시는 고창 문수사의 단풍을 빙자하여 '허심'을 그렸다. 단풍을 불에 비유하는 것은 죽은 비유에 가깝다. 그런데 이 시는 '단풍은커녕'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단풍을 구경하러 왔다가 단풍은커녕 불구경만 했다는 의미인데 부제가 이렇게 주제를 압도하는 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조차 부정된다. 단풍은커녕 불인데 불은커녕 일상이다. 그런데 그 일상도 일상이 아니고 허심이고 무심이고 공이다. 나무는 열반에 든 스님처럼 다비에 들고 새와 짐승들은 삶의 길을 찾는데 스님은 단풍이야 들건 말건, 불이야 나건 말건, 일이야 있건 없건, 세월이야 가건 말건 이미 마음을 다 비웠다. 시인은 이제 이런 해탈의 경지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시인은 허심의 스님이기를 바란다.우리는 글쓰기의 첫걸음에서 '글은 사람이다'라는 프랑스의 식물학자 뷔퐁의 언술과 만난다. 뷔퐁은 "지식이나 사실이나 발견 따위는 남에게 빼앗기기 쉽고 더 잘 쓰는 손끝에서 제작될 것이다. 그러나 인격과 밀착된 문장은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에 남이 가져갈 수 없다. 이런 글은 영원히 남는다."고 했다.시인은 '도시 밖 귀빠진 곳에/ 뙈기밭 몇 평을 얻어/ 땀방울을 콕콕 심고 돌아온 날 밤/ 그 밤하늘에선/ 별들이 손뼉을 쳐도 요란하게 쳤다는/ 증거가 두 서넛 있습니다'('현정이의 참깨 밭')라고 읊고 있다. 이 시집은 그렇게 땀방울을 콕콕 심은 현정이의 참깨 밭이다. 글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에는 시인 자신의 사랑과 자비의 인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찌 밤중에 몰래 별들만 손뼉을 치겠는가./오하근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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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05 23:02

김동문 목사 신앙고백서 '다 막혀도 하늘은 열려 있다'

어머니 손을 잡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 덮인 골목길을 걸었다. 새벽녘, 강론과 기도가 이어지는 건물에 들어서자 발소리 내기도 조심스러운 경건한 침묵이 흘렀다. 김동문 전주완산교회 담임 목사(55)는 "어머니는 그때(5살)부터 나를 하나님께 붙여놓으신 것"이라고 했다. 그의 가슴 속에 신앙의 씨앗을 심어준 어머니는 그러나 일찍 신의 곁으로 갔다. 행복을 기다리며 비행운을 꿈꿨던 그는 연쇄적 불운의 비행운으로 추락했다.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그에게 손을 내민 건 그의 아픔을 공감해주는 신이었다. 김 목사가 눈물 겨운 신앙고백서'다 막혀도 하늘은 열려 있다'(쿰란출판사)는 "신을 왜 믿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계속되는 불운을 경험하며 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던 그에게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온 대답은 하나님 시계에 맞춰 살라는 것. 이는 목회를 하면서 삶의 애환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간증을 담은 글 모음집이다. '다 막혀도 하늘은 열려 있다','너의 상처를 별로 만들어라','성령님이 해답','하나님의 시계'로 구성되는 책을 읽다 보면 종교적 사랑과 개인적 사랑을 아우르는 신과의 뜨거운 동행을 경험하게 된다. 김 목사는 "신은 처절한 슬픔 속에서 오히려 눈물의 프리즘을 통해 하늘의 세계를 보게 하시고, 영원한 삶을 꿈꾸는 목회자의 길로 인도했다. 숱한 아픔의 시간이 목회의 큰 자산이 됐다"고 털어놨다. 전북대 사학과와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김 목사는 예수대 이사장, 한국기독교가정문화운동본부 공동대표, 사랑의장기기증운동 전북본부 이사 등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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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22 23:02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 현대적 재해석

'먼 옛날, 아름다운 여인 도화녀와 그녀를 사랑한 왕이 살았다. 여인은 남편이 살아있다며 왕의 구애를 거절했다. 왕은 더 이상 사랑을 강요하지 않았다. 얼마 후, 왕이 죽었다. 곧 여인의 남편도 죽었다. 그리고 왕은 '죽은 자'로서 다시 그녀를 찾아온다. "이제 네 곁에 아무도 없으니, 나의 마음을 거절하지 말라." 그날 밤, 아름다운 과부는 죽은 왕과 뜨거운 밤을 보냈다. 열 달 후, 여인은 아기를 낳았는 데…'2013년, 한 아름다운 여인과 지독한 쌍둥이 남매가 살았다. 그들이 심하게 다투던 밤, 한 사람의 시체가 떠오른다. 그리고 다시 전설이 시작된다.'삼국유사'에 실린 설화 '도화녀와 비형랑'이 오늘에 이어져 어떻게 전개될 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소설의 도입부다. 임실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 홍주리씨(38)가 장편소설'도화녀 비형랑'를 냈다(미래지향). '자귀모'와 '천년호' 작업 이후 삶의 의미와 진실을 찾아 정신적인 방황을 하기 시작했고 인문학 공부와 대학 강사활동에 집중해온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도화녀 비형랑'은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지독한 사랑과 가슴 아픈 가족사를 판타지로 풀어낸 작품. 두 주인공인 현중과 여주는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될 쌍둥이 남매라는 사실마저 그들에게는 '만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의 상징으로 저자는 생각했다. 그러나 한 여인의 처절한 모성애 앞에 이들의 운명은 엇갈리기 시작한다.오래된 설화를 현대적 감각과 판타지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독특함을 찾을 수 있다. 이와 함께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게 영화를 보는 듯한 생생한 묘사와 치밀한 전개, 거듭되는 반전이 돋보인다. 캘릭터들이 입체적이며, 이야기 구성이 탄탄하고 마지막 반전도 책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교보문고를 비롯, 전주 홍지서림에서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그의 책을 만날 수 있다.전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저자는 국내 최대 시나리오 공모전인 '우리 영화시나리오 공모'에서 '자귀모로 대상을 받았다. 영화로 사랑을 받았던'천년호' 도 그의 시나리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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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22 23:02

