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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인 100년의 삶] 초가집에서 아파트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생활하는 공간인 주거 공간이다. 이중에서도 생활공간은 경제생활의 발전과, 외국 문화의 유입 등으로 해서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주거는 부유한 일부 계층에 한정되었던 기와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초가였다. 그래서 1888년 서울을 처음 본 언더우드 부인은 "도시가 마치 거대한 버섯처럼 보였다"고 서술할 정도였다. 이것은 당시 서울의 대부분의 집이 초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이 이 정도였으니 전주나 전라북도 지역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당시의 사진들을 통해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서양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주거양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된 모습은 먼저 기존의 한옥에 생활에 편리성을 더하기 위해서 유리창을 다는 등의 개량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화된 생활 공간은 지금도 시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한옥 구조와 비슷하다.

 

이러한 변화된 모습에서 점차 집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서양식을 추가하게 되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1906년 요셉 베르모레르 신부의 설계로 제작된 익산시 망성면에 있는 나바우 성당이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이후 개인 주택에도 적용되었다.

 

그리고 아예 서양식의 집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집을 우리는 쉽게 '서양식 집' 즉 양옥(洋屋)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어진 양옥은 1884년 인천에 건립된 세창양행 사택이다. 그리고 최초의 개인 양옥은 1912년경에 건축된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의 집이라고 한다. 이러한 양옥이 전주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아마도 1914년 완공된 전동성당일 것이다.

 

또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이 도내에 들어와 생활하게 되었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들어와 생활하게 되면서 그들은 일본식의 집들을 짓고 살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식 집들은 주로 군산, 익산 등 일본인 농장이 많이 있던 지역에 주로 지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식 집들은 지금도 군산의 일부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집들은 주로 외국인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살던 집들이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한편 일본인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쫒겨난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비록 도시로 나오기는 하였지만 살 수 있는 집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일본인들이 도시의 노무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지은 이른바 영단주택이라는 10평 이하의 집이나, 도시 근교에 움막이나 움집을 짓고 생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활은 해방이 되어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특히 해외에 있던 동포들이 귀국함으로 해서 주택난은 심화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택난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집들이 파괴되어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정부에서는 이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이 마련되게 되었다. 우선 정부에서는 주택개량사업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1956년에는 정부에서 저리 융자금과 건축자재를 분양해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주택개량사업을 실시하면서 전주 군산 익산의 3시 지역에서는 점차 벽돌과 양기와를 사용한 집들이 건축되게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많은 수의 기와집들은 이때 만들어진 양기와로 만든 집들이다.

 

이어서 1960년대에 실시된 경제개발계획에 의해서는 주택금융제도의 발전과 함께 주택건설붐이 일어나게 되어 주택 개량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주택난은 여전히 심하였다. 이러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집들이 필요해지게 되었고 좁은 면적에 많은 집을 짓기 위해서 아파트가 건설되게 되었다.

 

전라북도에 만들어진 최초의 아파트는 1970년 6월 15일에 준공된 교동에 있던 시민아파트이다. 이 아파트는 6평형 14세대와 12평형 22세대가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 이 시민아파트는 재 개발을 위해 철거되었지만 당시는 새로운 형태의 주택으로 많은 사람들의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전주시 외에도 익산시에는 1974년에 주공아파트가 준공되었고, 1983년에는 남중동에 민간 아파트인 거성 남중 아파트가 준공되었다. 그리고 군산시에는 74년에 군산 공군기지내에 주공아파트가 건립되었고, 정읍시에는 79년에, 남원시에는 83년에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시 외곽지역에도 84년에는 익산시 황등면에 거성 황등아파트가 준공되었다. 이처럼 도시지역에서는 아파트를 중심으로 주택이 변화하게 되었으며, 시 외곽지역도 점차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70년대까지 농촌지역은 여전히 초가집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이때부터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주택개량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주택구조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때의 주택개량사업은 주로 석면에 시멘트를 섞어서 만든 슬레이트지붕으로 바꾸는 지붕개량사업이었다. 즉 이때에는 집의 구조는 그대로 둔채 짚으로 만든 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는 작업이 주로 진행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업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연료가 기존의 장작에서 보일러로 바뀌면서 주택 내부 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지 지게 되었다. 이른바 입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입식부엌으로의 변화는 점차 집 전체를 새로 개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특히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도시로 나가 성공한 자녀들이 부모님을 위해서 기존의 집을 헐고 양옥식으로 바꾸었다.

 

도시지역에서는 높은 땅값 때문에 집들은 점점 더 밀집화되고 고층화 되어갔다. 단독주택에서는 마당크기가 줄어들어 채광과 환기가 좋지 않은 내부공간이 만들어졌으며, 아파트에서는 그나마 아이들이 안심하고 뛰어 놀 수 있는 마당이라는 놀이공간이 사라지게 되었다. 경제력이 미약한 계층이 선택할 수 있는 주거환경은 더욱 열악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거에서 원만한 가족관계의 유지나 품위있는 주거생활이 구현되기를 기대한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로인해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도시생활에 많은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결과 최근에 도로가 확장되고 자동차 문화의 보편화 되면서 도시에서 탈출하여 근교의 농촌지역에 집을 짓고 생활하는 전원주택이 확산되고 있다.

 

또한 시멘트와 철골구조의 삭막하고 건강에 좋지 않은 주택구조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은 새로이 옛날식의 주택구조인 흙벽돌과 황토방을 갖춘 주택형식을 짓기도 한다.

 

/박노석(전라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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