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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명의 경이, 그리고 공동체의 책무에 대하여

쌍둥이를 낳은 조카 덕분에 이십몇 년 만에 처음으로 아기의 향기를 맡았다. 백일도 안 된 어린 생명체들의 경이로움, 앙증맞은 이목구비로 부지런히 숨을 쉬고 세상을 관찰하며 젖을 빠는 모습이 한동안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답다. 어른 손가락 두어 마디 크기의 손발을 버둥거리며 옹알인지 울음인지 소리를 내는 일은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세상에 알리고 인정과 도움을 받으려는 본능적 행위일 터, 그 낱낱의 동작들에도 우리는 놀라고 신기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새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그래서 어디서나 날이 새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런데 이 경이로운 순간을 마냥 찬탄하고 즐거워만 할 수 없으니 어쩌랴? 저 어린 것들을 돌보고 키우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동의 양과 질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갑자기 숨이 막힌다. 산모는 아이를 낳자마자 나라에서 데려다 다 키워서 돌려줬으면 좋겠다며 농담인 듯 농담 아닌 호소를 한다. 그거 ‘가까운 옛날에 세상의 절반쯤이 탁아소라는 이름으로 실험해본 방식인데, 그 시절이라면 국가보안법에 걸릴 발언이기도 한데’ 하다가 이어지는 생각들-. 유발 하라리는 비슷한 종들 가운데 유독 인간이 저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은 가족과 사회의 보살핌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라는 뜻이라고 썼다. 태어나자마자 걷거나 뛰기도 하는 다른 종들은 그만큼 개체의 독립성이 강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가족과 사회가, 그를 통한 소통과 진화가 인간을 여러 종들 가운데 으뜸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류의 어린 생명체들은 참으로 연약하다. 그래서 잘 먹이고 잘 입혀 세심하게 양육하는 일이 필요하다. 새 생명에 대한 놀람과 환희보다 더 길고 무거운 것이 곧 양육의 문제이다. 아이를 낳기 꺼려하는 젊은 세대들의 생각에는 출산 그 자체보다 이 길고 무거운 양육과정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압박의 문제, 그 중 훨씬 비중이 큰 게 후자인가? 그래서 출산과 동시에 일억원을 준다는 회사의 신입사원 지원율이 네 배 다섯 배 오르는 것인가? 하지만 그 방식이 궁극의 답이 될 수 없음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경제적 지원으로 아이를 더 낳게 하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공허한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누구에게나 일과 양육이 서로 맞서지 않고 편안히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면 되는 것 아닐까? 자기 피붙이가 아니면 좀처럼 아이의 향기를 맡아볼 수 없게 된 세상, 온 가족과 아이돌보미까지 달라붙어야 간신히 양육이 가능한 세상은 아무래도 비정상이다. 밭매다 애 낳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면, 지금의 양육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를 냉정하게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답은 과연 무엇일까? 우선 어디서든 스스럼없이 이웃의 아이도 안아볼 수 있었던, 아니 안아서 같이 키우던 시절의 사회학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데서부터 출발하면 어떨까? 내 핏줄 내 자식이어야만 양육과 돌봄의 대상이라는 생각은 곧 무한경쟁시대의 강퍅함이 빚어낸 가족이기주의의 한 단면이다. 이 극단적인 가족이기주의를 완화하는 게 멀지만 가야 할 길이다. 하나 더, 이 나라의 급격한 고도 산업화 이후 점점 더 늘어온 노동시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른 오후가 되면 퇴근해서 가족과 함께 축제를 즐기고 이웃과 여가를 나누는 선진국들의 모습에서 배워올 필요가 있다.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힐 만큼의 살인적인 노동시간을 여전히 감수하고 있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일상을 변혁하지 않는다면 그밖의 모든 논의는 결국 공염불일 것이다. 곽병창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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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5 18:42

