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굴러가는 것들의 위력에 대해서 생각이 맴돌고 있다. 지금도 88올림픽 때 8살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던 장면이 종종 떠오른다. 넓은 경기장 가운데로 굴렁쇠를 굴리며 갈 때 넘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있다. 굴렁쇠! 누구나 한 번쯤 굴려 보고 싶었을 것이다. 굴렁쇠를 굴리는 의미가 세계 평화와 동서양의 화합을 소망하는 퍼포먼스임을 알고 감탄했다.
아름다운 것들은 둥글다. 꽃들은 둥글게 피어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나무들도 둥글다. 풀잎 아플까 봐 방울은 둥글게 몸을 말아 내리고 소나기 지나고 일곱 빛깔 무지개도 둥그렇게 뜬다. 순하고 착한 것들도 둥글다. 젖내 나는 아기의 얼굴도 옹알이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미소도 둥글다. 마음과 몸의 수고로움, 제 고단함으로 남들을 이고 지고 가는 것들 바퀴들은 모두 둥글다. 나이 드는 것들 둥글다
오랜 세월 물살에 깎이며/먼 곳까지 구르고 굴러온/작은 조약돌들 둥글다/손때 묻어 낡아져 가고/정 들고 길들여진 것들/내 그리움도 꺼내보면/달님처럼 둥글 것이다
아마도 88올림픽 이후부터, 굴리는 것의 위대한 힘이 젊은이들을 열광케 한 것은 아닐까. 작은 골프공, 야구공, 축구공, 배구공 등 제멋대로 굴러가려는 작은 물체에 온 정신을 모아 기도하듯 뽑아내는 성취는 기적이 아닌 굴러가는 자성(自性)과의 싸움이다. 둥근 것의 우월성은 끊임없는 도전을 부른다. 둥글다는 것은 민첩성과 유연성으로 쉬지 않고 도전을 하게 한다. 평면은 안주하고 안전하다면 둥근 것은 발전적이고 진취적이다.
나는 구르는 것들의 관성(慣性)을 이용하거나 정지시킬 줄을 모른다. 나에게는 평면적인 내성이 잠재하고 있는지 모른다. 굴러가지 않는 것들이 거의 없을 만큼 눈만 뜨면 바퀴들을 굴려야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나 스스로 굴러가게 하는 능력이 없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승용차를 쌩쌩 굴리는 것을 보면 나도 한번 신나게 달리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집에 차가 있어도 나에겐 무용지물이다. 간혹 진작 운전을 익혀 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15년 전 면허증 취득 할 때의 스릴이 아직 생생한데 장롱 속 녹색 면허증은 주인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굴려야 부자가 된다는 펀드도 무용지물이다. 서울에 가는 친구는 대박을 터트렸다고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분명 어깨에도 이 생겼을 것이다. 나도 한번쯤 구경하고 싶어 어느 날 광판에는 붉은 글시 파란 글씨가 반짝이는 증권사에 들어가 보았더니 눈이 부셨다. 구석자리에서 구경 좀 하려는데 가만두지 않는다. “어떻게 오셨어요?”, “무엇을 안내해 드릴까요?”
구르는 세상 속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잔머리 굴린다는 말이다. 잔꾀, 잔머리, 말 돌리기, 말 바꾼다. 말만 비단이지 말장난 치는 사람은 진실성이 없어 보인다. 상대방을 무시한다고나 할까. 자기 말에 속아 줄 것으로 착각을 하는데, 사실은 속이 다 보인다는 것을 아는지 모를 일이다.
말이 투박하고 앞뒤가 잘 맞지 않아도 속마음은 상대가 알아주게 되어 있다. 굴리는 재주가 없어도 굴러가는 것들에 얹혀 세상 구경을 좋아하여 무료한 시간이면 마을버스에 오른다. 낯선 골목길에는 생동감이 넘치고 잔잔한 인정이 보인다. 그리고 평온한 일상이 엿보인다. 정신없이 굴러가는 도심보다 소박한 그런 마을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삶의 잔잔한 즐거움을 찾아 종종 마을버스에 몸을 실어 볼 일이다. 요란하게 굴러가는 세상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한눈팔지 말고 잘 붙들고 얹혀 가야 한다. 얹혀가자면 내가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
김덕남은 초등 교장으로 정년하고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향촌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아직은 참 좋을 때> <추억의 사립문> 등이 있으며 삽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김덕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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