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1-28 16:49 (목)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금요칼럼

추억은 힘이 세다

사람들은 삶이 힘들 때 추억의 힘을 빌어서 거기서 벗어난다. 추억이란 우리 안에서 지속하는 현존이다. 추억은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바래지만 그것이 아주 사라지는 법은 없다. 분명한 것은 추억의 힘이 아주 세다는 사실이다. 추억과 비밀은 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내면의 재화이다. 한 사람이 가진 인격과 취향은 과거라는 골짜기에서 양조(釀造)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은 과거가 머금은 빛들로 빛날 수 있다. 먼 시절의 추억이 그리워지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내게 스무 살은 암울하고 칙칙했다. 글을 쓴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백수로 떠돌던 시절이다. 그 시절의 여성들은 더 환하게 웃었는데 그 웃는 얼굴이 얼마나 눈부셨던지! 나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여성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때에도 봄마다 모란과 작약이 피고, 가을 내장산의 단풍은 볼만했다. 물은 낮은 지대로 흘러가고, 불꽃은 수직으로 타올랐다. 강변의 버드나무들은 푸르고, 가을엔 북국의 기러기 떼가 한반도로 날아왔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더 너그럽고, 배움이 깊지 않은 아버지들은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성심을 다해 일했다. 나는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고은 시집,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단편과 시를 모은 ‘이별 없는 세대’,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이 수록된 신구문화사판 ‘전후세계문학선집’ 따위를 경전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한량처럼 빈둥거리던 나는 사실은 서울의 시립도서관에서 독학으로 시와 철학에 정진하던 청년이었다. 가끔 프랑스 문화원에서 영화를 보거나 명동 입구 카페 데아뜨르에서 연극 관람을 했다. 그리고 굶주린 하이네가 먹잇감을 찾듯이 ‘르네상스’나 ‘필하모니’에서 고전음악을 들으며 영혼이 고양되는 찰나에 취했다. 그 무렵 문학과 예술에 목말라 하던 내게 군 입대 신체검사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나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본적지인 충남의 신체검사장을 찾아갔다. 군인들은 신체검사를 받는 장정들에게 반말이니 욕설을 내뱉으며 모욕을 주었다. 나는 신체검사에서 대한민국 청년의 평균 체중에 미달한 탓에 무종 판정을 받았는데, 그건 이듬해 신체검사를 다시 와서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서울로 돌아와 ‘르네상스’에 가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속으로 들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독일 작가 하일리히 뵐의 소설이던가? 한 어린 병사가 징집되어 열차에 타기 직전 한 건물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어디선가 울려 나오는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다. 그 음악 전곡을 들을 수 있다면 제 인생의 반을 떼어 주겠다고 말하던 어린 병사는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향한다. 그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신체검사에서 낙방을 하고 돌아오던 나는 얼마나 의기소침하고 비장했던가! 그건 내가 전쟁터로 향하는 어린 병사의 가엾은 영혼에 빙의된 상태였던 탓이리라. 추억은 늘 실제 경험에 기반 하지 않는다. 철학자 샤를 페팽은 “우리는 과거를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추억은 재가공되고, 뇌를 이루는 850억 개의 뉴런과 그보다 더 많은 시냅스들의 작용하는 가운데 그 정체가 바뀐다. 그것은 추억이 경험과 몽상이 상호 삼투하며 나타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기억의] 재구성’(샤를 페팽, ‘삶은 어제가 있어 빛난다’ 163쪽)이다. 추억은 좋은 시절을 더 화사하게 윤색하고, 끼니를 거르던 가난의 누주함도 그리워하게 만든다. 추억에는 우리를 너그러운 사람이 만드는 힘이 있다. 고백컨대, 15세부터 시를 썼던 볼프강 보르헤르트를 동경하고(나도 15세부터 시를 썼다), 스무 살의 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영혼이 찢긴 채 삐적 마른 몸으로 떠도는 한심한 영혼이었다. 나를 성장으로 이끈 창조적 약동, 생의 리듬들은 그 시절의 정처 없음과 방황, 나른한 독서, 음악에의 열광 등에서 나왔다. 오늘 내 삶에 조금이라도 빛나는 게 있다면, 그건 모두 저 암울한 어제에서 온 것이다. 장석주 시인

  • 오피니언
  • 기고
  • 2024.11.21 18:46

임기 후반의 변수와 첫 분수령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후반부가 시작되었다. 남은 시간이 지금까지 보낸 날보다 짧다. “잃어버린 2년 반”이 반복될지 아니면 반전의 시간일지 궁금하다. 대치정국은 이어진다. 민주당은 ‘기승전 윤석열 탄핵’과 ‘임기단축의 개헌’을 동시에 추진한다. 대통령은 24회의 재의요구권 행사와 ‘시행령 정치’로 맞선다. 1987년 이후의 민주주의 전통은 연이어 위협 받는다. 거대야당은 합의우선의 원칙을 무시하고 ‘독식과 독주’를 새로운 관행으로 만든다. 대통령은 처음으로 국회 개원식에 불참했고 11년 만에 시정연설을 총리에게 미룬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걱정은 점점 높아진다. 시계 제로의 상황이다. “정쟁에 매몰된 정치권이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를 외면”하지만 “이 상태로는 끝까지 못 간다.” 인식도 넓게 퍼지는 모양새다. 대치정국의 돌파구는 가능할까? 여야의 극단적 대립을 해소할 타협안은 없을까? 대통령 임기 후반 정국의 주요 변수와 포인트에 달렸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그리고 한동훈 대표의 삼각함수다. 여권부터 보자. 당장 관심은 윤석열 지지율이다. 최근 대통령 지지율은 조사마다 ‘최저치 경신’중이었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고까지 한다. 더 내려가면 국정동력을 상실할 위기 앞에 선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당분간 횡보 가능성이 높다. 반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추가 하락을 방어하려 한다. 핵심은 TK 지지율인데 “60%는 나오는 곳이 영남”이라는 주장과 “전국적 여론 흐름과 괴리는 힘들다.”는 반론이 엇갈린다. 최근 한 영남지역 대상 조사는 대통령 지지율이 45%였다. 지금은 대통령의 시간이다. 대통령실과 내각개편의 인사와 쇄신 조치 등으로 국정장악력을 높인다. ‘깜짝’ 외교성과까지 더해질 수 있다. 바탕은 민생 우선의 정책기조다. “장바구니 물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소상공인 자영업자 관련 대책”도 내놓는다고 한다. “후반기엔 국민 체감할 진정성 있는 정책 추진”하며 “양극화 해소정책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소득과 교육 불균형 등 양극화 타개위한 노력”을 전개하려 한다. 한동훈 대표도 변신 중이다. 그는 “당정이 힘을 합쳐야 한다.”며 ‘승리의 길로 함께 가자’는 화합의 메시지를 말한다. 대표의 측근은 “대통령이 한동훈이 제시한 쇄신열차에 탔다.”며 “대통령이 5대 요구사항 대부분을 수용했고,긍정적으로 변화하려 한다.”고 말한다. “걸핏하면 내부분란 일으키는 여당(대표)”에서 이재명 때리기 집중하는 ‘스트라이커 한동훈’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트리플 지지율 하락세 특히 TK와 국민의힘 지지층에서 한동훈 선호도가 낮아지는 게 부담이다. “전략도 용기도 없는 한동훈 차별화 정치”의 한계다 현재 여권은 윤석열 대통령 중심의 권력 집중과 강화다. 국민의힘도 구심력이 높아진다.앞으로도 계속 이럴까? 변수는 첫째,대통령의 인식 변화다. 지금 상황을 제대로 정확하게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게 출발점이다. 그래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다. 지금 못하면 앞으로도 못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 부부의 위기는 더 깊어진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에게 담대한 정치적 상상력이 강요될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책임감이 중요하다. 기대보다는 우려가 많다. 윤석열 대통령이 ‘앞으로 잘할 것이라는 의견은 28%’라고 한다. 대통령의 “담화와 기자회견 공감 한다는 27%”에 불과하다. 대통령 지지율의 최대치다. 둘째,대통령과 국민의힘 지지율의 탈동조화냐 동조화냐다. 더블 하락이 계속되면 ‘한동훈의 결속과 쇄신’은 고민에 빠진다. ‘배신자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경계선이라고 판단하느냐가 갈림길이다. 관건은 스모킹 건이다. 사람들이 ‘김건희 특검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게 되느냐다. 다음은 대통령을 향할 수밖에 없다. 김건희 특검은 대통령 부부의 정치적 운명에 결정적일 수 있다. 야권은 단순하다. ‘이재명이냐 아니냐다.’ 이 대표는 ‘대선주자 선호도 1위이자 거대야당의 연임수장으로 “여의도 대통령”’이라고 불린다. 조기 대선과 차기 집권을 위한 조직화를 진행 중이다. 변수는 ‘이재명 사법 리스크’다. 그는 ‘7개 사건 11개 혐의 4개 재판’을 받고 있다. ‘트리플 사법 리스크’의 이 대표는 ‘운명의 한 주’를 맞는다. 부인 김혜경씨의 법카 의혹사건과 본인의 공선법 사건 그리고 위증 교사 사건의 1심 선고다.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라며 “당이 더 결속할 것”이라고 한다. 민주당은 “집권 가능성 높은 후보 제거의 정치수사와 기소”라며 “정치검찰의 탄압”으로 본다. 대통령 임기 후반의 첫 분수령 이번 주 이재명 부부의 재판 1심을 주목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 오피니언
  • 기고
  • 2024.11.14 17:28