전라감영 활성화를 위한 현대적 활용 모색

지난 11월 11일 전주 전라감영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라감영 접빈례(接賓禮)’다. 외교관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가 1884년 전라감영을 방문하였을 때 전라 감찰사 김성근(金聲根, 1835~1919, 1883년 2월~1885년 1월 재임)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데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전라감영 접빈례는 이를 토대로 재현한 것이다. 그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풍남문에서 가마를 타고 전라감영에 도착하였는데 이날은 취타대와 전주기접놀이 보존회가 전라감영까지 퍼레이드를 펼치며 조지 포크를 맞이하였다. 이어 감찰사격인 도지사가 전라도 방문을 허가한 호조(護照)를 수여하고 참석한 기관장들은 포크의 방문을 환영하는 축사를 진행하였다. 이에 포크의 답사가 이어졌다. 관찰사와 육방권속이 함께 촬영한 것처럼 당시 사용했던 유리건판 방식을 그대로 활용하여 참석한 기관단체장들은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어서 춘앵무·무고·살풀이의 무용과 판소리 공연으로 축하연을 펼쳤다. 이는 당시 4인의 무희들이 춘 무고(舞鼓) 춤을 사진기록으로 남기고 있는데 이를 토대로 당시 교방청 예인들의 성대한 공연프로그램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고 기획한 것으로 보인다. 숙소에는 꽃 화병을 놓고 술잔에 국화꽃을 띄우는 등 전라감영에서의 손님 접대와 전라도 음식, 교방청 예인의 축하연을 두고 조지포크는 타 지역에서 경험하지 못한 격조 있는 대접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 파견한 보빙사의 통역장교로 조선인들과 처음 대면하였고, 거북선을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하였으며 팔만대장경 등 조선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제너럴셔먼호 배상 청구의 부당성을 반박한 미국 정부 외교관으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고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처럼 조선 근대 외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조지포크의 기록은 외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전라감영과 전주의 사회문화, 예술에 대한 최초 사료로서 근대문물의 수용 과정도 확인할 수 있는 유의미한 가치가 존재한다. 다만, 이러한 그의 기록이 휴민트(humint)적 산물이라는 점은 아쉬움이 있다. 전라감영은 건축물의 복원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전주시는 2020년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전라감영을 복원했다. 전라도의 수도가 전주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다시금 새기고 동시에 풍패지관(灃沛之館, 조선왕조의 발원지)과 한옥마을을 연계한 관광 거점의 중추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말이다, 전북의 정체성을 제고하기 위한 야심찬 사업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대와 달리 관광객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전북은 지자체 중 가장 큰 규모의 도립국악원과 무형유산을 최다 보유하고 있고 여기에 전주대사습, 전주세계소리축제 등으로 어느 지역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전통문화적 기반이 탄탄하다. 이러한 문화적 자산을 토대로 접빈례 행사를 연례적으로 지속하여 전라감영의 문화상품으로써 전북 고유의 문화콘텐츠로 작동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제는 전라감영이라는 공간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콘텐츠를 개발하고 현대적으로 활용하여 전북의 문화적 정체성과 우수성을 알리고 확산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노복순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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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8 19:02

살아있는 예술, 살아있는 유산

하얀양옥집(구, 도지사관사)에 간만에 지역 어르신 두 분을 모셨다. 바로 무형유산 색지장 김혜미자 선생님과 소목장 소병진 선생님. 전주 한옥마을 관람객이 가장 많은 가을의 시작 즈음, 전북도가 주최한 한인 비즈니스 행사와 맞물려 기획된 전시 <손끝의 결>에서 두 분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선보였다. 25일간 열린 이 전시는 8,000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며 큰 호응을 얻었다. 이 두 장인의 작품은 지역을 대표하는 유산으로 이미 여러 차례 전시된 바 있지만, 색지와 나무라는 전혀 다른 재료로 동일한 가구를 만드는 이들의 작품을 나란히 선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전통이라는 한 분야에서 30년 이상을 지켜온 두 분의 희노애락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시민들과 함께 듣는 시간이 이 전시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김혜미자 선생님은 한지가 주는 섬세함과 따뜻함을 이야기하며 자연 재료가 지닌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긴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소병진 선생님 역시 나무가 주는 단단한 구조와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를 설명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다듬어 온 나무가 지닌 내적 힘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의 작업은 단지 전통 공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지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살아있는 예술'이었다. 김혜미자 선생님은 한지를, 소병진 선생님은 나무를 다루며 오직 하나뿐인 작품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그저 손끝의 기술이 아니다. 기술과 손재주를 넘어 전통을 지키겠다는 신념이자 재료의 본질을 이해하는 통찰이 깃들인 정신의 산물이다. 또한 이 두분을 통해 전통이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의 유물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깊은 의미를 전달하는 '살아있는 유산'이라는 사실도 새삼 상기하게 되었다. 유홍준 교수는 전통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전통은 그저 과거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이어가는 것이며, 그 안에 미래를 여는 길이 있다." 고. 하지만 우리는 흔히 전통을 ‘옛것’으로만 여기곤 한다. 그러나 전통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말처럼 단절된 과거의 흔적도 아니다. 전통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이자 우리 삶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더해주는 힘이다. 현대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전통을 고수하는 일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켜야하는 이유는 그 안에 시간이 켜켜이 쌓인 인간의 기쁨과 슬픔이 응축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인간 삶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로 자리하고 있기에 우리는 전통을 그냥 보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살아있는 전통'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전통을 단순히 박제화하지 않고, 살아있는 유산으로서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레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전통이 살아있는 유산으로 우리와 함께 성장하고 시대를 아우르는 힘을 가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임진아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문화예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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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1 19:16