가슴 울려주는 신선의 노래

미당의 제씨 서정태 선생님, 상대를 배려함에 있어선 미당보다 오히려 미당의 형님 같으신, 우하 선생님의 시집을 받고 전화를 드렸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세배 드렸어야 했는데….""세배는 뭐, 꽃피면 와, 그때까진 안죽고 있을 것 같으니까."그 분의 전화 말씀이다. 항상 겪는 일이지만, 이런 식의 전화 말씀을 열 번도 더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넉넉한 신선(神仙) 같으신 분이구나! 이승과 저승을 훤히 굽어보는 삶을 사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우하(友下) 서정태 선생, 그분의 두 번째 시집'그냥 덮어둘 일이지'가 출판사'시와'에서 나왔다. 권혁재 중앙일보 사진기자의 사진이 매장마다 곁들여진 이쁜 시집이다. 그분의 춘추는 올해 90세이시고, 90세에 맞춰 90편의 시가 담겼다. 첫 번째 시집'천치의 노래'(1986) 이후 26년 만의 일이다.이즈음처럼 농익지도 않은 시집들이 흔전만전 나오는 풍조에서는, 정말 귀한 일이요, 귀한 본보기의 시집이다. 항상 미당(未堂)의 그늘에 가려 있어서, '또 그 아래'라는 자호를 가지신 우하 선생, 90세의 노시인이 들려주는 노래는 과연 어떤 노래일까. 나는 책장을 넘기면서 단숨에 다 읽었다.얼마 전 노필(老筆)로 삐뚤빼뚤 쓰신 시집 초고를 읽을 때 보다는 또다른 감동, 또다른 마음공부를 하게 만드는 시집이었다. 아아, 내가 과연 90세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선미(仙味) 넘치는 시를 쓸 수 있을까 하는 경외의 마음이 솟기도 했다. 한동안 그분은, 강원도 춘천에서 기거하시다가 얼마 전 고향 질마재 마을, 당신의 생가 옆에 초옥을 지어 귀향을 이루셨고 이제 질마래 소요산의 산자락 '友下亭'에서 한 신선처럼 살고 계신다.'가을 하늘만 가지고는 아니되어 / 도덕암 근처 / 늙은 신선 찾아 나섰네 // 가을 하늘만 가지고는 아니되어 / 그도 어디론가 나가버리고 / 빈집에 자물쇠만 채워 있었네 // 돌아서서 오는 길 / 건너야 할 돌다리도 없는데 / 어쩌자고 길섶엔 저승꽃만 피었네' ('저승꽃' 전문 중에서)우선 이 시는 선미가 흐르는 시다. 이 시에 보이는 '늙은 신선'은 아마도 그분의 자화상일 게다. 그분은, 도인처럼, 은자처럼, 현자처럼, 세 칸짜리 흙집으로 둥지를 이루셨다. '빈집에 자물쇠만 채워넣고' 때로는 소요산 발치에서 난초를 채집하기도 했으나, 이제 노경(老境)이 되어 산책도 어렵기만 하다. '저승꽃'이 자꾸만 밟힌다. 적막은 그분의 스승이다.'뜰 앞에 심은 다박솔이 커서 / 학이 날아와 우는 날 // 그 하늘 너무나 맑기만 해 / 천사의 피리소리도 들리는 날 // 오래토록 참아왔던 나의 노래 / 그 때마다 한 곡조 불러보리.'('학이 우는 날' 전문)그의 형님이신 미당에게는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라는 시집이 있다. 미당의 제씨인 우하 선생님에게는 미당의 시맥(詩脈)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학이 날아와 우는 날'을 상상하는 정서도 그렇고, 이승과 저승을 아우르는 파천황의 상상력도 그렇다. '천상의 피리소리'는 바로 오래도록 참아왔던, 시의 화자인 '나'의 노래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피리소리는, 잠시 우리를 소슬하게 만든다. 이즈음 괜히 난삽하기만 한 시편들, 시의 유기체적 구조미마저도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런 시집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정말 시가 왜 노래여야 되는지? 우리들의 가슴을 풍금처럼 울려주는 현자(賢者)의 노래여야 하는지를, 넉넉하게 보여주는 시집이라 하겠다. 송하선 시인(우석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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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15 23:02

때론 진실이 날카롭게 상처 입힌다

지난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찜통 더위와 기차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나는 더위를 피할 방법을 찾지 못해 기차를 탔고 그 기차 안에서 김연수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자음과 모음)을 읽기 시작했다. 기차 안으로 파도가 서서히 밀려 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2011년 여름부터 2012년 여름까지 한 계간지와 중국 격월간 '소설계'에 '희재'라는 제목으로 동시 연재되었던 작품이라고 했다. 그 여자, '희재'가 한 여름, 내가 타고 있는 기차 안으로 뚜벅 뚜벅 걸어 들어왔다. 나는 흔들렸다. 기차 때문이 아니라 그녀 때문에. 입양아의 잃어버린 조각 맞추기이 소설은 '희재' 이면서 '카밀라 포트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생후 6개월 때 미국 백인 가정으로 입양된 카밀라. 그녀는 성장해서 작가가 되었고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 뉴욕의 한 출판사와 자신의 뿌리를 찾는 논픽션을 차기작으로 계약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친부모를 찾기 위해 모국인 한국의 진남을 찾는다. 카밀라가 가지고 있는 단서는 입양 당시의 기록과, 낡은 사진, 그리고 한국에서 온 편지 한 장. 이 단서들로 잃어버린 과거 조각을 맞추어 간다. 어쩐 일일까. 어머니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친절한듯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냉정함을 내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감추어진 것들을 하나, 둘 발견해 나간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에게 지어주려고 한 이름이 '희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희재'. 카밀라이자 희재인 그녀가 덧칠한 유화처럼 켜켜이 입혀진 언어의 색을 벗겨내기 시작하자 소문과 거짓에 뒤섞여 있던 친모, 지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러나 진실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진실은 때론 거짓보다 날카롭게 사람을 상처 입힌다. '나'의 진실은 언제나 '타인'의 진실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진실이다'라고도 말할 수는 없는 풍문과 증언 속에 진실을 찾기 위해 작가는 여러 시점을 오간다. 하나하나 드러나는 진실의 조각들카밀라가 화자인 1인칭과 지은이 딸인 희재(카밀라)를 '너'라고 부르는 2인칭, 3인칭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까지 자유롭게 넘나든다. 소설 속의 희재(카밀라)의 독백처럼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 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하게 된다. 점의 우연으로 존재하던 친모 지은의 인생이, 선의 이야기로 이어져 희재에게 가 닿는다.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 각자가 기억과 기록으로 지켜낸 각자의 진실들이 점으로 공존한다. 운동화 갑피를 만드는 공장에서 미국 유학 간 아들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미싱을 돌리다가 부당해고 투쟁 끝에 병사한 늙은 어머니의 이야기, 그런 어머니를 떠올리는 서 교수의 기억,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타워 크레인에 올라갔다가 끝내 투신자살한 아버지의 이야기와 그를 향해 보낸 'HOPE' 모스 부호에 대한 정지은의 기억 등 각각의 개별적인 이야기는 서로 맞물려 한 시대의 진실로 접근해 간다. 작품 속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공간인 진남 이야기 박물관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그러하듯, 에밀리 디킨슨의 시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의 의미가 그러하듯 작가는 진남 사람들 각자가 진실이라고 품고 있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과거의 파편을 주워 담아 하나의 '아카이브'를 만들어 간다. 우린 자주 흔들린다 진실때문에다시 펼쳐든 책에는 검게 밑줄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어쩌면 각자가 가진 진실들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될 때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해질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진실이 언어를 통해서 타인에게 가닿게 될 때, 혹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개인의 한 점 진실이 다른 점과 이어져 선을 이루게 될 때 한 번을 살아도 제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우리는 너무 자주 흔들린다. 때론 진실이라고 말하는 소문 때문에. 혹은 거짓이라고 덮어둔 진실로 인해. ※ 김정경 시인은 2013년 본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현재 전주MBC 작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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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01 23:02

