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왠지 내키지 않는 것들로 가득한 곳, 그건 냉장고가 아닐까?
이즈막, 무슨 까닭인지 몸을 놀려 뭔가를 치우고 정돈하는 일들이 끔찍이 싫다. 힘들고 피곤하다는 이유만으론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게으름 같은 것인데, 사람들은 이런 증상들을 늙어가는 징조라고 말한다.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모든 게 시들하고 신선하게 자극을 주는 일도 별로 없는 요즘 시간들은 마치 사막을 건너는 것처럼 아득하고 위태롭다. 사람들은 또 이런 말도 한다. 집안일은 하고 싶을 때 해야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병 생긴다고 그래,
'짓'이 날 때까지 내 버려두자. 좀 지저분하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하면서 아무리 자기 합리화를 시켜도 마음 한쪽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려면 자신이 사는 곳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고 닦달하던 내게 온통 버릴 것으로 가득한 냉장고는 문을 열 때마 다 내 자존심을 건드리며 스트레스를 준다.
비좁아진 냉장고에 수박을 넣으려고 애를 쓰다 극도로 짜증이 나던 어느 날 밤, 내 야행성이 발동해 냉장고 앞으로 갔다. 그리고 버렸다. 버리고 또 버렸다. 두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발효식품까지 모두 버렸다. 마치 냉장고가 알라딘의 램프라도 된 양 버려도 버려도 뭔가가 꾸역꾸역 나왔다.
치우고 정리한다는 건 버리는 작업이었다. 내용물을 버리고 난 그릇들을 씻고 쓰레기를 모아 밖으로 내놓고 나니 새벽 두 시가 넘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냉장고를 열어 본 순간, 그 뿌듯함이라니, 잘 정리된 공간들이 마치 내가 정복한 땅들처럼 자랑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거기다가 내가 내 게으름을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해졌다. 너무 피곤한 탓인가, 잘 시간이 지났는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주방으로 나가 다시 냉장고를 열어 봤다. 내게 정복당한 냉장고가 하얀 여백을 보이며 반짝반짝 윤까지 났다.
너무도 개운하게 비워진 냉장고 속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니 모든 걸 버리고, 놓아버리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아 그걸 지키려고 버둥대며 안간힘을 쓰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시 숨이 막혔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다가 중요한 현재를 놓쳐버리는 소모적인 삶이야말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거 나 뭐가 다르겠는가. 그러나 어디 사람의 욕심이 냉장고 속의 음식들 처럼 가볍게 버리고 비워버릴 수있는 것이던가.
때때로 모든 불편을 감수하며 가구 하나 없는 방에서 함부로 뒹굴며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빼곡한 가구들로 좁은 공간을 불편해하면서도 그 여백의 허전함을 못 견디고 또 뭔가를 채우려는 우리의 욕심은 얼마나 모순인가. 평범하고 일상적인 냉장고 청소를 하다가, 잔뜩 가진 것보다 더 편안한 비움의 미학을 알았으니 행운이지 싶다.
다른 생각 없이 한곳으로만 치닫는다는 것, 그 거침없음이 단순과 치열함을 함께 보여주듯 비움이야말로 욕심의 부질없음과 홀가분한 자유를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울수록 가벼워져 높이 날 수 있을 것이다. 가벼워진다는 것, 그것은 복잡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 짐스러운 복잡함을 버리지 못하고 피곤에 절어 비명을 지르며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이야말로 혹시 버거운 짐에서 해방되면 허전해서 더 못 견딜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아! 웬만하면 다 비우고 좀 가벼워지자.
△최화경 수필가는 <좋은문학>으로 등단했다. 행촌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전북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 문학예술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수필집 <낮술 환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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