만경강은 오늘도 흐른다

펄 벅, 헤르만 헤세,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그리고 한강! 얼마 전 꿈에 그리던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나라 문학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석하기 어렵고, 우리말의 맛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워 노벨문학상은 우리끼리만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사그라들기 일쑤였는데,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가 드디어 나온 것이다. 놀라고 감격스러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한강 작가의 소식을 듣고 생뚱맞게도 만경강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한강을 통해 만경강이 떠오르는 건 작금의 우리지역 문화의 힘이 못내 맘에 들지 않는 극성스러운 전북인이라서 그런가보다. 만경강은 남한에서 6번째로 긴 강이다. 장수 팔공산 자락에서 발원한 금강과 섬진강이 여러 지역을 지나 서해로 남해로 흐르고, 남원 봉화산에서 발원한 남천은 임천과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있지만, 만경강은 오롯이 전북에서 발원하여 전북의 소하천을 한데 모아 새만금을 통해 서해로 흘러가는 전북의 대동맥이다. 다행히 4대강 사업에서는 비껴나갔지만, 일제강점기 인공제방을 쌓고 구불구불 흐르던 강을 반듯하게 만들면서 수탈의 역사와 함께 그 모습이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다. 만경강이라는 이름도 일제강점기에 처음 생겨났으니, 이중환의 택지리에는 사탄(沙灘),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사수강(泗水江), 동국여지승람에는 고산천을 안천(雁川), 전주천을 남천(南川), 하류를 신창진(新倉津)으로 불렀다. 또한 대동여지도에는 삼천과 합류한 전주천을 횡탄(橫灘)으로 기록하고 있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물이 보다 빠르게 흘렀음을 알 수 있다. 만경강유역에 기록된 10여 개의 포구와 나루터는 강을 따라 얼마나 많은 물자가 오고갔는지를 짐작케 한다. 만경강의 역사를 굽어굽어 올라가면 4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만경강은 전북의 역사 뿐 아니라 한민족의 역사에서도 굵직한 획을 남기고 있다. 우리민족의 근간을 이룬 농업은 청동기시대 수전농경이 발달하면서 본격화되는데, 청동기시대 유적이 가장 많이 밀집된 곳이 바로 만경강유역이다. 농자천하지대본, 전북의 뿌리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왔음이 여러 유적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전북혁신도시 일대는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마한이 시작한 곳이며, 청동기 제작기술이 발전하고 신소재인 철(鐵)이 등장하여 초기철기문화를 화려하게 꽂피운 곳이다. 이후 마한세력은 전주 탄소산단부터 완주 수계리와 상운리 일원에 1,400여기 이상의 주거지와 수백여기의 고분군을 조성하면서 거대한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백제의 고도인 금마 역시 만경강을 기반으로 성장하였으며, 견훤은 만경강을 중국과 소통하는 관문으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 전주에 흐르는 강을 한(漢)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고향에 흘렀던 사수(泗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만경강처럼 고대역사가 지속적으로 중심권역을 형성하면서 발전한 곳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 만경강의 역사를 담아내는 노력을 우리는 얼마나 했던가? 목천포에 있는 만경강문화관에 만경강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지만, 대부분 수탈의 역사이다. 만경강 역사 4만년 가운데 수탈의 역사 40년은 0.001%이다. 우리는 99.999%의 찬란한 만경강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널리 알려야 한다. 더 늦기전에 만경강의 역사를 오롯이 담아 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기를 희망해 본다. 오늘도 흐르는 만경강처럼, 그 눈부신 역사처럼, 하나 되어 나가는 힘이 절실히 필요한 요즘이다. 한수영 고고문화유산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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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04 16:39