"곧 개학… 얘들아 더 실컷 놀아라"

전나무집 큰딸 가희의 방학은 따분하게 시작되었다. 가희는 방학한 지 3주가 지나도록 따뜻한 아랫목에서 마음껏 게으름을 피웠다. 벼농사와 양파농사를 망친 부모님은 어느 날 동생 나희방에서 연탄을 빼버린다. 깔끔쟁이, 잔소리쟁이 동생 나희와 한 방을 써야 한다니! 가희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나희를 다시 제방으로 쫓아내기 위해 백만장자를 꿈꾸게 된 가희. 얼음꽝에 모여 노는 남자애들에게 입장료를 받아내는 기막힌 아이디어로 가희의 백만장자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가희는 백만장자가 될 수 있을까?책이 아닌 현실로 돌아와서, 2013년을 사는 대한민국 김대한 어린이의 겨울방학. 어쩌다 친구들이 놀러왔다. 무얼 하고 놀까? 블루마블, 체스 따위의 보드게임은 시시하다. 감성을 건드리지 않고 그저 귀와 눈을 어지럽게 하는 컴퓨터 게임이나 스마트폰 게임이 좋다. 대한이와 친구들, 한 방에 있지만 각자 따로 논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가락,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손가락이 바쁘다. 게임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입에서 거친 말들이 튀어나온다. "친구끼리 만나서 스마트폰이나 들여다보고 있니?" 최신형 스마트폰을 사준 엄마가 잔소리를 쏟아낸다. 하지만 딱히 무슨 놀이를 할까?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덮인, 흙이라곤 디뎌볼 수 없는 밖으로 나가 금을 긋고 땅따먹기를 할 수도 없는 일. 자치기, 팽이치기, 구슬치기도 어른들이나 기억하는 추억의 놀이일 뿐. 어느새 아이들의 학원 수업 시간이 된다. 대한이와 친구들은 각자의 학원으로 흩어진다. '방학'(放學)이라는 한자말을 들여다보니 '놓을 방', '배울 학'이다. 배움을 놓는 것, 학문으로부터 놓여나다는 뜻으로 풀어진다. 정말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책가방을 내던지고 신나게 노느라 바쁜(?) 방학을 보내게 해 주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방학동안 선행학습에서 자유로운 아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뜻 그대로의 배움을 놓는 것이 아닌 다음 학기, 다음 학년에 배울 책을 펼쳐야 하는 방학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방학의 뜻이 배움을 '놓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먼저 '드는 것'이 되어 버렸다.책 속의 가희는 방학 내내 실컷 놀고도 더 놀고 싶다. 개학이 다가오는 게 섭섭하다. '오메 돈 벌자고?'로 시작했던 이야기가 '오메 벌써 방학이 끝나부러야?'하는 아쉬움으로 끝난다. 백만장자의 꿈은 온데간데없고 놀이의 재미에 푹 빠진 가희를 따라다니며 깔깔 웃었다. 나도 방학이면 책 속의 가희처럼 신나게 놀았기 때문이리라. 땅거미가 질 때까지,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골목에 울릴 때까지 공감한다는 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어른들이여, 아이들에게 미안해지자. 방학이 끝나가고 있다. 아이들에게 신나게 놀 권리를 빼앗아간 어른들에게 먼저 이 책을 권한다.※ 아동문학가 염연화씨는 광주대 문예창작학과를 나왔으며, 올해 전북일보 신춘문예 아동문학 부문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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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25 23:02

허상 아닌 삶에 대한 진지한 사랑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이 소설을 읽었을 때쯤 나도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다. 그때 내 삶은 1년 중 3개월 정도만 일하고 나머지 7~8개월은 모은 돈으로 버티며 감옥에 갇히듯 책만 읽었다. 내가 읽은 책은 대충 1년에 300권쯤이었다. 그 많은 책, 그 많은 문장 중에 유독 나는 이 구절을 기억한다. 당연하다. 사람이 사랑 말고 더 무엇으로 절망하고 더 무엇으로 행복해 진단 말인가! 세상의 모든 선행과 악행은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하고 싶어서(그것이 타인에게든 자신에게든) 생기는 사건 사고일 것이다. 나도 죽고 싶지 않다.이 소설의 화자인 한나가 말하는 사랑은 뭔가 이상하다. 설렘도 없고 흥분도 없다. 약간 허무하고, 서늘하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버티는 오기를 닮았다. 무엇보다 문체가 서정적이다. 그래서 더 잔인하게 다가온다. 그러니 이 소설은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 한나는 히스테리가 심하고 우울증이 있어 옆에 있는 사람, 특히 남편 미카엘을 못살게 군다. 그런데 미카엘은 바보처럼 한나의 짜증을 모두 받아준다. 한나는 더 짜증이 난다. 남편이 잘해줄 수록 절망감에 몸부림친다. 제발 미카엘이 화를 내주기 바랄 정도다. "이 남자는 언제 자제력을 잃을 것인가? 아, 한번이라도 저 사람이 겁에 질린 것을 한번만이라도 보았으면, 기쁨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미친 듯이 달리고."한마디로 이 둘의 관계는 틀어져있다. 소통이 되지 않는다. 한나는 언제나 똑같은 일상에 결핍을 느끼고, 가끔은 환상 속으로 도망쳐 그 결핍을 채우려고 하지만, 환상은 현실을 직면하는 순간 결핍을 더 들어내는 장치로 변할 뿐이다. 남편 미카엘은 작은 행복을 원하고, 끝없이 인내하고 참아내고, 헌신적이고, 절제하고, 논리적이고, 현명하고, 평정심을 잘 유지한다. 하지만 그 상태는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위태로운 삶을 진행시킨다. 미카엘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박사학위를 받는 것! 이 얼마나 지루한 삶인가! 한나는 미카엘과 미카엘을 닮은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조용하고 현명해지다니, 얼마나 지루한가."작가 아모스 오즈는 말한다. "나의 문학세계는 일상이며 주인공들은 평범하다. 그들은 일상의 현실과 꿈을 조화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별을 보다 실족하는 이상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꿈으로 인해 가정이든, 자기 내부든, 국가든, 자신이 처한 공간의 파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주인공 한나는 그렇게 시들어간다. 이 소설을 소개하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현실에 치여 무감각하게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시 사랑하는 힘이 차고 넘치는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언제나 이 경계가 아슬아슬하다. 가 닿을 수 없는 맹목적 꿈에 의해 절망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 꽂힌 심장 없는 허수아비가 될 것인가! 다시 한 번 말한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사랑을 하고 싶다. 허상이 아닌 삶에 대한 진지한 사랑을. 우리는 여전히 늦지 않았다.※소설가 강성훈씨(35)는 단편 소설'못'으로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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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18 23:02

