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내 귀에 대고 귓속말을 한다.
“엄마, 야! 야! 하지 말고 그냥 수연아 하고 이름을 불러주세요.”
아들의 말에 뜨겁게 달구어진 숯덩이가 내 얼굴에 착 달라붙는 것처럼 화끈 거렸다.
아차, 번쩍 정신이 들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 말은 뱉어 졌고 주워 담을 수 없는 부끄러움만이 내 몫이 되었다.
지난 주말 조양 임씨 참의공파 십이세 (兆陽林氏 參議公派 十二世(秀番) 종인들이 모여 추천대 원옥동산에서 시제(時祭)를 지냈다. 전날부터 내린 비가 아침까지 오락가락 하였지만 100명이 넘는 많은 종인들이 참석 하였다.
시제가 시작되기 전 무리 속에 있는 며느리를 발견하고 내가 맡은 역할을 도움 받을까 싶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급한 마음으로 호명한 며느리의 이름은 야! 였다. 야!.... 야!.....
나의 무례한 호칭으로 아들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 같고 며느리는 순간 주변을 살피며 당황했을 것 같다.
내가 말하면 사람들은 어쩜 말도 그렇게 예쁘게 하느냐고, 역시 시인이라 말 하는 것도 다르다고 하는 소리를 자주 들어왔다.
사람의 인격은 말에서 나오고 천 냥 빚도 말 한 마디로 갚는다는 속담도 있으니 말의 중요성은 그야말로 한 사람의 품격을 대신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생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나는 우리말 순화를 위한 우리말 지킴이가 되고 싶은 사람이고, 예쁜 언어를 골라 쓰는 시인이고, 존중하며 배려해야 하는 문해 어르신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니 특별히 말을 신중하게 하여야 함은 당연한데 어쩌다 이런 실수를 또 저질렀는지 내 입을 톡톡 치고 싶었다.
바라만 보아도 예쁜 며느리가 내 허리를 혹은 어깨를 감싸며 어머님하고 속살댈 때면 정말 행복했다.
고부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네 들으면 나는 웬 복이 그리 많아서 이렇게 상냥하고 착한 며느리를 보게 되었는지 감사했다.
결혼과 함께 따로 나가 살다보니 자주 만나는 건 어렵고 같은 교회를 섬기게 되어 만남이 이루어지는 주일이 더욱 기다려졌다.
처음 며느리에 대한 호칭을 뭐라 할까 생각하다가 책이나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사랑스러움을 담아 ”아가야“ 하고 부르고도 싶었지만 그건 너무 고전적이고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독립된 개인으로 생각하여 아들과 딸처럼 이름을 불렀더니 친근하고 편안하고 정답게 느껴져 좋았다.
다정도 병이라 했던가!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던가!
처음 내가 며느리에게 야!라고 불렀던 날은 교회 식당에서 였다.
아들이 내 손을 잡고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엄마, 부탁이 있어요. 수연이한테 야!”하지 말고 그냥 수연아! 하고 불 러주세요. “
엄마가 비 매너적인 사람도 아니고, 누구든 무례하게 구는 걸 싫어하는 줄 알면서 얼결에 한번 나온 걸 가지고 지적하는가 싶으니 서운하고 야속했다.
‘햐! 이놈 봐라 장가가더니 지 색시는 퍽도 감싸네.’ 하는 기분도 들고, 무엇보다 내 실수에 대한 무안함과 당혹감을 숨기고 싶은 마음만 급급했다.
놀부가 타던 박 속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도깨비 같은 이 황당한 상황을 나는 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서 아들의 부드러운 지적에도 상처가 되었다.
말이란 감정을 내포하고 있어서 조금의 차이만 느껴져도 감정을 상하게도 하고 좋게도 한다.
며느리가 느꼈을 참담함을 생각하니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또 아들이 내게 말하기 위해 얼마나 머뭇거렸을까 생각하면 미안했다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향해 ”야! 하고 큰소리로 불렀는데 알아듣지 못한 며느리가 대답하지 않으니 시어머니가 신고 있던 신발을 며느리에게 벗어 던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깔깔대며 웃었던 적이 있다. 하마터면 내가 그 시어머니처럼 될 뻔 했으니 생각만 해도 부끄럽다.
이렇게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건 아들의 조심스런 부탁이 나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고, 서로를 존중하는 따뜻하고 공손한 말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윤옥 시인은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과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전북시인협회, 전라시조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집 ‘이만 사랑을 잠재우고 싶다’, ‘흔들릴 때 더욱 푸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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