마을은 염려 없다

아침 달이 서산에 걸렸다. 예쁘다. 아직 노란빛이 남았다. 아침 바람 부는 날이다. 양식이가 산책 못 간다고 문자가 왔다. 홀로 걷는 들판이 텅 비었다. 들이 멀리 한가롭다. 아내가 나들이 가면서 빨래 다 되면 널라고 한다. 바람이 거칠어져서 거실에 빨래를 널었다. 책을 보다가 잠이 쏟아져서, 낮잠을 길게 잤다. 어제 주워다 삶은 알밤을 다람쥐처럼 앉아 까먹었다. 배불렀다. 자전거 타고 알밤 주우러 갔다. 회관 마당에 점순 어머니가 콩 타작하고 있다. 점순 어머니가 삶은 감자를 비닐 주머니 속에서 꺼내 준다. 따뜻하다. 감자가 든 비닐 주머니 속에 김이 서려 있다. 하나 남은 것도 가져가라고 했다. 두고 갔다. 가을바람과 가을 햇살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자연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그대로 한다. 널어놓고 깨 위를 돌아다니며 두발로 고랑과 이랑을 만든다. 추상화 같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삶이 예술이다. 바람이 세게 불면 밤나무 가지가 흔들려 알밤이 많이 빠진다. 생각대로 알밤이 빠져 있다. 밤나무의 생산은 아름답고 나의 수확은 신난다. 저만큼 밤송이가 알밤을 물고 떨어져 있다. 두 발로 밤송이를 열고 알밤을 꺼낸다. 서너 개 주우면 행복한 한주먹이 된다. 밤을 다 줍고 밤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오지 않아도 되겠다. 점순 어머니가 아직도 콩 타작하고 있다. 나무막대기를 양손에 들고 콩대를 투 닥 투 닥 때린다. 콩들이 콩콩 뛰어나와 톡톡 뛰다가 또르르 또르르 글러 간다. 콩을 쫓아다녔다. 금방 한주먹이 된다. 일하는 중간에 올 수 없어 콩 타작 다 할 때까지 콩을 따라다니며 주웠다. 콩 한 개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는다고 했다. 앞산에는 팽나무 잎이 노랗게 물든다. 뒷산 그늘이 마을을 덮어 올 때 아내가 왔다. 뒤 안에서 호박잎과 새순을 땄다. 호박잎은 단 한 번의 서리로 잎들이 시들어 버린다. 서리 오기 전에 호박잎과 호박 줄기 끝 새순을 따서 쌈을 싸 먹어야 한다. 무성한 넝쿨 속에 숨은 호박도 찾아 딴다. 여기도 있다! 저기도 있네! 이 무슨 일인가! 늦복 터졌네! 호박 두 포기를 심었는데, 많이도 열린다. 부침개 부쳐 먹기 좋은 애호박을 골라 회관에 가져다드렸다. “아니, 김 선생네는 왜 그렇게 호박이 잘 열린 데야” “내년에 우리 집 호박도 좀 심어주지.” 좋아한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한 가족이 잔디 마당에서 뛰어논다. 아이들에게 크게 허리 숙여 인사 하고 나이를 물었다 여섯 살, 네 살이다. 어머니 되시는 분이 나더러 후손이세요, 한다. 김용택 후손이냐는 말이다. 내가 본인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일군이세요? 하기도 한다. 경기도에서 왔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어제 새로 나온 그림책을 한 권 줬다.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인터넷에 들어가 시집 리뷰를 찾아 읽었다. 월트 휘트먼의 이런 시 구절을 보았다. “당신의 영혼을 모독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멀리하라” 날이 어두워진다. 창밖을 보았다. 밥 짓는 아내의 딸그락 소리가 나의 하루를 고른다. 사람 사는 일에 이일 저일 없을 리 없다. 사람이 살면서 겪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견디며 이겨내고 무슨 수를 찾아 하루하루 살아간다. 사람들의 하루가 다 장하다. 나는 마을의 일상을 잘 따른다. 열다섯 가구가 사는 마을이라고 나라의 일과 무관할 리 없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나라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평일을 평상시처럼 산다. 여든아홉 점순 어머니는 이웃 마을에서 우리 마을로 시집와서 70여 년을 사신다. 나는 ‘그 일’이 그렇게 좋다. 오늘은 2024년 10월 26일이다. 김용택 시인

  • 오피니언
  • 기고
  • 2024.11.07 18:51

‘지금, 여기’ 행복하다는 느낌

지난달 영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잠시 시간을 내어 30여 년 전 살았던 도시를 방문하였다. 18세기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영국의 3대 도시인 셰필드는 놀랍게도 예전 그대로였다. 다듬어지지 않은 구불구불한 신작로, 허술한 2층 석조 주택, 도시 중심 커뮤니티 센터와 우뚝 솟은 교회당 종탑이 있는 영국 북부 산업도시의 여전한 모습으로 필자를 반겨주었다. 셰필드까지 1시간이 걸리는 열차가 20분 연착되었지만 승객들은 불평없이 묵묵히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에 예고없이 플랫폼이 바뀌는 바람에 하마터면 기차를 놓칠뻔하기도 했다. 역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 부부와 엇갈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잘 만났다. 반가운 포옹을 하며 눈에 이슬이 맺힌 친구의 모습을 보자 필자도 울컥했다. 친구 부부에게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지만 머나먼 한국에서 온 귀한 손님을 밖에서 대접할 수 없다며 집으로 초대했다. 여전히 영국 음식은 심심한 편이었지만 친구의 아내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은 필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오랜만에 둘러본 친구의 집은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무척 커 보였던 집이었지만 지금은 좁고 옹색한 느낌이 들었고 5명이 앉으면 꽉 차버리는 좁은 거실 한켠에 가족사진이 걸려있었다. 친구는 50년 이상을 이 집에 살면서 세 자녀를 키워 출가시켰는데, 잘 가꾸어진 과일나무가 있는 작은 뒤뜰에서 멀리서 온 가족까지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낼때면 새삼스럽게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 수 있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비슷한 상황인 필자의 경우는 가족모임을 위해 식당을 예약하고 집 밖에서 모이고 있지만 예전에 온 식구들이 좁은 집에 모여 음식을 차리고 떠들썩하게 모였다가 헤어졌던 정겨운 모습이 떠올랐다. 올해 초에 필자가 무릎 수술을 받은 뒤 한동안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하니, 친구 역시 나이가 들어 엉덩이뼈 수술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낙후된 영국의 의료시스템 때문에 수술 하루 전날 입원하고 수술받은 다음날 퇴원하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약 3주간의 입원, 그리고 퇴원 후 꾸준히 통원 치료를 받았던 필자의 경험과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좋은 의료체계에서 훌륭한 의료 서비스를 받았음에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필자는 ‘그러한 혜택에 충분히 감사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에 명확히 답을 할 자신이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행복하다는 느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평범한 일상을 편안하게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누리며 얻는 행복에 대해 필자를 포함한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며 무감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았다. 미국의 모델 겸 배우였던 린 피터스(Lyn Peters)는 “행복이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즐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따뜻하고 안락한 집에 살면서 집에 대한 별다른 느낌없이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진 않은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의료시스템과 복지서비스를 제공받았지만 병원 예약 문제, 사소한 서비스 문제로 불평하지 않았는지, 더욱더 편안함을 바라지 않았는지 돌아보았다. 한 그릇의 밥이 차려질 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왔는지 잠시 잊고 살았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은 수백만 명의 부모님 세대, 선배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것을 새삼 돌이켜본다. 우리 세대는 이것을 잘 받고 관리하여 다음 세대들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책임이 있고 이것이 ‘지속가능한 사회’를 이어갈 것이다. 한국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필자, 영국 셰필드에서 노년을 보내는 친구와의 30년 만의 만남은 ‘행복하다는 느낌’은 저기, 멀리가 아닌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10.31 18:58

작은 것의 마법

나쁜 일이 갑자기 터지는 것이 아니듯이 좋은 일도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일이 있기 훨씬 오래 전부터 작은 것들이 모이고 쌓여 지금의 좋은 소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올림픽에 나간 국가대표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것은 하루아침에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고, 기술력과 인재 경영으로 인정받는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오르는 일이 우연히 되는 일이 아니다. 작은 흙 알갱이가 쌓여 큰 산을 이루고, 조그만 물줄기가 합쳐져 거대한 강을 만든다. 하늘의 작은 별들이 모여 우주를 형성하고, 돌멩이 하나가 뭉쳐져 두텁고 광활한 땅을 만든다. 세상의 어떤 좋은 일이든 시간과 성실과 정성이 그 안에 깃들어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역시 어느 날 운이 좋아서 받은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문학 유전자, 작가가 어려서부터 읽은 수많은 책과 주옥같은 문장들, 같은 주제로 치열하게 문학 작품을 써내려갔던 선배 문인들,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던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 작가의 작품 속에 나타난 역사적인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 작가를 키워 냈던 대한민국의 역사적 토양, 심지어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현 시대의 다양한 폭력들, 따지고 들면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한 작은 이유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개인의 수상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수상인 것이다. 여전히 겪어내야 할 역사의 아픔이 있고,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의 불합리가 상존하는 대한민국이, 그 아픔과 불합리를 이겨내야 하고 풀어내야 한다는 의미의 노벨문학상인 것이다. 요즘 들어 갑자기 살이 찌고 몸무게가 늘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적은 양이지만 간식을 자주 먹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잦은 간식이 몸에 축적되어 살이 되는 것이다. 실적이 안 좋아 위기를 겪고 있는 기업도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잘나갈 때 영원할 것이란 착각에 작은 위기들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우물은 없다. 물이 잘 나올 때 다른 우물을 파야 한다.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잃고 헤매는 권력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돌을 맞아도 견뎌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돌을 던지려고 하는지 고민이 없다면 결국 쓸쓸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작은 것들이 얼마나 큰 마법의 힘을 발휘하는지 실감하지 못한다. 우주가 작은 것의 오랜 시간 축적이고, 존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간이 살아온 모든 역사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변하지 않는 원칙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쌓이면 마법이 된다. 단단한 얼음(堅氷, 견빙)은 작은 서리(霜, 상)가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것이고, 위대한 업적은 쉬지 않고(無息, 무식) 성실하게 살아온(至誠, 지성) 결과다. 쉬지 않으면 오래가고(久, 구), 오래가면 드러나고(徵, 징), 드러나면 원대해 지고(悠遠, 유원), 원대해지면 넓어지고(博厚, 박후), 넓어지면 높아진다(高明, 고명). 넓어지면 모든 것을 실어주고(載物, 재물), 높아지면 모든 것을 덮어준다(覆物, 복물). 그것이 우주가 운행하는 원칙이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다. 오늘 하루가 승부처다. 작은 것이 경쟁력이다. 작다고 무시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몸에 벤 절약이 큰 부자를 만들고, 작은 기술이 쌓여 초격차를 만든다. 작은 신뢰가 쌓여 정권의 존망을 결정한다.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은 겨울을 만드는 작은 첫걸음이다. 이 서리가 쌓여 단단한 겨울을 만들어 낼 것이다. 큰 목표를 세우고, 거대한 담론으로 세상을 살기 보다는 오늘 이 순간 작은 것의 마법을 믿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런 분들이 미래를 바꾸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10.24 18:22

하루의 보람과 평화는 어떻게 오는가?