'논어'는 조화와 상생의 지침서

최근에 필자는 이러한 반성을 해보았다. 과연 공자의 학술세계는 정말 영원히 마르지 않는 꿀단지일까?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논어'에 매료되어 분석 해설하고, 또 찬술(撰述)을 한다는 말인가? '논어'라는 꿀단지는 최소한 2500년 넘게 수많은 사람들이 빨아마셨고, 지금도 동양학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한번쯤을 그 맛을 보았을 것이다. 정말 많은 사람의 미각을 매료시킬만한 꿀이 지금도 나오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은 물만 나오는데 너무나 오랫동안 빨다보니 물맛을 꿀맛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후자일 것이라는 의심도 해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지금도 향기로운 꿀이 나온다. 여러 종의 향이 나는데, 나는 그중에서 조화와 화해라는 이념의 향에 매료되었다. '논어'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언행을 기록한 실록이다. 따라서 '논어'를 처음 대할 때 하나의 철학서적으로 인식하지 말라. '철학'이라는 인식은 곧 추상적인 개념 해설 그리고 논증 등을 떠올려 우리로 하여금 정이 뚝 떨어지게 한다. 또 '도'와 같은 현묘하고도 추상적인 개념에 고민하지도 말라. 그러한 것들은 전문가들에게 맡겨두고 '논어'를 공자라는 사람의 인생 역정을 소개한 연의(演義-소설)라고 생각하면서 원전을 보기에 앞서 번역서를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보기 바란다. '논어'에 관한 전문 해설서를 보면 대단히 엄숙주의적인 공자의 도덕관을 만나게 된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꿈치를 구부려 베고 누었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곳에 있다. 정당하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있어서는 뜬구름과 같다""죽더라도 인(仁)을 완성한다"는 말이 해당한다. 또한 "시(詩)를 통하여 마음을 일으키고 예(禮)를 통하여 자신의 덕성을 실천하며, 음악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을 완성한다"는 고매한 문예정신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치열한 생존경쟁에 놓여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공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살신성인(殺身成仁) 그리고 문예정신은 우리에게 머나먼 세계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흔희 동양 철학의 근본정신을 조화 혹은 화해라고 하는데, 사실 이는 공자의'논어'에서 비롯되었다. 조화 혹은 화해에서 '화'(和)가 성립하려면 자타의 대립 혹은 갈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갈등의 영역은 '나'라는 개체로부터 시작하여 사회공동체로 확장된다. '나'라는 영역에서는 욕망과 도덕의지의 대립과 갈등이 있고,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는 부부와 부자 그리고 형제자매의 갈등이 있다.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의 갈등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립과 갈등은 왜 발생하는가? '나'라는 차별만을 내세우고 '우리'라는 '같음'을 뒤로 하기 때문이다. '논어'에는 '조화를 추구하고 획일성을 반대한다'는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정명(正名)이라는 말이 출현하는데, 이 둘은 갈등을 해소하는 동일한 이념의 두 가지 다른 표현이다. 화이부동은 상대방의 차별성에 대한 존중이다. 인생은 본래 차별적이다. 그러나 모두 선과 행복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 단지 추구하는 길이 상이할 뿐이다(殊塗而同歸). 따라서 자신의 길과 다른 인생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있고, 감상할 수도 있어야만 한다.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배제된 비판은 독선과 아집에 불과하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서구 학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회는 인간의 자아실현의 무대이고 통로임은 부정할 수 없다.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권리는 타자에 대한 자신의 요구이고, 의무는 자신에 대한 타자의 요구이다. 요구는 쌍방 간에 진행되기 때문에 양측 모두 상대방에 대하여 요구를 하기에 앞서 상대방의 요구를 먼저 이행하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그토록 강조한 정명(正名)이고, 예(禮)의 근본정신이다. '논어'를 충실하게 살펴보라. 이 두 가지 정신이 바로 '논어'에 흐르고 있는 일관된 논지이다. 사회라는 공동체가 존속되는 한 타자의 차별성에 대한 존중 그리고 권리와 함께 의무를 통한 화해이념은 영원할 것이다. 필자는 '논어'를 경전으로 추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황갑연 전북대 철학과 교수는 한국양명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전라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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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04 23:02

어둠의 시대, 김근태의 희망 노래

김근태가 돌아왔다. 영화 '남영동1985'에서 차마 화면을 오래 보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고문 희생자의 모습으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가 방현석의 글을 빌어 다시 사람의 마을로 돌아왔다. "사실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좀 더 잘 보여주기 위해 픽션이 동원됐을 뿐이다. 나는 이 소설이 백 퍼센트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일을 여는 집』 등 우리 현대사의 순간들을 촘촘하게 포착한 수작으로 많은 독자에게 기억되고 있는 방현석 작가가 9년만에 발표한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는 1년 전에 작고한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삶과 투쟁을 온전하게 담아낸 평전소설이다. 영화 '남영동1985'가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수없이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민주화운동가 김근태에 주목한다면 방현석의 소설은 우리 현대사 굵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김근태의 전면모를 씨줄 날줄로 엮어간다. 늘 조용하고 신중한 신사의 이미지인 김근태에게도 개구쟁이 유년 시절이 있었고, 처음부터 사회의식에 가득 찬 투사가 아니라 그 시절의 많은 가족처럼 어려운 집안살림과 진로로 고민하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대목은 묘한 위안을 준다. 소설 중간 중간 인터뷰 형식의 증언들은 픽션인 소설에 사실감을 더해주는 효과적인 장치로 작동하며 우리 현대사의 격동적인 순간들을 불러낸다. 그 한복판에 늘 김근태가 있었다.박정희 정권 내내 수배자 신세였던 김근태가 전두환 정권 그 살벌한 공포정치에 대항하여 공개민주화운동 조직인 민청련 조직을 띄우고 그 의장을 맡은 것은 정말 대담한 용기였다.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0여일 간 가해진 고문은 그를 꺽어 민주화운동을 말살하고자 했던 군부정권의 기획된 시나리오였으나 김근태는 그 '짐승의 시간'을 낱낱이 기억하고 폭로하여 결국 전두환정권이 몰락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재야 민주화운동의 대부', '시대의 양심'이라는 별칭은 그때부터 그를 붙어 다녔으나 그가 마냥 지사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사회가 수구보수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갖는 사회이며 가장 넓은 국민전선-민주대연합을 유지할 때에만 진보세력이 전진할 수 있다는 입장을 놓지 않은 대단한 현실주의자였다. 그 현실주의를 떠받치는 것은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의 면모였다. 김근태가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노무현 대통령과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며 아파트분양가 원가공개 공약 관철을 요구한 일, 또 국민연금 주식투자를 막아내기 위해 싸운 일은 물론 여권의 대표적 정치인이면서도 노무현정부가 추진하는 한미FTA에 반대하며 국회에서 단식농성을 한 것은 당시 정치권에서 비웃음을 샀지만 역사의 긴 안목에서 보면 "김근태가 옳았다." 그 원칙의 한편으로 노사의 사회적 대타협을 추구하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불화, 갈등으로 사적으로는 서운함도 적지 않았으련만 노무현 대통령이 2009년 검찰 수사를 받으며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괴로워 할 때 김근태 홀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의 본질은 정치보복"이며 "검찰이 스스로 독립을 포기하고 권력에 굴종한다면 그 최후는 철저한 국민의 외면일 것"이라고 비판하는 개인성명을 냈다.유불리, 개인 실속을 따지며 조변석개하는 정치인이 무수한 때에 김근태는 정말 '바보' 정치인이었다. 그가 우직하게 지키고자 했던 '원칙'의 길을 수많은 이들이 비웃고 지나갔다. 한없이 부드럽던 김근태의 손도 이제 온기가 사라졌다. 김근태는 죽음 직전 쓴 글에서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고 호소했다. 그렇게 김근태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시대의 요청에 최후의 순간까지 성실하게 응답하고자 했다.2012년을 점령하라던 그의 마지막 읍소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 참혹한 패배의 끝에서 세상 너머 김근태가 이제 남은 우리를 하나하나 호명하고 있다."희망을 의심할 줄 아는 진지함,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성실함, 대안이 없음을 고백하는 용기, 추상적인 도덕이 아닌 현실적인 차선을 선택해가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1995년 김근태)※이재규씨는 '희망과대안전북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고 김근태 선생이 1989년 재야운동의 총결집체인 전민련 정책위원장일 때 정책위원으로 일하며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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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28 23:02