노벨문학상 보유국의 품격과 할 일

한강의 시선은 깊다. 그는 동시대의 아픔, 가까운 지난 시대의 아픔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여느 작가들과는 그 결을 조금 달리한다. 그의 시선이 남달리 깊다는 것은 곧 그가 견뎌오고 있는 시대의 아픔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드러낸다. 역사적 참상을 전달하되 그 참상의 외면에 집착하거나 분노하고 호소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참상의 내면, 어찌하여 일이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는지에 대하여 그는 묻는다. 묻고 또 물으며 거기 연루된 모든 인간 군상들의 내면 그 깊은 속을 더 들여다보려 한다. 그리고 희생자들, 희생당한 모든 존재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곡진하게 드러낸다. 그가 보내는 애도의 시선은 그래서 누구보다 깊고 간절하다. 애도의 우물이 있다면 그가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그 우물의 맨 밑바닥에 잠겨있는 눈물 한 방울일 것이다. 그렇게 그는 우리 문학이 지난 몇십 년 간 이룩해온 빛나는 리얼리즘의 성취를 넘어선다. 그런 점에서 4.3이나 광주를 이야기할 때 그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을 우리는 진지하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는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에 빠져 있는 작가가 아니다. 좌와 우의 상호 정당성 따위를 논하지 않고도 우리가 들여다 봐야 할 진실이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그의 문장들은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 만든 이 세상은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연약한가? 이 유리그릇같은 세상에 우연히 찾아오는 폭력의 유혹들은 얼마나 강렬하고 치명적인 것인가를 말한다. 물론 그의 작품들이 모두 역사적 트라우마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들은 도처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상처입은 인간들을 그린다. 그 인간들은 때로 일그러진 욕망에 사로잡혀있기도 하고 물리적 장애에 직면해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일상의 이면에 얼마나 다양하고 깊은 상처들이 존재하는지 그는 천착한다. 그리고 그 연약한 존재들의 곁에 서서 그 목소리를, 눈길을 받아내려 한다. 어떻게 하면 그 아픈 존재들의 아우성을 더 정확하게 받아 그려낼 수 있을까가 그의 필생의 고민인 듯 보인다. 이런 그가 큰 상을 받았다. 그가 받은 큰 상은 그래서 한국문학의 경사를 넘어선 하나의 거대한 진보이다. 당연히 이 기구한 근현대사를 견디고 있는 한민족에게 주는 소중한 선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이 더 안타깝다. 역사적 진실에 대한 무지, 예술의 본질과 그 효용에 대한 천박한 인식을 대놓고 드러내는 이들의 발호가 지금도 심심찮게 이어진다. 여전히 이분법적 사고를 못 벗어나는 이들, 좌와 우, 가해와 피해, 진보와 보수의 진영 놀음에 갇힌 저 외눈박이들이 참으로 처량해 보인다. 이런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저런 몰상식의 어법들을 그냥 간과할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바탕에는 문학, 문화예술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와 선입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 들어 자행되어 온 출판산업진흥이나 학교문화예술 강사들에 대한 지원금 삭감 움직임에 개탄한다. 이게 다 우리 시대의 문학, 연극, 영화 등 거의 대부분의 예술 행위가 좌파들의 놀이터라는 인식, 그 뿌리깊은 피해의식과 선입견 탓이다. 이런 생각이 이어지면 아무리 빛나는 경사도 그 빛이 바랠 수 있다. 예술을 지원하고 그 토양을 장기적으로 비옥하게 만들 사명을 지닌 정부 기관 관계자들의 맹렬한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이제 노벨문학상을 받은 나라의 품격과 할 일을 생각할 때이다. 곽병창 극작가·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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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8 19:29