장석주 시인 우리가 삶에서 구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평온이나 고요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아침 일찍 동네 빵집에 들러 갓 구운 빵을 사고, 단골 카페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으며, 오후엔 상수리나무 숲속을 거닐며 보낸다. 우리 인생은 아무 일없이 지나가는 밋밋한 하루들이 쌓여 이루어진다. 분명한 건 하루의 보람과 평화는 공짜로 얻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내적 열망과 엄청난 에너지를 품지 않고는 가질 수 없다. 우리의 심심한 일상은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무너지는가! 그걸 잊고 살다가 소중한 것들이 잃어버린 다음에야 우리는 화들짝 깨닫는다. 우리가 살아낸 보통의 하루들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적인가를! 2022년 8월12일 열한시 십오분 전, 사방이 화창한 금요일 오전이다. 그 시각 뉴욕시의 한 원형극장 무대에 올랐던 유명한 작가가 피습을 당한다. ‘악마의 시’로 알려진 일흔다섯 살의 작가 살만 루슈디가 그 피해자다. 그를 표적 삼은 가해자는 무슬림 극단주의자들 중 하나로 스물넷 된 청년이다. 어디선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노작가의 목과 눈을 칼로 찔렀지만 이 흉측한 ‘영웅’의 역겨운 의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루슈디는 열다섯 군데나 자상을 입고 눈 한쪽을 잃었다. 과연 가해자는 알았을까? 그가 휘두른 칼이 루슈디의 목을 관통했을 때 단박에 한 사람의 자유를 앗아갔으며, 일상과 평화를 산산조각 냈다는 것을. 루슈디는 죽음과 대면한 상태로 외상병원으로 호송 되어 칼에 깊이 베이고 찢긴 데를 금속봉합기로 고정한 채 수술을 받는다. 최고의 의사들이 맡은 외과수술은 잘 끝나고, 그는 고통 속에서 재활 훈련을 받으며 혼자 샤워를 하고 걷는 법을 배운다. 이제 그는 경찰과 보안회사 인력의 철저한 경호 아래 예전의 일상을 되찾고 보통의 삶을 회복하는 중이다. 괴한이 루슈디를 공격한 도구는 칼이다. 칼은 여러 용도로 쓰인다. 주방에서 그것은 조리 도구지만 누군가를 찌를 때는 무기가 된다. 하지만 칼은 도덕적으로 나쁘거나 좋은 게 아니다. 칼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중립인데, 그걸 손에 쥔 자의 의도에 따라 그 도덕적 평판이 나빠지거나 좋아지는 것이다. 작가에겐 언어가 칼이다. 루슈디는 제 피습 과정의 전말을 담은 ‘나이프’라는 책을 펴내는데, 거기에서 ‘언어도 칼이었다. 언어는 세상을 베어 세상의 의미를, 그 내적 작동 방식과 비밀과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 언어는 하나의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베어 들어갈 수 있었다’라고 쓴다. 따지고보면 인류는 태초 이래 폭력에 날 것으로 드러낸 채로 생존을 이어왔다. 인류 역사는 폭력에 얽힌 고약한 서사로 얼룩져 있다는 측면에서 폭력은 역사의 상수이다. 그것은 개인 간 다툼에서 빚어진 소규모 폭행들, 즉 교제 살인, 조리돌림, ‘학폭’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의 유대인 학살, 일본 군대가 저지른 중국 난징 시민 도륙, 크메르루주가 벌인 자국민 150만 학살, 1980년 5월 항쟁 시민 학살까지 그 범주는 아주 넓다. 이 세상 어디에나 이 끔찍한 것이 편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이 이것과의 투쟁에서 쟁취되는 것임을 뜻한다. 루슈디의 피습 사건이 일러주는 것은 폭력이 우리 일상의 어둡고 추악한 일부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증오와 악의에 의해 추동된 폭력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고, 꿈과 행복을 일그러뜨린다. 폭력은 피해자의 몸에 위해를 입히고 인간 존엄을 부수며, 평생 잊을 수 없는 훼손의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이미 일어난 폭력과 미구에 일어날 폭력 사이에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폭력은 우리 삶에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호시탐탐 공격할 기회를 엿본다. 우리가 멀쩡한 신체로 먹고 웃으며 기도하고 산다는 건 지구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광기어린 폭력의 사육제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어떤 폭력도 용인되지 않아야 하며, 그것에 도덕적 정당성을 허락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인류 공동체가 힘을 합쳐 싸워야 할 대상이다. 우리 생명과 존엄, 가족의 안위, 사회의 질서와 도덕적 가치를 지켜내려면 우리는 폭력, 광기와 증오, 일체의 차별에 맞서야 한다. 우리 곁을 떠도는 이 유령이 방심한 틈을 노려 우리와 가족을 공격하고, 일상의 안녕과 평화를 깨부술 것이기 때문이다. 장석주 시인

  • 오피니언
  • 기고
  • 2024.10.17 15:09

이승엽 감독과 윤석열 대통령

가을 야구시즌이다. 하위팀에 업셋 당하거나 포스트시즌 문턱에서 탈락한 팀들은 “감독 나가”시위대와 만난다. 이숭용 감독은 사상 최초의 5위 결정전에서 3-1로 앞서다 8회말 3점 홈런 한방으로 3-4 역전패 당했다. 그때는 9월 ‘41타수 1피안타’ 기록의 마무리 투수를 기용하지 않았다. 최종결정은 감독이었고 김광현 기용은 결국 5분 만에 패배로 돌아온 ‘시즌 마지막 승부수’였다. 냉혹한 승부 세계의 예외는 없다. 리더십 심판의 주기는 더 빨라졌고 팬들의 눈높이는 더 높아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그의 권력은 더 조급해지고 더 높아진 국민 수준에 맞추고 있을까? 최근 악화일로의 ‘김건희 리스크’는 임계점이 멀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매직’과 ‘뚝심’의 감독도 있다. 준플레이오프 명승부를 펼친 염경엽 감독과 이강철 감독이다. 두 감독의 공통점은 정체성이다. 뚜렷한 자신만의 ‘색깔 있는 야구’다. 그들은 자신의 야구 철학과 소신 그리고 개인과 팀 특징과 강점의 극대화를 통해 ‘이기는 야구’를 추구한다. ‘염경엽표 야구’는 공격야구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도루 실패가 게임의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되었음에도 그는 “같은 상황이 또 온다면 또 뛰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뚝심의 공격야구다. “3 타자가 다 초구치고 죽어도 뭐라 안해요”라며 포스트시즌 최초 3 타자 연속 초구 아웃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내가 하던 야구를 하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준플레이오프 1차전 패배에도 2차전에 동일한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도 염 감독은 모든 경기에 똑같은 타순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강철 야구는 직관과 집중력이다.특히 그의 투수 교체 타이밍은 “예술의 경지”라는 평가를 듣는다.이 감독의 직감과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집중력이 핵심이다.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이 감독은 ‘10게임 1할3푼의 타자’를 기용했고 그는 선제 투런 홈런으로 화답했다.“오늘 훈련 때 괜찮아 보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승엽 감독은 정체성 혼란의 위기 속에 있다. 그는 ‘번트왕 된 홈런왕’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팀은 올 시즌 리그 2위의 희생번트를 기록했다. 작전 야구의 스몰 볼이다.여기에 불펜 과부하의 ‘혹사 논란’까지 뒤따른다. 올해 이 감독은 ‘와일드카드 업셋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 시즌 상대전적에서 12승 4패로 압도했던 팀에 ‘18 이닝 무득점’을 기록하며 2연패를 당했다. 포스트시즌에서 그는 3전 전패다. 팀의 ‘사상 최초의 7 시즌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은 막강한 공격력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이승엽 감독의 팀은 전통적으로 강공 중심의 ‘빅 볼’야구다. 이 감독이 2년 연속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지만 “감독 나가” 시위를 만난 이유는 분명하다. 정체성 논란이다. 여기에 결과까지 안 좋으니 설상가상이다.정체성이 흔들리는 팀은 암흑기에 들어선 게 지금까지의 경험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할까! 2022년 3월 사람들이 왜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는지 알고 있을까! 그는 대한민국 공동체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윤 대통령의 정체성은 ‘상식과 공정’이었지만 지금 대통령의 정체성은 위기의 한복판에 있다.자신의 존재 이유와 역할의 미션을 잃어버린 정체성 혼란의 권력은 모두에게 위험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깡으로 지금의 성취를 이룬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깡으로 벼랑 끝에 선 승부가 가능했고 그는 결국 승리했다. 윤 대통령은 깡을 스스로에게 제대로 써야하는 상황으로 몰린다.예상보다 쎄고 기대보다 높은 강력한 처방이 불가피하다.가족과 부부의 논란은 결국 대통령의 문제로 대통령만 해결할 수 있다. ‘부부의 세계’ 이후 대통령의 승부수는 남은 임기다.지금까지의 실점을 일거에 만회하고 나아가 역전까지 바라볼 수 있는 대통령만의 무기다.대통령의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5개 팀은 내년 시즌 준비에 바로 들어간다.미래는 준비와 반성부터 시작이다.11월 9일 임기 반환점을 앞둔 대통령도 마찬가지다.임기 후반의 국정쇄신을 향한 성찰과 대안모색의 시간이 윤 대통령에게 필요하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학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4.10.10 17:30