박근혜, 공자의 가르침 실천해보라

논어를 보면 공자는 정치를 '사람을 사랑하는 구체적 기술'이라고 말했다. 위정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인데, 어떻게 해야 갈고 닦을 수 있을까.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앞으로 5년 동안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고민하며 국민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것이다. 국민행복에만 전념하겠다고 포부를 밝힌 대통령 당선인에게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한겨레출판)을 권한다. 농촌운동과 교육운동을 해온 저자 이남곡씨가 고전인 논어를 현대적이고 독특한 관점으로 다시 풀어 쓴 책이다.■ 자신을 낮추어 국민을 보듬길맹자는 자신을 수양하여 사람을 잘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위정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스승 공자는 더 깊이 생각해 자신을 수양하여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수기안인(修己安人)을 강조했다. 권위적으로 군림하고, 소통을 거부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국민을 보듬고 사랑하는 대통령이 필요한 시대다. 첫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당선인이 그런 위정자가 되어주기를 공자도 이 책을 통해 진지하게 조언하고 있다. 공자의 가르침 중에, 두루 하여 편파적이지 않다는 주이불비(周而不比)도 귀 담아 들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하는데 이를 넘어설 때 군자가 될 수 있다. 사람들과 널리 사귀되 파당을 이루지 않는, 군이부당(群而不黨)을 이해하는 정치인을 국민들은 사랑한다. 특정 개인이나 세력과 타협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보편적 이익을 추구할 때 자신을 포함해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 상생과 화합, 공존을 어떻게 실천한지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당선인은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신뢰 없으면 진정한 통합 어려워그렇다면 많은 국민들은 왜 박근혜 당선인을 지지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 위기 극복에 대한 열망이 컸을 것이다. '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가장 중요한 위정자의 역할이다. 그런데 경제 발전만을 목표로 정책을 추진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식량이 풍부하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하는 국방력이 갖춰지면 백성들 사이에 믿음이 생긴다고 믿는다. 하지만 공자의 생각은 달랐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성숙과 함께 결합되지 않을 때 오히려 재앙이 된다. 부의 양극화, 부정부패, 배금주의 등은 상호불신의 풍조를 만연시켜 사회를 위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신뢰가 없으면 거대한 병력과 첨단 무기가 있더라도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을 공자는 역설했다. 이 책의 저자 이남곡 선생 또한 우리 사회의 진정한 통합을 위협하는 것은 경제나 안보보다 불신감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당선인은 국민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신뢰받는 대통령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시대정신 구현 위한 철학 필요문득 공자가 지금 대한민국에 와서 정치를 시작한다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해진다. 어느 날, 제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맡게 된다면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공자는 "명을 바로 세우겠다(正名)"라고 대답했다. 정명을 명분(名分)으로 해석해 독재 치하에서 권력 유지나 획득의 근거로 사용했지만 참뜻은 그렇지 않다. 공자는 정명을 '시대정신의 구현을 위한 종합 철학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양극화 해결, 지구환경 보존, 국민 복지를 아우르는 정치 철학을 박근혜 당선인이 지금 명확하게 세워야 할 때다.덕으로 정치를 구현한다(爲政以德), 말은 더디게, 행동은 민첩하게(欲訥於言 而敏於行), 화합하되 똑같기를 강요하지 않는다(和而不同), 널리 은혜를 베풀고 대중을 구제한다(博施濟衆). 공자의 이런 가르침은 2500년을 뛰어 넘어 미래 사회를 열어가는 핵심 키워드다. 박근혜 당선인이 공자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길 모든 국민이 기대하고 있다.△ 문부일씨는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정치학) 졸업했으며,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 부문)로 등단했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동화 부문)로 등단했으며, 동화집'찢어, Jean'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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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21 23:02

정군수 시인이 본 채만식의 '민족의 죄인' - 친일행위 반성한 자전소설

우리 전북에는 몇 개의 문학관이 있다. 그중에서 미당시문학관과 채만식문학관은 친일이라는 덫에 걸리어 문학관이 지니는 순수한 기능과 역할을 다 하기에는 많은 장애가 있다. 미당시문학관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친일시도 함께 걸리어 방문객들에게 역사의 준엄함을 깨닫게 하고 미래의 삶의 지표를 암시해준다. 그러나 채만식문학관은 그분의 친일행적을 나타내는 글이나 저서가 전시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광복 후에 쓰인 '민족의 죄인'이라는 글이 그분의 양심고백이며 문학인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 진실된 모습이라며 면죄부를 주려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세상에 나온 그분의 친일작품을 거론하며 반대하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고장의 소설가 채만식을 〈책과 만나는 세상〉에서 다시 만나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1946년에 쓴 『민족의 죄인』은 채만식의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소설이다. 그는 친일활동으로 말미암아 해방 후 고뇌에 빠졌고, 그래서 스스로 '민족의 죄인'이라 여기고 글을 쓴 것이다. 이러한 죄의식은 우리민족 모두가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처벌 이전에 지은 죄를 스스로 반성한다는 것은 도덕적 순결성을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다. 대부분의 친일 작가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은폐하기에 급급했을 당시, 채만식은 자신의 행위를 전면적으로 반성하면서 친일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민족의 죄인'은 우리 문학사에서 친일행위에 대한 유일한 자기반성이자 문제 제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설의 장면 중에 작중화자인 '나'의 참회가 나온다. 먹고살기 위하여 대일협력을 한, 대일협력 딱지를 뗄 수 없는 자신을 창녀에 비유하였다. 한 번 몸을 망친 여자는 집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숫처녀가 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다음의 독백은 바로 이러한 심회를 절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아무리 정강이께서 도피하여 나왔다고 하더라도 한 번 살에 묻은 대일협력의 불결한 진흙은 나의 두 다리에 신겨진 불멸의 고무장화였다. 씻어도 깎아도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죄의 표식'이었다. 창녀가 가정으로 돌아왔다고 그의 생리(生理)가 숫처녀로 환원되어지는 법은 절대로 없듯이.이런 아픈 참회를 하면서도 채만식은 소설의 중심인물인 김군의 입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신문기자가 신문을 맨드는 건 대일협력이고 농민이 농사해서 왜놈과 왜놈의 병정이 배불리 먹구 전쟁을 하게 하게 한 건 대일협력이 아닌가?" 하고 반문함으로써, 우리민족 전부가 어떤 점에서 본다면 모두 친일에 협조한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해서 '민족의 죄인'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결과적으로 친일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 하는 질문이기 때문에, 어느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하는 암시로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의 죄인'이란 제목은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을 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가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죄인'일 수 있다는 개연성을 시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말하였다. 이는 역사란 항상 현재의 관점에서 다시 쓰여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오늘날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에 따라 과거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 일제 식민지 시대는 현재적 의미로 재해석할 수 있으며 친일행위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판단도 그런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역사의식이 의미를 갖는 것은 과거를 통해 현재의 교훈을 얻을 수 있고 미래사회를 전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의식의 중심은 항상 현재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현재 사회의 문제점이 왜 발생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지를 과거를 통해 알고 미래사회의 전망을 통하여 오늘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야 할 것이다. 인간 채만식이라는 작가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하며 그의 자전소설 '민족의 죄인'을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읽어야 할 것인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스스로 결정지어야 할 것이다. 음지를 덮어둔다고 싹이 나는 것은 아니다. 덮으면 독버섯이 돋는 것이 자연의 생태다. 덮은 장애물을 활짝 걷어버리고 세상으로 나와 햇볕을 쪼여야 생명은 태어난다. '민족의 죄인'이라는 굴레를 덧씌우는 것도, 벗기는 것도 독자의 몫이다. 긴 겨울밤 우리고장의 작가 채만식을 만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일 것이다. △ 정군수 시인은 현재 전북문인협회 회장으로 전북문단을 이끌고 있다. 전북대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과 전담교수·전주교도소 독서동아리 지도교수·혼불정신선양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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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14 23:02

