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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9월을 맞으며 - 이원복

이원복(국립전주박물관장)

금년은 온고을도 꽤나 무더웠다. 수은주는 매년 기록을 갱신하니 지구의 온난화溫暖化를 절감하게 된다. 장마철을 보내고 나서 국지적으로 많은 비가 내렸으며 내년부터는 장마예보도 사라진다고 한다. 지구의 노쇠인지 생태계 파계가 초래한 이상현상인지? 세찬 풀벌레 울음소리와 더불어 염장군炎將軍의 기세는 처서處暑를 넘기자 한풀 꺾였다. 이 시기에 떨어지는 감은 지상에서나마 노랗게 바뀐다. 8,9월 뙤약볕 속에 결실은 성숙으로 달린다. 생활여건과 의학의 발달로 인류의 수명은 매년 늘어난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서 빗겨갈 유기체는 없다. 젊음의 아름다움은 이를 보낸 뒤 깨닫게 된다. 같이 있을 때는 고마움을 모르고 잃었을 때, 떠났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게 됨은 사람이나 나이나 마찬가지이다.

 

올 여름 열기는 베이징 올림픽과 함께 더했다. 역사를 살필 때 우리 강토는 외침 등 열강의 각축장角逐場으로 시련이 적지 않았다. 이번 세계 7위의 등수는 넓진 않으나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닌 결코 만만하지 않은 나라란 생각과 더불어 민족에 대한 자존自尊과 긍지矜持를 더하게 된다. 기특하고 대견한 민족임을 재삼 확인하게 된다. 이젠 잔치는 끝났으나 오늘을 새로운 시작의 날로 삼아야 한다. 내일은 오늘에 의해 결정되기에 이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누군가가 '어제는 역사history, 내일은 신비mystery, 오늘은 선물present'이라 했는데 가슴에 와 닿는다. 결실의 9월은 인간의 삶에선 노년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가을에 뿌리는 씨들이 있듯이, 후반생後半生 새로운 삶을 꾀하는 이들에겐 노년은 아니다.

 

얼마 전 서울 지하철 내에서의 일이다. 그날 회의가 오후 2시여서 지하철은 붐비지 않았고 빈 좌석도 있었다. 건너편에 한 돌 반쯤 보이는 아이가 엄마와 이모 사이에서 부산한 태도로 신을 벗지 않겠노라 실랑이를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를 바라보다 아이와 시선이 만나게 되자 다소 무게 실은 낮은 목소리나 미소를 머금은 편한 표정을 지으며 '이리 와!' 하니 칭얼대던 녀석이 별로 낯을 가리지 않는 듯 다소 뒤뚱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악수를 청하니 그대로 따른다. 나이 든 이를 알아봄인가.

 

곧 되돌아가 엄마 품에 안기면서 먼저 내게 손을 뻗으며 '하부지!' 하더니만 내 곁에 있는 학생에겐 '삼촌'하는 게 아닌가. 순간 뜨끔했고 잠시나마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 순수한 아이 눈이 가장 분명한 것 아닌가. 동안童顔으로 통하며 또래보다는 젊다고 자부하며 비교적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사는 편이나 친구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인 다음 날 아침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자신에게도 생경한 노인에 가깝다.

 

사무엘 울만이 지은 '청춘이란' 길지 아니한 글 속에는 '용기 없는 20대는 노인이며 용기 있는 60대는 한참 청춘'이라고, '나이를 먹음으로 늙는 것이 아닌 꿈을 잃어갈 때 늙는 것', '세월이 얼굴에 주름을 남기듯 정열을 잃으면 정신에 주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도홧빛 볼생동감 넘치는 긴장감을 동반한 젊음의 풋풋한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면 여유餘裕와 완숙完熟이 주는 중후한 아름다움도 엄존한다. 새 포도주의 싱그러움과 오래 묵은 깊은 향을 지닌 술맛이 다르듯. 강렬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타오르는 정열, 신선한 정신, 생동감을 주문처럼 외우며 가을, 9월을 맞이한다. 아직은 청춘이라 외치며...

 

/이원복(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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