추석의 추억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버스터미널, 기차역, 도로 위에는 들뜬 얼굴로 고향을 향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려진다. 필자도 명절이 되면 서울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느라 급하게 이동하는 귀경객 중 하나였다.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고 다섯 식구가 한차를 타고 재미있는 가족여행쯤으로 생각하고 출발했지만 대여섯 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고향에 도착할 때가 되면 모두가 지쳐서 아무말도 못하는 상태가 되곤 했다. 오랜 시간 운전을 하고 부모님 댁에 도착하면 몸은 파김치가 된 듯 피곤하지만, 부모님의 얼굴을 뵈면 다시 기운을 얻었다. 매년 아들 가족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던 부모님, 특히 어머니께서는 항상 ‘바쁘고 힘든데 왜 고생하며 올라왔느냐’고 걱정스러운 말만 반복하셨지만, 마음속으로는 기다리던 아들 내외와 손주를 만나게 되어 기쁜 모습이 역력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피난을 오신 부모님께 명절은 가족 전체가 모이는 특별한 날이였다. 아들 가족이 오기 전 어머니께서 많은 시간을 들여 준비하신 녹두전, 큼지막한 만두 등이 차려진 푸짐한 밥상이 매년 추석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정성스럽게 준비하신 요리를 게눈감추듯 짧은 시간에 먹고 일어설 때면 어린 시절 철없는 아들로 돌아간 듯했다. 고생하는 어머니와 아내를 생각해 설거지라도 도우려고 고무장갑을 끼면 아들을 밀어내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아들 손에 물이 묻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가 엿보였다. 부모님 댁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문을 나서는 우리를 배웅하면서 당신의 시야에서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주 찾아 뵙고 인사드려야겠다.’라고 매번 결심하지만 실천으로 옮겨지진 못했다.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해외 출장을 떠나기 전, 병원에 입원중이시던 어머니의 얼굴을 뵙고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드렸을 때였다. 어머니께서 큰 소리로 ‘거럼, 잘 다녀오게.’라고 황해도 사투리로 대답해 주실 때의 표정에서 명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표정이 느껴졌다. 병원에서의 만남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고,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머니의 소천 소식을 듣고 대전으로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라는 고사성어처럼 시간은 절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매년 명절마다 부모님을 뵈러 올라가고 내려오기를 반복하면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것이 송구하다. 북한에서 피난을 내려오시면서 겪으셨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외울 지경이 되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들어드리지 못한 것,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드리지 못한 것 등 잘해드린 기억보다 못해 드린 기억들만 생각나면서 내 마음에선 ‘어머니 죄송합니다. 감사해요, 어머니’라고 뒤늦게나마 마음속으로 되뇌이곤 한다. 이제는 내가 그 시절의 어머니 나이가 되어서 추석을 맞아 집에 방문하는 자녀와 손주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내가 준비한 추석 밥상을 맞으며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서 떠들며 웃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 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전에 어머니에게 드리지 못했던 감사의 말을 자녀들에게라도 해야겠다. ‘너희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잘 살아주니 고맙구나’ 하는 진심 어린 말을 지금, 바로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시간은 우릴 기다려 주지 않기에 추석 명절이 지난 지금이라도 휴대폰을 꺼내어 전화를 한 번 더 걸어 ‘고맙다’ 또는 ‘사랑한다’라는 표현을 해보자. 지금의 전화 한 통이 먼 훗날 뼈아픈 후회가 되지 않을 테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가족들을 떠올린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09.26 14:53

산전수전(山戰水戰)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장군은 애초부터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륜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 확대 정책으로 촉발된 의료계 파행은 이제 시간이 지날수록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추석 기간에는 ‘중추가절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인사 대신에 아프지 말라는 인사가 유행하였다. 지금 겪고 있는 의료계 파행이 해결된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고통받는 사람은 국민이다. 애초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능숙하고 유능한 장군이 나서서 이 문제를 지휘했어야 했다. ‘산전(山戰)에서는 내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기동하여 상대를 압도해야 한다. 수전(水戰)에서는 상대가 물을 건널 때 기습하여 승기를 잡아야 한다. 택전(澤戰)에서는 내가 가진 무기와 군장을 포기하더라도 늪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육전(陸戰)에서는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후퇴 경로를 확보해야 한다.’ <손자병법> <행군(行軍)> 편에 나오는 ‘산전수전택전육전(山戰水戰澤戰陸戰)’을 모두 겪은 장군의 군대 운영에 관한 내용이다. 산전(山戰)의 핵심은 나의 의도와 생각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높은 산악지역을 이동할 때는 적에게 노출되기가 쉽다. 나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서 능선을 피하고 계곡(谷)으로 이동로를 선택해야 한다. 의사 정원을 늘려 국민 의료 복지 수준을 높인다는 목표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정부의 의도를 모두 드러내고 노출한 데 있다.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나의 명분만 강조한 것은 결코 현명한 정책이 아니다. 2000명이란 선언적 숫자까지 정해 놓고 전투에 임한 관계기관은 산전을 겪어보지 못한 리더라고 할 수밖에 없다. 수전(水戰)의 핵심은 상대의 빈틈을 찾아 공격하라는 것이다. 상대가 강물을 건너는 데 집중하고 있을 때를 놓치지 않고 기습하여 승기를 잡아야 한다. 강물을 반쯤 건넜을 때 기습하면(半濟而擊之, 반제이격지) 쉽게 이길 수 있다. 상대가 전열을 정비하여 정식으로 싸우기 전에 이미 싸움은 끝났어야 한다. 전쟁은 싸워서 이기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승리의 조건을 만들어 놓고 확인하러 들어가는 것이다. 수전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상대와 정면 승부에 집착한다. 택전(澤戰)의 핵심은 전투에서 곤경에 빠졌을 때 명분을 버리고 빨리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늪에 빠지는데도 불구하고 명분 찾고 자존심을 찾는다면 생존은 점점 더 멀어진다. 줄 것은 주고 버릴 것은 버려야 늪에서 나올 수 있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이지 자존심이 아니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응급실 기능이 마비되고 의료가 파행되었다면 늪에 빠진 것이다. 늪에 빠진 상황에서 내가 포기할 것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 충분한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의료 개혁 정책에 대해 의사들에게 사과하고 처음부터 다시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며 자존심과 명분만 세우다가 결국 환자들의 고통은 배가되고 의료체계는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육전(陸戰)의 핵심은 출구전략이다. 평지에서 싸울 때는 불리할 때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탈출 경로가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들어가는 일보다 빠지는 일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주식과 부동산을 투자할 때 과감하게 손절하고 빠지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전쟁에서 승패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패배를 인정하는 일도 전략이다, 훗날을 도모하는 권토중래의 용기가 필요하다. 지도자는 외골수나 한 분야에만 정통한 전문가가 아니다. 산전수전택전육전 모두 겪어보고, 공중전까지 겪어본 사람이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 명분, 자존심, 뚝심, 고집이란 덫에서 벗어나야 국민이 행복하다. 진격과 후퇴의 결정은 오로지 국민의 안정(保民, 보민)과 국가의 안위(保國, 보국)가 우선이다. 그래야 국민이 믿고 지지할 것이다.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09.19 15:53

가을의 숲길에서

달궈진 오븐 속 같던 여름의 열기가 사라지니, 입맛을 찾고 숙면을 취한다. 아침마다 한결 쾌적한 공기 속에서 기지개를 켜면 가슴에 밝은 기분과 낙관적인 희망이 깃든다. 교하의 가로수인 벚나무 잎은 벌써 반쯤 단풍이 들었다. 요즘 교하도서관 뒤편에서 중앙공원을 잇는 숲길을 걷다가 빽빽한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들 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만날 때 홀로 큰 감동을 받는다. 숲길 바닥에는 도토리가 뒹굴고, 내 부주의한 발밑에서 밟힌 도토리는 여지없이 으깨진다. 여름이 끝나자 빛과 그림자의 존재감은 옅어진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의 발 아래 그림자가 지고, 땅에 단단한 몸통으로 서 있는 나무 아래에도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들이 암시하고 일러주는 철학적 진실은 무엇인가? 낙엽이 활엽수의 그림자라면 재는 장작불의 그림자가 아닐까? 그림자란 음의 세계가 빚은 빛의 주검이고 잔류물! 그림자와 실체의 운명은 늘 하나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죽음은 생명이 제 안에 드리운 그림자일 것이다. 나무들은 빛으로 광합성을 하며 성장한다. 빛이 없다면 나무는 자랄 수 없다. 나무들이 태양의 열기를 차단하는 까닭에 숲속 공기는 바깥보다 시원하다. 숲속에서 공생하는 나무들은 사회화된 존재다. 나무는 수직으로 서고 땅속 뿌리는 복잡하게 엉켜 있다. 나무들은 뿌리는 뿌리대로, 줄기와 가지는 그것대로 엮이고 얽힌 채로 공생한다. 숨 쉬고 바스락거리며 수런거리는 나무들. 우리는 나무들이 잎맥과 미립자를 가진, 호흡하고 제 나름의 신경계를 가진 생명 개체라는 엄연한 사실을 자주 잊는다. 따져보면 인류는 숲의 자식들이다. 우리 선조는 숲의 열매와 씨앗, 뿌리를 채취해 식량으로 삼고, 숲에서 안전한 잠자리를 마련했다. 숲은 우리 삶의 터전이고, 의문의 여지없이 우리 운명의 강략한 원소 중 하나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류는 숲의 부양을 통해 제 생명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하며 공생하는 지혜를 발휘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숲의 피부양 가족의 일원이란 점에서 우리는 한 형제인 것이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조응’이란 책에서 ‘인간 몸의 상당 부분은 나무 형상의 공기다. 따라서 이 나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보여준다. 뻗어나간 나뭇가지의 구조는 폐, 둥글게 얽힌 뿌리는 입, 우거진 숲 지붕의 형태는 숨이다’라고 쓴다. 나무들은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고 말을 건넨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듣지 못한다. 나무는 인간을 속속들이 알지만 우리는 나무를 알지 못한다. 인간의 무지몽매함 탓에 제 형제를 베고 제재소에서 몸통을 자르며 쓸모가 덜한 뿌리와 잔가지를 불태운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인간은 숲을 토벌하고 빈 땅을 공동 거주지나 경작지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제 양육자인 어머니 숲을 살해한 사태는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과 무지로 빚어진 잔혹한 일이다. 인간은 한 점의 죄의식도 없이 지구 자원을 마구 퍼 쓰고, 다른 동물의 피해를 끼치며 지구 생태계를 망가뜨렸다. 펜데믹 초기 엄격한 봉쇄 조치와 이동을 제한하자 자연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였다. 대기와 물이 깨끗해지고, 야생동물이 자주 도심에 출몰했다. 인간이 활동을 멈추자 자연 생태계와 동물 서식지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이 지구 생태계의 유해종이라는 낙인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이 오명을 벗으려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동료 인간에게 더 두터운 이타적 우정을 쌓고, 숲과 우리가 생명 공동체 안에서 공존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오늘도 고즈넉하고 조용한 숲속 오솔길을 걸으며 디지털 기기의 소음과 번잡함에서 풀려나며 홀가분한 자유를 만끽하며 사색에 몰입한다. 산책하는 내내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은 잦아들고 대신 고요와 기쁨이 찾아든다. 고요가 빚은 사색 속에서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된 정체성이 수목 인간이라는 걸 말하는 게 아닐까 라고, 나는 혼자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

