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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고령화사회, 나잇값하기 - 전상국

전상국(소설가·강원대 명예교수)

기차역 기다림방에서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한 분이 매표구 역무원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역무원이 뭔가 정중히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계속 자기 할 소리만 거친 욕설을 섞어 내쏟았다. 그 소동을 구경하던 젊은이 하나가 혼잣소리하듯 말했다. 나잇값 좀 하시지.

 

'나잇값'은 그 연륜에 비해 행실이 좀 가볍거나 덤벙대는 사람을 질책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나잇값, 나잇살-. 젊은 사람보다 주로 나이 많은 사람을 겨냥해 낮잡아 쓰는 말이라 바야흐로 고령화 사회의 노인 깔보기 키워드가 됨직하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0.7%, 곧 인구 열 사람 중 한 명이 나이 65세 이상 노인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이에 따라 노인 한 사람을 부양하는 생산 가능인구 수도 10년 전 10.4명에서 올해 6.8 명으로 대폭 줄어 그에 따른 의무나 책임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고령 인구가 증가하는 원인인 사망률 감소는 노인들이 자나 깨나 자신의 건강관리에 철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몸이 건강하다고 모두 나이대접을 받고 사는 것은 아니다. 몸은 씽씽 건강한데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건강한 몸에 비해 마음 건강이 신통치 않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이와 달리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몸까지 병약해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으며 사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마음이 건강한 이들만이 누리고 사는 복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성공한 인생으로 사는 길은 오직 자기 절제의 겸허와 행실의 부드러움으로 그 나잇살에 걸맞은 나잇값을 하며 사는 일일 것이다. 고령화 사회, 노인들을 위한 각종 복지 정책과 시설 갖추기도 중요하지만 그런 복지 혜택을 주문하고 누리기 위한 우리 스스로의 자격 갖추기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어려운 시대, 어른 모시고 자식들 위해 헌신하며 열심히 살아온, 그 공든 탑을 깡그리 허물어 내고야 세상을 뜨는 그런 어쩔 수 없는 늘그막의 비애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늙은 자기를 왜 그처럼 가까이 하기를 저어하는가를 아는 일이다.

 

내가 네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그 공치사하기. 그 불편한 심기가 불쑥 치밀면 불 같이 화내기.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기.

 

자기 생각만 옳고 남의 생각은 냅다 무지르는 고집불통. 고집은 늙은이 병중 가장 더러운 것이다. 게다가 귀까지 어두우니 남의 얘긴 아랑곳없이 자기 목소리만 점점 높아질 밖에. 감투 벗은 지 오랜 뒤에도 그 감투 위세하며 살기. 내가 잘 나갈 때 그 놈이 날 찾아와서는…, 집에 금송아지 키우던 그 놈의 왕년 병은 현재의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마음 불편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로 그 말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가소로움에다 깊은 연민까지 불러일으킬 뿐이다.

 

나이 먹을수록 마음속에 생기는 갖가지 마음 불편함을 스스로 덜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를 원망하는 일도, 무시당해 화가 나는 일도, 자기 말이 안 통하는 그 울화도 모두 자신의 마음 건강을 결정적으로 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새벽안개 속에 두부 배달을 하는 등 그 나이에도 일터에서 묵묵히 일하는 노인들의 밝은 얼굴. 어린이 놀이터나 길가에 다니며 비닐주머니에 휴지를 줍고 있는 팔십 노인의 근면, 안녕하세요, 이웃 사람들한테 언제나 먼저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그 할머니의 곱게 늙어가는 모습, 이 모두가 건강한 마음으로 나잇값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얘들아, 조용히 해! 지금 할아버지 책 읽고 계셔.

 

할아버지 할머니의 책 읽고 있는 모습, 이런 것이 진짜 가정교육일 터.

 

나이대접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잇값을 하는 그 즐거움을 찾아 나선 길 위에서 얻어질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 이 나이쯤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면서도 그 실천은 결코 쉽지 않다. 이미 굳어진 행실을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쌓아놓은 것도 없으니 허물어질 것도 없다는 체념의 비애, 그 자위가 고작일 뿐.

 

문제는 고령화 사회를 넘어 나잇값을 하며 살기가 지금보다 몇 배 더 어려울 것이 분명한 고령사회의 주인공인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다.

 

'채근담'에 이런 말이 있다. 젊어서 덕을 쌓지 않으면 늙어죽을 때 고기 없는 빈 연못을 지키는 따오기처럼 쓸쓸하게 죽는다.

 

/전상국(소설가·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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