조미애 시인 추천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 문화는 섬세한 상징 폭력이다

부르디외는 취향을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분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분된다고 말한다. 또한 문화만큼 철저하게 계급에 따라 차별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없다고 한다. 피에르 부르디외(P. Bourdieu)는 1930년 프랑스 남부 딩겐에서 태어나 2002년 1월에 타계한 프랑스의 사회학자다. 그는 문화와 사회관계를 경제 자본과 엉켜서 형성되었다고 보았으며 그러기에 문화는 섬세한 상징 폭력이라고 했다.'구별짓기'(새물결)는 프랑스 사회의 계급 구조를 문화적 자본에 의해서 지배계급과 중간계급, 민중계급으로 나누고 각 계급 내에는 계급 분파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의 취향에 대한 통계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설문 자료를 통해 지배계급의 각 분파들이 예술작품을 전유하는 양태와 그들의 취향, 세대 간의 차이 등 지배계급의 차별화 감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담겨있다. 이 책만큼 문화와 관습의 사회사를 경제사와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문화의 차별적 재생산과 교육의 사회학을 철저하게 추적하고 있는 책도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하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서로 다른 사회계급 성원들은 문화를 승인하는 정도보다는 문화를 인지하는 정도에서 차이가 난다. 중간계급인 쁘띠부르주아지는 문화에 대한 외경으로 가득 차 있다. 문화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순종하고 과거의 귀족적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존경한다. 또한 문화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 결과 그들은 교양을 학식과 동일시하면서 교양인은 광대한 지식의 보고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경우는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불일치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부르디외는 음식취향이나 음악취향을 통해 뚜렷하게 나타나는 계급문화를 설명한다. 음식에 대한 취향은 재현적 상황 즉 과시하기 위한 생활양식에서 자기를 표현하기 위한 아주 흥미로운 지표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궤적의 발전과정 전체를 포괄하는 여러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표현한다. 부르디외의 독창적인 개념은 바로 '자본전환'이다. 부르주아적인 탁월함의 본질을 규정해주는 것은 출신계급의 학력자본과 문화적 유산이다. 그동안 경제적 관념으로만 바라보던 자본의 개념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 그리고 사회관계자본으로 분류하여 자본의 총량을 규정하는데, 각 계급 분파들은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쪽으로부터 가장 심하게 박탈당한 쪽까지 분포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부르디외는 지배계급 내에서도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이 가진 경제자본을 문화자본으로 전환시키려고 한다고 보았다. 특히 문화자본 중에서도 학력자본으로 전환시키려고 한다. 학력경쟁에 부르주아의 자녀들이 합류하게 되면서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학력이나 지식문화 등이 부르주아 문화에 가치를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프랑스 사회와 우리나라의 여러 상황들을 비교하면서 부르디외가 말했던 '구별짓기'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조미애 시인은 1988년 월간'시문학'으로 문단에 나왔고 시집으로 '풀대님으로 오신 당신', '흔들리는 침묵', '풍경' 등이 있고 칼럼집으론 '군자오불 학자오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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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30 23:02

김영 시인이 본 키요자와 만시 스님 에세이집 '겨울부채' - 나를 잃어버림으로써 얻는 자유

'겨울부채'는 하네다 노부오가 엮고 이 아무개가 옮겨 베낀 책으로 키요자와 만시라는 스님의 에세이집이다. 아홉 편의 수필이 들어있는 이 책은 스님의 글을 목사님이 육필로 옮겨 쓴 책이다. 활자로 인쇄하지 않고 한 자 한 자 베껴 쓰고 싶을 만큼 줄줄이 명구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저리 뒤채던 필자의 젊은 날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책이다. 키요자와 만시의 핵심사상은 '자유'(freedom)다. '자유는 자신을 구속하는 사물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림(喪我)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절대굴종(absolute submission)과 나란히 성립되는 절대자유(absolute freedom)인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자유와 남의 자유가 충돌하는 이유는 우리의 자유가 절대굴종과 나란히 성립되는 절대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깨어있음에서 오는 절대자유는 그 어떤 처지에서도 남의 자유와 기꺼이 화합하여 충돌하지 않는다.'고 한다.'그렇다면 깨어있음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충분히 만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苦)의 원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모든 괴로움을 인간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서 겪는다. 실패라는 것도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며, 우리가 마음속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해서 그 때문에 짓눌림을 당할 때에만 실패한다.'고 한다.키요자와 만시가 말하는 '도의적인 삶'(a moral life)은 아주 간단하지만 어렵다. '생선을 즐겨 먹지만 생선이 없다 해서 불평하지 않는다. 재물을 즐기되 그 재물이 없어져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높은 벼슬자리에 앉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 아까워하지 않는다. 지식을 탐구하되 남보다 더 안다고 해서 뽐내지 않고 남보다 덜 안다 해서 주눅 들지 않는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산 속에서 밤하늘 별을 보며 잠자리에 드는 것을 경멸하지 않는다. 좋은 옷을 입지만 그 옷이 더러워지고 찢어져도 태연하다. 이 같은 품성으로 신심을 얻은 사람은 자유인이다. 아무것도 그를 가두거나 가로막지 못한다. 이런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도의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한다.'겨울부채'라는 말은 후한 시대의 학자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 '쓸모없는 재능을 내세우고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의견을 내놓는 것은 여름에 화로를 권하고 겨울에 부채를 내미는 것과 같다'라는 하로동선(夏爐冬扇)에서 나온 말이다. 키요자와 만시는 자신의 호를 '하로동선'(夏爐冬扇)에서 따와 '로센'(爐扇)이라 하였다. 자신의 노력이 아무 쓸모없다는 뜻이다. 절대자 앞에서 자신은 쓸모없다고 고백하는 깨달음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과 통한다. ※김 영 시인은 1995년'자유문학'으로 등단한 뒤 시집 '눈 감아서 환한 세상','다시 길눈 뜨다'와 수필집 '뜬 돌로 사는 일'등을 냈다. 김제 만경여고 교사로 재직 중인 시인은 독서대상 대통령상·신지식인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전북여류문학회 회장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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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16 23:02