  • 오피니언
  • 기고
  • 2024.09.12 14:48

대통령이 위험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세다. 8월 초부터 30% 전후에서 내림세를 보이며 ‘주별 평균 33% 31% 30% 29%’로 이어진다. 4월 총선 직후의 주별 평균 28%에 접근한다. 윤 대통령 취임부터 8월 하순까지 총 1,076개의 여론조사 결과를 주별로 보면 일정한 흐름이 보인다. 1,076개 중 면접조사가 356개 ARS가 720개로 120주 동안 주별로 평균 9개의 여론 조사가 있었다. ‘대통령 국정운영의 긍정(부정)평가’로 측정되는 지지율은 윤 대통령 취임 직후에서 지방선거까지 주별 평균 50%를 넘었다가 바로 30%대로 추락 한다. 대통령 지지율은 최근까지 2022년 말과 2023년 초 그리고 작년 6월 잠시 주별 평균 40% 언저리까지 올랐던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30% 초반에 머문다. 최근 대통령 지지율의 하락세는 주요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조사 기관마다 최저치 기록에 육박하는 모양새다.갤럽 기준으로 보면 지난주 대통령 지지율은 5월 마지막 주 21%이어 두 번째로 낮은 지지율 23%를 기록한다.3월 마지막 주 30% 중반까지 올랐던 지지율은 이후 20% 중반에서 횡보한다. 갤럽 조사도 1076개 조사의 주별 평균흐름과 유사하다.대통령 지지율은 2022년 6월 평균 49% 7월 평균 32%였지만 8월 이후 20%대로 하락한다.2023년 대통령 지지율은 30% 초중반까지 오르지만 2024년 4월 총선 후 계속 20%대다. 갤럽조사는 대통령의 국정브리핑의 여론을 반영하지 않았다.조사는 국정브리핑 있었던 날까지 이뤄졌는데 여론에 영향을 일부 미쳤다 하더라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리얼미터 조사결과를 보면 대통령의 국정브리핑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 조사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은 8월 중순 이후 계속 하락하다 이번에 반올림으로 간신히 30%를 기록한다. 같은 조사의 2년 만의 최저치로 30%가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 전국지표조사(NBS)가 주목된다.여기에서도 대통령 지지율은 하락세로 ‘30% 29% 27% 흐름’이다.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성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응답이 줄어드는 양상도 같은 맥락이다. 주별 평균이든 최근 조사든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윤석열 지지층의 붕괴’다.보수층과 영남 그리고 70대 이상의 일부가 지지를 철회하면서 대통령의 핵심 지지그룹이 해체되는 양상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지지자의 57%,70대 이상에서 50%의 지지”를 받는다.특히 충청 지지세의 약화가 주목되는데 ‘대통령 지지율 20% 하향 돌파의 관건’이다. 최근 윤 대통령 지지율의 하락세는 ‘구조적 요인과 상황변수의 복합적 결과’다. 민생과 체감 경기의 어려움이 더 악화되는 양상이다.특히 자영업자의 고통이 심각하다. “응급실 뺑뺑이”로 상징되는 의료대란은 돌발 변수다.지금 ‘응급실 위기’를 진화할 수 있느냐가 의료개혁의 아킬레스건이 된 상황이다. 의료계 곳곳에서 “정부 발표와 다르다.”는 아우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정부는 “응급실 붕괴 상황 아니다.”라며 맞섰다가 결국 “현장의 어려움을 인정한다.” 대통령실의 입장은 확고하다.“지지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나가겠다.”고 말한다.“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국민의 생명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다.”면서 “문제는 대국민 홍보”라고 믿는다. 핵심은 대통령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비정상적인 국회”고 “소설 같지도 않은 계엄령설”을 퍼트리는 야당이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개혁은 험난한 과정으로 쉬운 길을 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정치적으로 실천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은 “감정적 거부감”이다.대부분의 신문으로부터 “도를 넘었다,”“납득하기 어렵다,”“이해하기 어렵다,”“협량하다”는 비판을 받는다.대통령이 과연 정치와 대한민국 공동체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의심이다. ‘마이웨이의 독선 리더십’은 지지했던 사람들을 하나 둘 떠나가게 하고 지금 지지하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샐러리맨이 되어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는 여당의원들의 비겁함도 사람들을 화나게 한다. “여의도 장총찬”은 “국민감정 못 따라가는 정치인은 역사의 간신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대통령과 여당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4.09.05 15:59

내 얼굴 표정

앞산에서 꾀꼬리 한 마리가 울고 있다. 저 울음소리는 무엇인가 정겨운 갈망이 느껴진다. 마을 뒷산에서도 꾀꼬리 한 마리가 앞산 꾀꼬리와 같은 소리로 운다. 울음을 주고받다가, 앞산 꾀꼬리가 내 머리 위를 지나 뒷산으로 노랗게 날아간다. 그때다. 뒷산에서 울던 꾀꼬리가 밤나무 숲에서 나오더니, 둘이 만나 이장네 집 지붕을 넘어 남산으로 날아간다. 새들은 표정이 없다. 몸짓이나 소리로 뜻을 전한다. 강 건너 밭으로 갔다. 고추밭 사이로 걸어갔다. 밭 끝에는 아내가 재작년에 심어놓은 어린 단감나무가 있다. 아내가 감나무가 죽었는지 잘 사는지 궁금해할 때마다, 가보겠다, 가보겠다, 해놓고 또 잊어버리며 한 봄 한여름이 다 갔다. 어린 감나무 두 그루 제법 의젓하다. 길어 나간 새 가지에 감을 몇 개씩 달고 있다. 잎이 두껍고 윤기가 난다. 작년 겨울의 추위로 감나무들이 많이 죽었는데, 어린 감나무 감 얼굴이 볼수록 야무지다. 곧 붉어질 것이다. 자연의 얼굴은 무궁하다. 마루에 앉아 있는데, 뒷산 당산나무에서 꾀꼬리가 운다. 두 마리가 같은 나뭇가지에서 운다. 명랑하다. 아까 그 꾀꼬린가? 꾀꼬리 두 마리는 우리집 가까이 있는 오래된 감나무로 날아와 앉아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다가 밤나무 가지로 날아가 앉고, 앉았는가 싶으면 또 다른 나무로 날아가 앉기를 반복한다. 즐거운 놀이다. 밤송이가 주먹처럼 굵어지고 있는 밤나무 숲에서 우는 꾀꼬리의 일은 ‘자연 선택’이다. 자연 선택은 복잡할수록 아름답다고, 그 한계는 없다고 찰스 다윈은 말한다.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켜고 신문을 9개 정도를 클릭해서 본다. 사설, 칼럼, 기획 기사, 건축, 그림 전시 기사, AI 기사, 연예, 영화, 축구 명장면, 인구문제, 지역소식, 정치평론가들의 글이나, 정치인들의 인터뷰 기사들을 챙겨 읽는다. 좋은 글은 복사해 따로 저장해둔다. (이건 내 하루 시작 루틴이다.) 내가 제일 관심이 있게 보는 것은 정치인의 말이다. 정치인의 언어 동원능력과 선택한 그 언어 개념의 범위, 어휘 사용 기술은 그 사람의 정치적인 역량과 능력, 인간성을 가늠하는 잣대다. 그 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과 신념이, 어디까지인지 짐작하게 한다. 정치인들이 입고 있는 옷, 머리 모양, 안경, 얼굴 표정, 걷고 서 있는 자세, 눈빛, 손짓은 그 사람의 정치력 확장 가능성을 믿게 해준다. 이제 일기를 쓰고 내가 써놓은 시를 검토할 차례다. 일기를 쓰려고 화면을 펼치다가 우연히 이런 밑도 끝도 없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페리클레스(BC 495(?)~BC 429)라는 그리스 정치가가 기원전 413년에 전몰자들을 추도하는 장례식 연설문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의 정치체제는 이웃나라의 관행과 전혀 다릅니다. 남의 것을 본뜬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들이 우리의 체제를 본뜹니다. 몇몇 사람이 통치의 책임을 맡는 게 아니라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으므로, 이를 데모크라티아(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개인끼리 다툼이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하게 법으로 해결하며,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이 나라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서 인생을 헛되이 살고 끝나는 일이 없습니다. (⋯⋯) 우리는 전 헬라스(그리스)의 모범입니다.” 출처_ 네이버에서 함규진의 –세계 인물사- 마치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님이 우리 소원’을 말하는 것처럼 온화한 표정과 말투가 느껴진다. 자기 진영에 갇힌 철 지난 낡은 말이나, 아는 것 없어 보이는 거친 언사로 남의 흠이나 헐뜯는 거친 말이 아닌, 시대를 ‘정리’한 ‘시대의 말’, 품격 있는 ‘정치적’인 정치인의 말을 우린 기다린다. 우리 인류가 가장 잘 선택한 말 중에 ‘민주주의’라는 말과 ‘정치’라는 말을 대체할 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 선택이 아닌 인간의 선택인 ‘정치인들의 정치적인 표정’은 그 시대를 사는 공동체의 ‘표정’을 결정짓는다. /김용택 시인

