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많은 이별을 경험하는데 마지막 이별은 죽음이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이별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가 중요하다.
내가 올 한 해 동안 한 일 중에 잘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전주 효자 추모관 프레미엄실에 부부 유택(幽宅)을 장만한 것이고 또 하나는 사전 연명 의료중단 의향서의 등록이다. 원래는 대학병원에 시신을 기증하려 했는데 아내의 반대가 완강하여 포기했다. 그러나 이제는 숙제를 끝낸 아이처럼 무척 홀가분한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여유로울 때는 나의 장례식 그림을 미리 그려보기도 한다.
얼마 전 성도들이 모여 구역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이 ‘소망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건강하게 살다가 부르시는 날 평안히 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즉 병사를 하거나 사고사를 당하지 않고 타고난 명만큼 살다가 평안히 죽고 싶은 지극히 평범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기원이다.
91세 된 할머니가 입원했는데 병이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자손들이 모였다. 혼수상태에 빠지자 신부인 아들이 함께 마지막 미사를 올렸다. 할머니는 눈을 번쩍 뜨고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어서 고맙다”며 마지막으로 위스키를 한 잔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놀랐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하여 위스키를 드렸더니 한 모금 마시고는 얼음을 넣어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맛있다면서 이번에는 담배를 피우고 싶다 했다. 아들이 안 된다고 하니 “죽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 바로 나다. 담배 한 개비만 다오.”하며 간청했다. 담배를 받아들고 여유 있게 피우더니 모두에게 감사를 표한 뒤 “얘들아,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안녕!”이라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비록 일화이지만 가족들은 죽음의 순간 그녀가 보여주었던 밝은 행동을 생각하고 얼마나 어머니다운지 서로 이야기하며 웃었다. 할머니는 평생 위스키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었는데 참으로 위대한 할머니였다.
대개는 준비 되지 않은 채 마주친 육친의 여러 죽음을 통하여 비통하고 애절한 경험을 한다. 이렇게 마음 편히 고인을 보내드린 적이 없다. 나도 이처럼 발길 가볍게 떠나면서 남은 가족에게도 슬픔을 남기고 싶지 않다.
어느 유서 이야기다. 할머니가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기면서 유족에게 유서를 썼다. ‘너희들이 내 자식이어서 고마웠고 그동안 나를 돌보아주어 고맙다. 너희들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어미라 불러주고, 젖 물릴 때 나를 바라보던 눈길에 행복했다. 하느님이 부르실 때 이렇게 곱게 갈 수 있도록 곁에 있어줘서 참말로 고맙다. 남편을 잃고 세상 무너지는 험한 세상 속을 버틸 수 있게 해줌도 너희들이었다. 너희가 있어서 행복했다.’ 자녀들은 이 유서에 감동했고 그와의 이별을 잘 견뎠다.
평소 하고 싶은 얘기는 이미 수필 속에 녹아있지만 나도 이제 자녀들에게 짧은 고별사는 준비해야 될 것 같다. 말을 할 수 없는 경우를 대비하여 몇 마디 적으면 “모두 고맙다. 가족이 있어 살맛이 났고 행복했다. 서로 사랑하며 잘 살아라.”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삶을 마감할 때 도움을 받은 누군가에게 감사해야 한다. 생명을 주신 신과 부모에게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이며, 노년을 외롭지 않게 돌보아준 자녀에게도 고마워해야 한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 업을 정화하기 위한 강력한 기회가 주어지므로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업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에 가급적 좋은 생각을 하는 게 필요하다.
* 김현준 씨는 대한문학 수필부문으로 등단하고 영호남수필 전북부회장, 대한문학 작가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수필집 ‘이젠 꼴찌가 좋아’ 등 6권이 있으며, 대한문학 작가상을 수상했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