이동희 시인이 본 웬델베리의 '삶은 기적이다' - 좋은 독서가 낳은 좋은 글

어느 필자가 말하기를 '좋은 책이란 다른 좋은 책을 읽게 하는 책'이라고 했다. 굳이 어느 필자를 인용할 것도 없이 책권이나 읽은 이라면 경험칙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사실 그렇다.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올곧은 성과만을 담은 것이 아니라, 필자가 겪었을 수많은 독서경험이 축적된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사고에 영향을 주었을 더 많은 다른 책에 독서욕구가 발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좋은 책이다. 필자는 여기에 '좋은 책이란 다른 좋은 책을 읽게 할뿐만 아니라, 더 좋은 글을 쓰게 하는 책'이라고 덧붙여 말하고 싶다. 글쓰기의 달콤한 절망에 한번이라도 빠져본 독자-필자라면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또 다른 좋은 사람'에게 인연이 닿는 인생살이-교우처럼, 혹은 '절경'을 구경하고 '또 다른 절경'에 나그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여행처럼, 좋은 책은 좋은 글을 낳게 하는 수원지이자 유혹자인 셈이다.독서태도-습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필자는 책을 읽을 때마다 삼우(三友)를 준비해 두는 버릇이 있다. 밑줄 그을 형광펜과 순간의 생각을 메모할 연필과 다시 보고 싶은 구절을 표시하는 포스트잇이 그것이다. 어느 시인은 '가을비는 연필과 자를 가지고 내린다'고 노래했는데, 필자의 독서비는 형광펜과 연필과 포스트잇을 가지고 내린다.성글게 내려도 가을 산천을 을씨년스럽게 흠뻑 적시는 '가을비'를 어쩌면 그렇게도 따뜻한 예리함으로 그려냈을까? 시정신의 촉수가 내 감성의 현을 건드리는 맛이 예사롭지 않다. 독서비도 그렇다. 읽은 책에 군더더기 메모가 많은 책일수록, 굵은 느낌표나 참고 표시, 깨알 메모가 어지러울수록, 덕지덕지 포스트잇이 많이 붙어 있을수록 그 책은 필자의 독서산천을 가을비로 흠씬 적셔준 책인 셈이다.『삶은 기적이다』는 책이 그랬다. 이 책은 앞에서 말한 글읽기와 글쓰기의 맥락이 어떻게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책이어서 의미가 깊다. 필자의 서가에는 이미 Edward Wilson의 『Consilience』라는 책이 최재천 교수가 번역한 『통섭-統攝』이라는 이름을 달고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여느 때처럼 동네 서점에 독서사냥을 나가서 눈에 들어온 책이다. 녹색평론사의 출판정신처럼 재생용지에 문고판 규모의 자그마한 서책이었다. 선 채로 서문과 목차를 보자니 '에드워드 윌슨의 《통합》에 대하여'라는 장이 있는데 책에서 차지하는 분량이 적지 않았다. 미답의 고봉(高峰)을 어떻게 정복할까 주저하고 있는 참에 편안한 지름길을 귀띔하는 등산안내서를 만난 셈이었다. 반갑기 그지없었다.그러니까 이 책 『삶은 기적이다』는 저자 W.베리가 E.윌슨이 쓴『Consilience』에 대한 서평인 셈이다. 그런데 베리는 이 책의 집필 단서를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의 한 구절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자, 말을 해보세요."에서 빌려오고 있다. 이 책이 탄생하게 된 내력을 보면 이렇다. 리어왕(셰익스피어 희곡, 베리의 독서)Consilience(윌슨의 저서, 베리의 독서)삶은 기적이다(베리의 저작)를 낳은 것이다. 좋은 독서가 좋은 글을 쓰게 하는 수원지이자 유혹자로서 기능하고 있다.'consilience'란 말은 서로 다른 것들이 보다 높은 자리로 비약하고 도약해서 부합되고 일치하는 것을 뜻한다. 즉 상향일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윌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실제로는 하향일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윌슨은 물질보다 높고 큰 존재인 생명, 그보다 더 높고 큰 존재인 정신과 영성을 보다 낮은 물질의 차원으로 환원(주의)시켜 물리적(과학) 법칙으로 해명하려 한다고 W.베리는 비판한다.생명에는 물질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있고, 정신과 영성에는 생물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있다. 존재의 차원이 없는 물질로 생명을 설명할 수 없으며, 존재의 차원이 없는 과학으로 정신과 영성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느냐고 질타한다. 설령 설명하거나 통합할 수 있다고 본다면 그 자체가 바로 지적 오만이라는 것이다.정신과 영성의 소산인 인문학과 예술, 종교가 동경하는 세계는 원래 살아서 통합되어 있던 전체로서의 생명이다. 기계적(물질적) 환원주의로는 '살아 있음'에 다가갈 수 없다. 이 세계는 윌슨이 말하는 계몽주의적 이성에 의해 포획되는 '알 수 있음'의 세계가 아니라, '알 수 없음'의 세계다. 예술-시정신은 바로 알 수 없음의 세계, 신비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세계다.어중간한 도반은 적만도 못하다고 했다.(성철스님) 같은 인문학적 길에 서 있는 도반일지라도 기적 같은 생명의 존재성을 과학적 환원주의와 함께 현실적 권위나 물신적 힘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는 부류에게서 적과 다름없는 차별성을 느낀다.며칠 계속되는 가을비 속에서도 '모든 이론은 회색빛이되 저 생명의 나무는 영원히 푸르다'(괴테 《파우스트》에서)는 단풍잎과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본다/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윌리암 블레이크의 《complete writings》에서)는 시구가 낙엽비처럼 내린다. 삶의 기적은 존재의 저 너머를 응시하는 시정신에 있음을 말하듯이 내린다.※이동희 시인은 1985년 시 전문지 '심상'신인상으로 등단. 전북문인협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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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09 23:02