  • 오피니언
  • 기고
  • 2024.08.29 16:41

먼저 내민 손, 따뜻한 공동체 만들기의 마중물

더위를 피하려고 아내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고 휴가를 떠나지 않아도 가족들과 함께 식사할 때면 새삼 행복한 기분이 들곤 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즐거움을 느낄 거라는 필자의 생각과는 달리 주위에는 조금은 이상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마주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핸드폰만 보고 있는 커플, 식사하는 부모와 대화는커녕 SNS에만 몰두하고 있는 자녀들의 모습 등이다. 디지털 사회로 접어들면서 스마트폰과 SNS의 과도한 사용이 개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48억 명이 하루에 2시간 이상 SNS를 사용하고 있으며, ‘세대별 SNS 이용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이용률이 1~2%씩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부작용이 생겨나고 있다. 대화가 단절된 커플과 가족처럼 개인주의 성향이 만연하면서 타인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는 무미건조한 사회로 변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소외로 인한 두려움,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가족, 이웃, 동료들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며 격려해주는 '따뜻한 공동체 회복'이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공동체 형성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누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답은 간단하다. 나부터 열린 마음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는 '먼저 손을 내밀어 따뜻한 관계를 회복하는 공동체 형성'이 중요하다. 오래전의 일이다. 필자가 휴직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는 정신없이 바쁜 시기였다. 어느 교포 부부가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아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자녀에 관한 문제였다. 얼굴은 한국인이지만 독일에서 나고 자랐기에 한국어보다 독일어가 익숙해 자연스레 부모와 대화가 단절됨은 물론, 학교에서는 외국인이라는 차별을 겪고 있는데 그 원인을 모두 부모에게 돌리며 불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부부의 부탁으로 필자는 프로그램을 짜서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을 만나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퍼부었던 불평의 방향을 나에게 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독일에 있는 동안 매주 만나면서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논문을 제출하고 귀국하여, 한 학기 강의를 마친 후 그해 겨울방학에 논문심사를 받기 위해 다시 독일로 향하였다. 그런데 도착해서 만난 아이들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밝게 웃는 모습, 어색하지만 부모와 한국어로 대화하는 모습,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을 반기는 표정이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나의 작은 노력이 아이들이 이렇게 변하게 했구나’하는 생각에 매우 기뻤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시기에 필자도 타인에게 큰 도움을 받았었다. 같은 연구실의 독일인 동료가 논문 마무리로 쩔쩔매는 필자를 보고 안타까워하며 함께 내용을 상의하고 독일어를 교정해주는 등 먼저 손을 내밀어 필자를 도와주었던 것이었다. 그 결과 박사 논문은 심사위원 전체 동의를 받아 외국 유학생에게는 매우 어려운 등급인 ‘최우수’ 논문으로 평정되었다. 필자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겪었던 이 경험은 먼저 마음을 열고 타인을 위해 노력하면 그들에게 변화가 생길 뿐만 아니라 다른 이웃을 통해 도움을 받는 「따뜻한 관계의 선순환」을 불러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SNS의 사용빈도가 높아짐에 따라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친구, 이웃들과의 소통은 점점 어려워지며 ‘나는 남에게 도움을 받지도 주지도 않으며 혼자 살아가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살아가다 보면 ‘그때 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었나?’하고 후회는 적이 생각보다 많다. 여러분도 지금부터 고개를 들고 주변을 바라보며 먼저 손을 내밀어 보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 손길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고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08.22 16:06

이단(異端)

정통과 이단이 만나는 곳에 갈등과 폭력이 일어난다. 정통의 입장에서 이단(異端)은 정통과 다른(異, 이) 끝(端, 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고, 이단의 입장에서 정통은 바르고(正) 전통(統, 통)이라는 착각에 빠져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 사우스포트에서 시작되어 영국 전역으로 확산한 백인 극우주의자들의 이슬람 난민 추방 시위도 정통과 이단이라는 충돌이다. 르완다 기독교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17살 영국 청년이 어린이 댄스 교실에 흉기를 들고 난입하여 어린아이 3명을 숨지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그 청년이 이슬람 난민이라는 가짜뉴스였다. 가짜뉴스는 순식간에 소셜미디어 엑스를 통해 펴졌고, 영국 전역에서 백인 극우주의자들의 난민 추방 폭력으로 이어졌다. 경찰차가 불타고, 유색인종의 차를 부수는 장면이 TV에서 연일 방송되었다. 마침 영국에 머물던 필자에게도 시위가 벌어지는 지역은 가지 말라는 메시지가 왔고 집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시위대가 목표로 삼은 런던 월섬스토(Walthamstow) 지역이나 시내 중심의 시위 예상 지역에 수만 명의 폭력 반대 시민들이 운집하여 더 큰 사건으로 번지지 않았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정통과 이단 논쟁이 있다, 기독교는 정통이고 이슬람은 이단, 백인은 정통이고 유색인종은 이단, 영국인은 정통이고 난민들은 이단이라는 이분법적 생각이다. 파키스탄이나 인도 등지에서 영국으로 들어온 무슬림 난민, 이민자들은 이번 폭동을 주도한 영국 백인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이단이다. 자기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고, 기독교 윤리에 대항하는 이단 집단이다. 여자들은 모두 히잡을 쓰고 다니고, 자기들만의 상권을 형성하여 거래하고, 아이를 많이 낳아 영국의 복지를 독식하는 용서할 수 없는 이단이라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자리와 주택은 부족하고, 주택가격과 물가는 치솟고, 도둑과 폭력으로 안전이 위협당하고 있는 영국에서, 그 원인은 모두 이민자, 난민, 이슬람, 무슬림에 있다는 생각이 보수 백인들의 감정을 폭발시킨 것이다. 지금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처벌과 시민들의 반대 시위로 잠잠해졌지만, 이 소강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 필자가 영국에서 직접 목격한 정통과 이단의 갈등이 한국에서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25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인들이 꺼리는 일을 하고 있다. 농어촌에서 부족한 노동 인력이나 건설, 식당, 요양원에 이르기까지 외국인이 없으면 도저히 유지하지 못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최근에는 필리핀에서 가사 관리 돌봄 인력이 들어와 어린아이와 노인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시각 역시 정통과 이단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단에 대한 한국인의 차별과 멸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경제가 침체하고 실업률이 높아지면 한국인이라는 정통의 갑옷을 입고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단을 향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잠재된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도 이단에 대한 문제가 심각했다. 외부에서 들어 온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경계와 멸시가 존재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이단이라고 공격한다면(攻乎異端, 공호이단), 그 피해는 고스란히 공격한 사람에게 돌아올 것이다(斯害也已, 사해야이).” 이단에 대한 공격은 그 피해가 고스란히 공격한 자에게 돌아올 것이란 공자의 경고다. 정통과 이단은 영원하지 않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이단과 정통은 자리를 바꾼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단을 공격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돌아올 것이라는 공자의 경고를 귀 기울여 들을 때이다. /박재희(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08.15 15:33

인간은 음악과 함께 성장한다

생각해보면, 나란 사람은 음악과 함께 성장했다. 음악을 벗 삼은 덕분에 모난 인격도 조금은 둥글어 졌을 테다. 내 젊은 시절, 서울엔 ‘르네쌍스’, ‘필하모니’, ‘크로이체’ 같은 음악감상실이 버티고 있었다. 나는 자주 그 음악강상실을 찾아가 고전음악을 들었다. 다들 팝이나 포크송, 혹은 유행가에 휩쓸릴 때 꼿꼿이 고전음악에 심취했다. 처음엔 쥬페의 ‘경기병 서곡’이나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같은 표제 음악을 듣다가 바흐나 파가니니 등의 기악곡에 빠졌다. 그러다가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말러 등이 창조한 교향곡의 세계에 입성하면서 음악이 무지를 깨부수는 절대의 미와 순수한 기쁨, 숭고함을 품었다는 걸 확신했다. 며칠 전 한 라디오 방송에 초대 손님으로 나갔다. 구성작가와 통화를 하던 중 방송 중 듣고 싶은 세 곡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사라 본(Sarah Vaughan)의 ‘썸머타임’, 리 오스카(Lee Oskar)의 ‘샌프란시스코 베이(San Francisco Bay)’,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여름에 들으면 좋은 곡으로 골랐다. 세 곡 다 내가 아끼고 즐겨 들으며 남에게도 추천하는 곡이다. ‘썸머타임’은 누구나 다 알만큼 유명한 재즈 보컬 명곡이다. 본디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쉰의 가극 ‘포기와 베스(Porgy ane Bess)’ 중 1막에서 자장가로 소개되었다. ‘썸머타임’을 들을 때 나는 행복한 슬픔을 맛본다. 여름밤에 보채는 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는 혼자 흥얼거린다. 강에서는 물고기가 뛰고 목화는 잘 자랐단다. 네 아빠는 부자이고, 네 엄마는 멋지지. 우리가 너를 지켜줄 테니, 아가야 울지 말거라. 시골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탓에 엄마의 감미로운 자장가를 듣지 못한 채 자란 나는 이 곡을 들으면 숨이 막히도록 슬퍼진다. 이 결핍은 채워지지 않은 채 나란 존재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 30대의 어느 날, 한 카페에서 리 오스카의 연주곡을 들었다. 뱃고동 소리, 갈매기의 끼룩거림, 자동차의 경적이 어우러진 화사한 여름 항구 풍경이 떠오르는 전주만 듣고 단박에 반했다. 음반 매장에서 CD인지 음반인지를 구해서 헤아릴 수도 없이 들었다. 여름 저녁 햇볕 냄새가 밴 면 셔츠를 입고 여름의 정취가 물씬 나는 이 곡을 들으며 나는 덧없는 행복에 빠진다. 나중에 이 연주곡이 한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이 곡이 쓰이면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음악이 주는 기쁨은 무엇인가? 몇 달 전 내가 겪은 일이다. 2022년 6월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를 극장에서 관람했다. 18세 청년 임윤찬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는데, 그걸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연주는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것이었는데, 기절할 만큼 아름다워 놀랐던 것이다. 그는 피아노 건반을 누른 게 아니라 내 영혼을 눌러 깊은 무의식이 솟아오르게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주책없이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건 벅찬 환희와 함께 나란 존재가 순정해지는 드문 경험 탓이다. 내 음악 취향이 넓어진 건 30대를 지나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같이 고전음악만을 고수하던 나는 재즈나 비틀즈, 스모키, 딥퍼플, 사이먼 앤 가펑클, 빌리 조엘 같은 이들의 노래에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조용필이나 최백호, 배호 같은 이들이 부른 가요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게 되었는데, 이런 취향의 변화는 세상을 알 만큼 나이를 먹으면서 얻은 범속한 트임 결과일 테다. 늦게나마 다른 장르의 음악에도 또 다른 기쁨과 아름다움이 오롯했다는 걸 깨치고, 취향의 협량함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퍽 다행이다. 음악은 무릎이 꺾인 나를 일으켜 세운 참다운 벗이다. 음악의 위로가 없었다면 인생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그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재앙이다. 음악은 내 평생 감미로운 피난처였으니 세상이 어둡고 삭막할지라도 나는 그걸 능히 이겨낼 수 있었을 테다. /장석주 시인

  • 오피니언
  • 기고
  • 2024.08.08 18:38

홍명보와 한동훈

좋은 성적을 내면 ‘홍명보 논란’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그는 “용서를 받는 방법은 대표팀의 성장과 발전을 이루는 것뿐”이라고 말한다.홍 감독은 “내 인생의 마지막 도전”으로 자신에겐 “대한민국 축구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본 감독 중 최악”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피노키홍”으로 전락했다.“홍명보의 부정출발”이라고 한다.면접 없는 ‘부탁’으로 선임되었다고도 한다.“미리 써놓은 각본”에 따른 “동문 짬짜미”의혹으로까지 이어진다. 감독선임을 주관하는 전력강화위원 중 한 사람은 “홍 감독 선임은 절차 안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몰랐다.”고 한다.박지성은 “진실은 내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 하고 이영표는 “축구인은 행정에서 사라져야한다.”며 “실수가 반복되면 그게 실력”이라고 꼬집는다. 홍명보 기자회견 이후에도 “감독사퇴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팀 리더십의 신뢰와 권위를 이미 상실했다는 게 근거다. “오해일 뿐 특혜는 없다.”는 게 축구협회의 입장이지만 ‘홍명보 논란’은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지난 5개월 동안 그들은 “외국인 감독을 후보에 두고 협상 중이다.”나아가 “외국인 감독을 중심으로 후보군을 한 자릿수로 압축했다.”고 말해왔다. 논란의 핵심은 감독선임 원칙과 절차제로 시스템과 프로세스의 붕괴다.리더십 선임과정의 정당성 투명성 공정성 모두 문제가 되었다.과정과 결 과 모두의 실패는 결국 한국축구의 퇴보로 나타난다. “양궁협회를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1988년부터 올림픽 10연패의 여자양궁이다.“올림픽보다 국내 선발전이 더 어렵다.”는 경쟁력 중심의 선수선발이 세계정상의 출발점이다.선수 선발은 물론 운영과 관련하여 뒷말이 없는 이유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은 “협회가 선수명단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히딩크 감독이 “인맥축구”와 “위계축구”를 몰아낸 성과가 월드컵 4강이다.“의리축구”논란의 2014년 월드컵 때의 당사자가 바로 홍 감독이었다. 양궁협회는 국내 단일종목 스포츠 단체 중 가장 오랜 기간 후원을 받는다.그들은 ‘지원하되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고 한다.‘공정성과 투명성만 볼 뿐 운영에 간여하지 않는다.’나아가 그들은 ‘양궁이 우리사회에 무엇을 어떻게 기여할지 고민’한다고 한다.존재 의의를 넘어선 공동체 기여의 수준이 다르다는 평가다. 축구와 양궁의 대비는 뚜렷하다.사람에 의존하는 개인화된 리더십과 절차와 과정의 시스템과 제도화의 다른 결과로 보인다.SNS 언급에서도 ‘긍정의 정의선과 부정의 정몽규’라고한다. ‘홍명보 논란’은 피할 수 있었다.축구협회가 ‘현재 대표팀에 필요한 감독 리더십의 조건을 제시하고 이에 가장 부합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으면 되는 일이었다. 한국축구는 올 1월 아시안컵 4강에서 탈락했다.손흥민을 중심으로 한 역대급 선수구성으로 64년만의 우승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한 수 아래로 여겨지던 요르단과의 4강전에서는 유효슈팅을 하나도 기록하지 못한 졸전이었다.당시 대표팀은 “오합지졸 사분오열 콩가루 집안”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슈퍼스타 출신의 관리형 감독이 필요하다.’고 하면 된다.‘전술가보다 보스형 리더가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스타 플레이어의 대표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 개인 역량을 극대화시킬 적임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홍명보 감독은 ‘원팀 원스피릿 원골’을 강조한다.“대표팀에서는 축구지식보다 통솔력이 더 중요하다.”면 “초반부터 국내 감독 중에 홍명보였다.”는 주장이 가능하고 사람들의 공감도 얻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홍명보 논란’은 축구협회 리더십의 실패다.‘현재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며 이에 가장 적합한 리더십의 조건이 무엇’인지는 100% 그들의 몫이다. 그들은 자신도 없었고 당당하지도 못했다.변명과 회피로 일관했다.한국 축구가 계속해서 나아지고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한 리더십의 고민은 없어 보였던 것이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메시지는 분명하다.‘미래 변화와 혁신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는 상황 인식과 한동훈 리더십의 선택이다.출발은 신뢰와 능력의 위기에 빠진 윤석열 정권에 대한 평가와 ‘극복의 차별화’ 요구다 “국민께 제일 걱정 끼치는 게 축구협회와 국민의힘 전당대회”라는데 한동훈 대표는 자신의 미션을 이해할까! 그의 “국민 눈높이,미래의 유능 그리고 외연확장”을 통한 공공선은 무엇일까? /박명호(동국대 교수∙정치학)

  • 오피니언
  • 기고
  • 2024.08.01 15:50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현관문을 나섰다. 마을은 아직 조용하다. 비가 왔다. 우산을 폈다. 비가 잘 온다. 착실하게 온다. 마음이 착해진다. 우산 위에 빗소리와 오동나무, 가죽죽나무, 고욤나무, 오갈피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각각 다르게 일정하다. 바람이 없다. 빗소리가 마을을 불안하게 하거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꾀꼬리가 아무 일 없는 소리로 노래한다. 참새들이 마당 잔디에서 무엇인가를 물어간다. 할미새가 지붕 끝으로 날아와 앉았다. 자태가 곱다. 파랑새 새끼들 다 길렀는지 나는 연습시킨다. 집 앞에서 종길이 아재를 만났다. 이른 아침인데 벌써 논에 갔다 오신다. 고라니와 멧돼지 방지를 위해 논 가에 둘러놓은 전선 줄 전기를 차단하고 오신다. “생각보다 비가 적게 왔네요.” 그랬더니, “말보다 적게 왔고 만.” 하신다. 종길이 아재가 집 앞 콩밭에 들어서며, “어젯밤에 또 고라니란 놈들이 왔다 갔고 만, 이놈들은 꼭 콩 새순을 똑똑 따먹는 당게” 하신다. 강가로 나갔다. 돌아가신 당숙모네 밭에 이장이 콩을 심어놓았다. 이장 부인이 콩밭 풀을 매다 말았다. 다른 급한 일이 생겼었나 보다. 뽑아 모아둔 풀과 호미가 비 맞는다. 이장이 우리동네 농사를 다 짓다시피 한다. 옥수수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토닥토닥 차분하다. 강가에 섰다. 물이 조금 불었다. 물이 다리를 넘어간다. 어제 온 비와 보태졌다. 붉덩물이다. 어디서 갑자기 소낙비가 왔나 보다. 강 건너를 보았다. 칡넝쿨들이 묵은 밭 감나무를 타고 올라가 감싸버렸다. 감나무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 큰 돌들이 물에 잠겨 물살을 일으킨다. 오늘도 마을을 한 바퀴 돌기로 한다. 마을 제일 끝집인 양식이네 집을 지났다. 양식이는 아직 출근 전이다. 전주 누나네 집 식당 일을 돕는다. 현수네 집에는 불이 켜져 있다.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나온다. 현수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거동이 불편했는데, 어제는 회관까지 걸어오셨다. 집 안에서 새어나온 목소리가 정상이 되셨다. 현수네 집 위 이장네 집도 불이 켜져 있다. 이장 말소리가 들린다. 일 나갈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재호네 집 앞을 지났다. 찬수네 빈집터에 풀이 우북하다. 찬수네 집 앞 논을 메꾸어 찬수 여동생이 새로 집을 짓고 있다. 집이 다 되어간다. 오래 묵은 태환이 형 빈 집터를 지났다. 태주네 어머니는 딸네 집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빈집으로 오래 있어서 마당에 풀이 많이 자랐다. 마당 가 죽은 대추나무에 참새들이 앉아 있다. 태금이네 빈 집 마당 풀이 자라고 했다. 주성이 네 집도 고요하고, 점순네 집도 고요하다. 마당에서 흰 개가 자기 집에서 나를 내다보고 있다. 마을회관도 정자도 아직 조용하다. 정자 마루에 부채와 파리채와 물병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사람들이 페트병에 물을 넣어 목침처럼 베고 낮잠을 잔다. 리모델링 하는 만조 형님네 집을 지나 우리 집 앞을 지났다. 우리 집 담에 능소화꽃이 땅에 떨어져 비를 맞는다. 집 앞 텃밭에 참깨꽃이 희게 피었다. 밭 가에 옥수수가 내 키를 넘게 자랐다. 곧 옥수수를 따겠다. 판조 형님에 집 부엌 쪽문에 불이 환하다. 창문 너머로 텔레비전 사극 속 격노하는 왕 앞에 도열한 장수들 얼굴이 심각하다. 종현이네 집 마당에 웬 승용차가 있다. 누가 왔을까? 못 보던 차다. 당숙모가 안 계신 당숙모네 집은 적막하다. 오래 묵은 세곤이네 빈집 담에 담쟁이넝쿨이 무성하다. 마당에는 개망초꽃이 빗속에 모여 희디희다. 현미네 집 앞에 차가 있다. 출근 전이다. 한수 형님네 집, 종길이 아재네 집을 바라보고, 다시 마을 큰길로 나왔다. 바람이 일었다. 마을 앞 커다란 느티나무 밑을 지날 때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크다. 강물이 출렁인다. 옥수수잎과 참깨꽃이 심하게 흔들린다.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고 새들이 조용하다. 그때다. 후두두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집으로 뛰었다. 먼 곳에서 천둥이 으르렁거린다. 나라에 큰비가 온다고 한다. /김용택 시인