내가 보지 못한 것을 그는 보았네

무릇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시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 순간에 시인의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옛적의 시란 젊은 날의 치기에 다름 아닐 터이다. 김동수는 시집 '말하는 나무'(불교문예, 2012)에서 "이제 온 힘을 다해 살지 않기로 한다."('나이를 먹는다는 것')고 선언하여 스스로 물리적 나이 먹음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아"('무심 2')도 되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면, 그것은 범부의 일상적 깨달음에 그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김동수는 이 시집에 이르러 기왕의 시집에서 강조했던 이미지조차 거부하고 있다. 마침내 그는 "관음觀淫 속에/관음觀音이 있"(「관음경觀淫經」)는 것까지 꿰뚫게 되었다.김동수의 이와 같은 깨달음은 이 시집에 무더기로 묶여 있는 '마음'시편에 힘입은 것이다. 다소 거칠게 요약한다면, 지금까지 김동수의 시작품들은 사모곡에 다름 아니었다. 어머니란 존재는 너무나 편재적이어서 아무리 시인의 경험이 독특하다고 할지라도, 따로 범주화하기에 난망한 것이 사실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건대, 어머니가 누천년간 획득한 심상은 "당신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부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부재를 인정하고 나면 아들의 시선은 세상으로 외연을 넓혀 '풍경과 하나'('공')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의 산물(一切唯心造)인 셈이다. 그에게서 시적 나아감의 경과를 찾아보는 일은 의미로운 시도이다. 다들 알다시피, 김동수의 본업은 시를 가르치는 문학교사이다. 또 그는 이 시집의 서문에 해당하는 작품에서 '나의 시는 내 영혼의 사당'('詩')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므로 그가 시를 규정하는 안목이야 수년간의 교수행위 속에서 혹은 30년에 걸친 시작 경험에서 절로 내면화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가 연전에 펴낸 이론서 '시적 발상과 창작'(천년의시작, 2008)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아래의 인용 작품은 후자에 속한다.'차를 마신다내 몸과 따뜻하게 하나가 된다싸늘한 아침공기가 방안을 엿보고 있다저도 한 잔의 차가 그리웠던지슬금슬금 문틈으로 기어든다찻잔의 온기들이 자리를 조금씩 내어주자미안한 낯빛으로 다가와서 앉는다먼저 와 있던 두 손들이 그를 감싸차와 나, 창밖의 것들이 하나가 된다천천히 밝아오는 아침, 눈부시다' ('차 한 잔' 전문 중에서)김동수의 시와 시론을 명증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그가 자신의 시를 가리켜 '전일성을 꿈꾸는 인간 본연의 그리움'('시인의 말')이라고 규정한 바를 떠올리면, 위 작품이 지닌 의미는 각별하다. 어느 날 차를 마시다가 시인은 우주와 하나가 된 체험을 느낀다. 시인이 '차와 나, 창밖의 것들이 하나가 된다.'는 사실에 전율하니, 희부염하게 밝아오는 여명조차 '눈부시다'. 그의 눈부신 성취는 시작에 나선 1982년부터 줄기차게 연마했던 시력의 당연한 결과물이다. 바야흐로 김동수는 '저 우주의 푸른 힘'('무덤')을 체감하고 있다. 그가 '골짜기를 덮던 가슴'('가을 숲')을 헤친 모습이 기다려진다. 아마 그는 위의 시편에서 획득한 '전일성'을 발휘하여 "학처럼 솟은 말간 아침"('아침 經 2')을 노래할 터이다.중견시인의 시를 읽노라면 신예 작품에 부족한 연륜을 구경할 수 있다. 그들은 인생을 관조할 나이에 이르렀기에, 시의 편편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와 경험이 짙게 우러난다. 그것만으로도 중견들의 시작품은 귀중한 가치를 띤다. 요새처럼 다들 잘났다고 허풍을 떠는 세상이라면, 그들의 시가 지닌 값어치는 배가된다. 김동수는 지금까지 시적 성과에 기초해 마음의 본질적 국면을 문제삼으면서 새로운 진경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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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1.02 23:02

삶이란 장소에서 일어난다

부산 '또따또가(街) 프로젝트'가 주목을 받고 있다. '또따또가 프로젝트'는 부산의 대표적인 원도심인 중구 중앙동과 동광동 일대를 문학·미술·영화·연극·대중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부산 중구 일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장소성'이다. '또따또가'가 있는 중앙동과 동광동 일대는 '동광동인쇄골목', '자갈치시장', '광복동패션거리', '창선동먹자골목' 등 의미 있는 공간이 주변에 연결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산의 중앙동과 동광동이 예전부터 문화예술인이 즐겨 찾고 놀던 '장소'였다는 점이다. '공간(space)'과 '장소(place)'를 연구한 대표적인 인문지리학자가 이푸 투안과 에드워드 렐프다. 투안은 공간과 장소를 명확히 구분했다. 공간과 장소가 다르게 인식되는 기준은 '경험'이다. 인간은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미지의 공간'을 '친밀한 장소'로 바꾸어 인식하게 된다. 렐프가 장소와 관련해 연구한 성과물은 '장소와 장소상실'(논형·2005)에 담겨 있다. 렐프는 '장소 정체성'(identity of place)으로 장소를 설명한다. 렐프는 장소정체성을 "장소와 장소경험의 주체인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장소의 고유한 특성"라고 정의했다. 장소정체성은 '물리적 환경', '인간 활동', '의미' 등으로 구성된다고 보고 어느 하나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여겼다.렐프의 이론은 특히 경관(landscape)을 분석할 때 의미가 있다. 그는 '진정성(authenticity)'으로 경관과 장소를 분석했는데, 진정성도 역시 현상학적 개념이다. 트릴링(L. Trilling)이 말했던 '진실성(sincerity)'에 가까운 것으로서 하이데거 언급을 빌어 렐프는 "자기 실존에 대한 자유와 책임을 인식할 수 있는 상태로 장소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했다. 능동적이며 자유로운 상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이 진정한 장소란 뜻이다. 현대경관을 '진정한 장소감을 주는 곳'과 '비진정한 장소감을 주는 곳'으로 나누었다. 그렇다면 전주한옥마을과 동문거리는 어떤 장소감을 주는 곳일까. 근래의 모습은 '비진정한 장소감'을 준다. 짧은 시간에 낯선 경관 요소가 너무 많이 들어섰다. '오일주장'이나 '삼백년가', '조약국'과 같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의미 있는 장소들이 하나 둘 없어졌다. 그 빈 자리에 시멘트블록으로 벽을 쌓은 이상한 한옥이나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돌길로 채워졌다. 그 많은 길 중에 왜 하필이면 돌길인가. 오목대로 통하는 골목길을 없애고 굳이 나무로 등산로를 만들어야 했을까. 한옥마을과 동문거리는 20여 년 동안 '실존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의미 있는 공간이다.'새벽강'이란 술집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을 만났고 '동문사거리수퍼'에서 담배를 샀다. '풍전콩나물국밥집'에서 해장을 했으며 가끔 '삼양다방'에서 다방커피를 마셨다. '산조예술제'가 치러질 때 한옥마을 골목을 누비고 다녔고 전주향교·경기전은 주로 이용하는 산책로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옥마을·동문사거리는 필자에게 '진정한 장소감'을 주는 곳이었다. 21세기 관광여행의 경향은 '의미를 주는 여행', 즉 장소감을 소비하는 관광이다. 한옥마을 일대의 장소성은 약 100여 년을 통과하며 역사적으로 쌓인 귀중한 유산이다. 전주시는 그런 장소성을 없애고 새로운 경관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문득 현재의 한옥마을과 동문거리가 여행자들에게 어떤 장소감을 줄지 궁금하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 의미와 친숙함을 주지 못한다면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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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0.26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