  • 오피니언
  • 기고
  • 2024.07.25 17:00

‘피니싱웰(Finishing-well)’, 멋진 마무리란

지난주, 필자가 존경하던 선배 두 분이 돌아가셨다. 그분들과 웃고,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다시는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수년 전만 해도 친구 부모님들의 장례식 조문이 더 많았지만 이제는 주변 선배들의 부고 소식이 더 많으니 새삼 ‘피니싱웰(Finishing-well)’에 대해 생각해 본다. 90년 가까운 생애 동안 세계환경의 격변, 삶의 변화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다가 돌아가신 한 선배의 모습을 거듭 떠올려보는 요즘이다. 필자가 있는 대학의 전임 총장이었던 고(故) 존 엔디컷(John E. Endicott)박사의 삶은 수많은 도전과 변화가 담긴 한 편의 영화 같다. 군인에서 대학교수, 낯선 타국의 대학 총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 변화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도전과 용기로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ROTC생활과 학업을 병행하였고 졸업 후 공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 복무를 시작하였다. 일본, 하와이, 베트남 등 전쟁터에 투입되는 등 군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방 최고공로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 1986년 국방부 산하 국가전략 연구소장 등을 역임한 후, 조지아 공과대학교(Georgia Tech.)에서 교수로서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 국제전략기술정책센터 소장 겸 샘넌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며 군에서 경험한 이론과 실무를 토대로 국가 방위전략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였고, ‘동북아시아 비핵화구역(LNWFZ-NEA)’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런 공로로 두 번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70을 넘긴 나이에는 낯설고 물선 한국 땅에서 대학 총장(2009년 취임)으로 세 번째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고 당시로는 참신한 글로벌 대학의 모델을 실현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100%로 진행되는 영어수업과 다양한 국가의 학생, 교수 선발 등 다문화 환경을 경험할 수 있는 국제경영대학 모델을 구축하여 AACSB(국제경영대학발전협의회) 인증을 받는 등 안정적으로 대학을 운영하였다. 국제대학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과학기술을 융합한 새로운 단과대학을 설립하였는데 그동안의 공로에 대한 업적으로 본인의 이름으로 명명된 ‘엔디컷국제대학’을 생애 가장 큰 명예로 여기고 2021년 퇴직하여 고향인 조지아주로 돌아갔다. 평생동안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고(故) 엔디컷 총장의 삶에서 나는 많은 배울 점을 보았다. 첫 번째는 도전정신이다. 30년 가까운 군 생활 이후에도 연구소장, 대학교수, 심지어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환경에서의 대학총장까지 다양한 변화에 망설임 없는 도전으로 임하면서 나이가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개척정신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는 주변과 협업해 나아가는 열린 마음이다. 군 생활 중에 여러 파견국가에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수용하는 유연성을 키웠으며 이해관계가 얽힌 동북아의 비핵화 문제 등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현명하게 해결했다. 또 낯선 한국 땅에서 총장으로서 대학을 경영하며 다양한 문화를 가진 학생, 교직원들과 직접 대화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하였다. 한번 만난 사람들을 잊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은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리더의 본보기와 같은 자세였다. 세 번째는 낙관적인 삶의 태도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쟁터, 두 번의 큰 수술, 타국의 낯선 문화환경 등 삶의 고비 앞에서도 그는 늘 낙관적이었다. 작년 미국 출장 중 그를 만났다. 부쩍 야위어 보여 물어보니,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내를 간호하느라 살이 빠졌다. 오히려 아내 덕에 다이어트가 되었고 그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받은 도움을 이제야 갚는다고,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잘한 일이 아내를 만난 일.’이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그와의 마지막 만남은 힘듦 속에서도 긍정과 감사를 선택해 왔던 그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했다. 가까운 선배, 친구들의 부음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울적한 마음에 빠져들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추스르고 힘을 내본다. 도전정신, 따뜻한 마음과 열린 자세, 낙관적인 삶의 태도로 아흔 평생을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던 엔디컷 총장의 모습에서 필자도 어떻게 피니싱웰(Finishing-well)해서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아름다운 여운을 남길지 고민해본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07.18 15:21

미연(未然)에 방지(防止)

시간당 100mm 이상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장마철 각종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기상청은 200년 만에 한번 정도 발생할 수 있는 강수량이라고 발표했다. 승강기 침수와 산사태로 인명사고가 발생하고, 도로가 침수되고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는 등 장마철 피해는 미연(未然)에 방지할 수는 없었을까? 일방통행로를 잘못 인식하고 진입하여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교통사고로 안타까운 사망사건이 발생하였다.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었을까?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당하여 진실 공방을 하고 있는 축구아카데미 대표, 명품 백 알선 수수에 대한 공방으로 촉발된 정치권 싸움, 음주운전 사고 후 뺑소니로 구속되어 재판받는 연예인, 눈뜨면 벌어지는 각종 사건 사고를 보며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을까를 질문해 본다. 미연에 방지할 수만 있었다면 그런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안타까움 때문이다. 미연(未然)은 아직까지 일이 터져서 그렇게(然) 되지 않았다(未)는 뜻이다. 미연에 방지하라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때 미리 조치를 취하여 일의 발생을 막는다는 것이다. 하수는 사고가 터져도 해결하지 못하고, 중수는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해결하고, 고수는 사고가 나기 전에 해결하여 사고 자체를 막는다. 미연에 방지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고수다.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편작(扁鵲)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의술을 갖고 있었던 명의였다. 편작에게는 형제가 셋이 있었는데 모두 의술에 능통했다고 한다. 형제 중에 누가 제일 의술이 뛰어나냐는 질문에 편작은 큰형이라고 대답하였다. 큰형은 병이 나기 전에 미리 알아차려서 미연에 예방하니 의술이 가장 뛰어나고, 둘째형은 병이 드러나기 시작할 때 치료를 해주고, 자신은 환자의 병세가 깊어 고통을 호소할 때 비로소 치료하기 때문에 가장 수준이 낮다는 것이다. 자신이 명의라고 세상 사람들에 알려져 있는 것은 병이 나서 고치는 것만 보고 그러는 것이니 진짜 고수는 병이 나기 전에 미연에 치료하는 큰형이라는 것이다. 편작은 이미 발생한 병만 고치는 하수라면 편작의 큰형은 예방의학을 실천한 미연의 고수였던 것이다. 중국 원(元)나라 좌극명(左克明)이 편집한 <고악부(古樂府)>에는 군자의 능력을 ‘미연(未然)에 방지(防止)’라고 정의한다.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조심하고 조치하여 예방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사람이다(君子防未然, 군자방미연). 군자는 남들의 의혹을 살만 일을 하지 않는다(不處嫌疑間, 불처혐의간).’ 오이 밭에서는 신발 끈 매지 말고, 자두나무 밑에서는 모자를 만지지 말아야 도둑질 한다는 혐의를 미연에 방지 할 수 있다. 고위층 인사들은 남의 의심이나 의혹을 살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 사건이 터지고 혐의를 받기 전에 미연에 조심해야 한다. 명품 백을 그냥 준다고 덥석 받고, 법인카드를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난다면 미연의 방지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기미를 읽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기미(幾微)는 일이 발생하기 전에 나타나는 미세한(微, 미) 조짐(幾, 기)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반드시 조짐이 있다. 사고가 자주 나는 도로에는 사고의 기미가 있고, 침수가 자주 되는 도로에는 침수의 기미가 있다. 기미를 알고 미연에 방지하면 큰 사고를 막을 수 있다. 하인리히 법칙에 의하면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작은 사건과 조짐이 선행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큰 사고는 예정된 사고이며,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작은 사고와 기미가 선행한다는 것이다. 고수는 기미를 미리 읽고 일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얼마 전 받은 건강검진에서 몇 가지 나쁜 징후의 수치가 나타났다. 큰 병나서 고생하기 전에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건강관리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는 다짐을 해 본다. 병나고 나서 병원 찾는 것은 하수이기 때문이다. /박재희 (인문학공부마을 석천학당 원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4.07.11 15:13

우리는 희망의 불씨를 보았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열린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는 여느 해와 달리 인파가 몰렸다. 전시장에 입장하려는 인파가 통로를 메운 채 이동하는 광경은 진풍경이었다. 전시장 입장에만 한 시간 넘게 소요되었다. 출판사 부스마다 저자 강연을 마련하고, 전문가가 나서서 책 추천도 하고, 저자 서명 같은 행사 등으로 독자의 관심을 끈다. 출판사 부스를 순례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벅찬 감정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닐 테다. 이토록 많은 독자들을 마주하며 고무된 한 출판인은 출판사는 좋은 책 내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면서 자신감을 내비쳤다. 우리나라 성인 독서율이 낮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해마다 수천군데의 출판사에서 8만여 종의 신간을 쏟아내는데, 1년 동안 책을 1권도 안 읽는 우리나라 성인은 10명 중 6명이라고 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가용 어휘의 양이 줄고, 복잡한 사유를 할 능력이 사라지며, 뇌의 인지 능력도 감소된다. 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가? 시간이 없다, 책값이 비싸다, 좋은 책이 드물다, 같은 다양한 이유를 댄다. 책을 멀리 하는 사정도 제각각이다. 우리에게 ‘읽는 뇌’의 경이로운 여정을 알린 이는 인지신경과학자인 매리언 울프라는 사람이다. 울프는 독서가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반복적인 독서 경험을 통해 읽는 능력, 즉 공감하고 이해하는 문해력, 추론, 사색과 성찰을 위한 지력을 키워야만 한다는 뜻이다. 독서란 학습과 훈련을 통해 체득해야만 하는 생존 기술 중 하나다. 독서는 인지적 프로세스 전체를 포괄하는 활동이고, 뇌에 생물학적, 지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제다. 인류는 독서 능력을 체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인류는 책 읽는 능력을 갖춘 뒤 놀라울 지력을 갖춘 존재로 진화한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독서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그 발명품을 통해 인간은 뇌 조직을 재편성했고 그렇게 재편성된 뇌는 인간의 사고 능력을 확장했으며 그것이 결국 인지 발달을 바꿔놓았다’.(매리언 울프 ‘프루스트와 오징어’) 내 뇌가 읽기 능력을 갖춘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출현한 지 30만년이 흘렀다. 30만년의 끄트머리에서 문자가 나오고 책이 나올 때까지 인류는 문자나 책 없는 살았다. 인류가 점토판, 거북의 등껍질, 바위, 양피지, 파피루스, 죽간 등에 문자롤 기록한 건 겨우 6천년 전이고, 책은 그보다 한참 뒤에 출현한다. 원시인의 뇌에는 독서를 할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수세기에 걸쳐 책과 친해지는 과정을 거치고 읽는 학습을 반복하면서 인류의 뇌에는 책을 읽는 회로와 배선이 만들어졌다. 문자를 발명해내 읽기에의 걸음마를 시작한 수메르인 이후 쿠덴베르크 활자가 발명된 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읽는 뇌’를 만드는데 장구한 세월을 보낸다. 인류는 진화 과정을 거치며 뇌에는 큰 혁신과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책 읽는 뇌의 시대에서 이미 디지털 뇌로 전환하는 징후들이 나타난다. ‘매일 디지털 화면이 제공하는 무수히 많은 정보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폭발적인 정보에서 또 다른 정보로 이동한다’.(매리언 울프 ‘프루스트와 오징어’) 책을 읽고 사색하는 대신 디지털 기기에서 검색하며 정보를 손에 넣는 동안 우리의 뇌에서는 깊은 독서와 사색 능력을 강제로 삭제당하는 중이다. 책이란 문자로 엮인 생각의 뭉치, 사유의 덩어리, 혹은 서사의 집적체이다. 인류는 책과 친해지고 ‘읽는 뇌’를 도약대 삼아 놀라운 진화상의 성과를 거둔다. 인류가 책과 담을 쌓고 멀어진 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까? 그 미래가 낙관적일 것 같지는 않다. 진짜 위기는 위기가 위기임을 모르는 데서 시작한다. 출판업은 지식을 생산하고 그 역량의 키우는 산업이다. 지금 출판업은 위기다! 만년 적자에 빠진 출판업의 위기는 서점과 인쇄소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을 찾은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건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장석주 시인

  • 오피니언
  • 기고
  • 2024.07.04 15:13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