가치지향에 대한 탐구로 지속 가능 소통구조 마련

지난 10일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가 선정되면서 세간의 관심이 뜨겁다. 출판계·서점가·공공도서관 등 관련 업계는 연일 밀려드는 주문과 문의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한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작가 한 사람의 영광이 아닌 한국문학에 대한 평가이기도 할 것이다. 근자에 들어서 스포츠 분야에서는 물론 음악, 영화 등 세계무대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생산해 내고 있는 가운데 문학 분야까지 합류하면서 한국인으로서 웅비하는 자긍심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의 작품에 대해 잔인한 현실을 직시하고 한국의 비극을 인류의 경험으로 승화시킨 점과 삶과 죽음,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강인한 표현을 담고 있다는 점에 대해 높게 평했다. 사이토 마리코는 최대위기에도 인간 존엄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찬평했다. 이렇듯 한강 작가는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인간에 가해진 폭력에 천착하며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유진오닐의 말을 인용하며 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대화가 아닌 인간과 신의 대화여야 한다며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고 있다. 우리는 한강 작가의 문학관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가치지향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발을 딛고 사는 현실 세계에 대한 관심은 또 하나의 상수로서 작용한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라는 점도 말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지구의 지배종인 인류를 위해 존재함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당대의 사회문화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지향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창작 작업을 하는 분야에서의 작품 활동은 겉으로 드러나는 스토리를 추상화시키고 그 패턴을 찾아 연결시키면서 하나의 통섭적 사고를 통해 수행하는 방법이 지배적이다. 이는 동일한 생각일지라도 각 개별자가 가진 역량에 따라, 또는 관심분야에 따라 문학, 건축, 미술, 무용, 음악 등으로 표현되며 각 분야에서 그들이 가진 메커니즘을 통해 구현된다. 즉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자신이 가진 경험치나 능력치를 통해 표현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구축하고자 하는 세계관에 대한 깊은 고민은 개별자의 능력과 경험보다는 인류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전제되었을 때 훨씬 가치롭게 구현될 것이다. 우리는 시대와 인류의 마음을 캐내야 비로소 대중과 소통할 수 있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소설가는 글로, 가수는 노래로, 화가는 그림으로, 배우는 몸짓과 표정으로, 연주가는 악기로 대중들과 소통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각각의 표현법은 달라도 인류 보편적 삶과 가치지향은 어쩌면 같은 곳을 향해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분야든 유행과 트랜드만을 쫓다 보면 대중의 찰라적 요구와 관심은 충족될지라도 이는 지속 가능한 가치지향을 추구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때로는 실험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며 많은 에너지를 쏟아 도전을 지속할 필요성도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방향이 본질적으로 자기복제는 아닌지, 어떠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지속적으로 나가야 할 방향인지에 대한 자기검열과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가치를 만들고 그 가치를 상승시키는 작업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노복순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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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1 18:21

연결, 협력, 확장의 학교문화예술교육

우리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기술, 문화, 일상 모두가 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더 중요해지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교육이다. 특히 예술교육이다. 우리의 삶을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학교에서 예술교육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초등학교까지는 필수 과목인 음악과 미술이 중·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선택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그 결과 학생들은 예술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는 창의력을 키우고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는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감수성을 키우고 자기표현의 힘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건강하게 그 시기를 보내고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술교육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예술교육의 가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으며,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 결과 예술이 가진 본질적 가치가 학교 교육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다. 현재의 교육 시스템에서 예술은 그저 선택 가능한 과목일 뿐이다.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정부는 예술강사지원사업을 운영해 왔다. 이 사업은 학교 현장에서 예술 전문성이 부족한 교사를 대신해 전문 예술가들이 강사로 참여해 예술교육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미술과 음악뿐만 아니라 무용, 연극, 공예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전문가들이 학생들에게 교육을 제공해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근들어 예술강사지원사업의 예산이 대폭 축소되었다. 2023년 예산은 574억 원이었으나, 2024년에는 절반 수준인 287억 원으로 줄어들며 강사료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 이로 인해 전국의 5,000여 명의 예술강사들이 담당하던 수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대로 가면 예술가들의 일자리는 물론 학생들이 양질의 예술교육을 받을 기회를 잃게 될 상황이다. 예술교육은 단순히 성적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예술 과정을 통해 감정을 이해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예산 삭감으로 이러한 기회가 줄어드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은 정부와 지자체가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예산을 재검토해야 할 때이다. 예술강사들이 공교육 내에서 예술교육 강화를 목표로 노력해온 만큼, 예산 삭감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예술교육의 질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단순히 예술가들의 생계 문제를 넘어 미래 세대의 창의성과 문화적 역량을 위해 기성세대가 책임을 다해야 할 과제이다. 또한 정부와 지자체의 예산 이슈를 넘어서, 지역사회가 함께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양한 시도를 고민해야 한다. 지역 예술가들과 협력하고 학교와 지역사회를 연결하여 다양한 예술적 경험을 제공하는 창의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축적된 예술강사들의 경험과 역량은 이러한 변화를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단순한 교과목이 아니다. 교실의 경계를 넘어서는 교육이다. 학교와 지역사회가 연결되고 학교와 예술가들이 함께 협력하여 학생들에게 더 넓고 깊은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예술강사지원사업을 비롯한 여러 문화예술교육 정책이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지역과 함께 지혜로운 대안을 만들어보자. 임진아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문화예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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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4 17:52

유적공원의 아우성!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서부신시가지 일대는 마전들이 넓게 펼쳐진 한적한 도외지역으로 황방산 자락에 막혀 길도 외통수였고, 시내버스 종점이 있던 곳이었다. 마전마을을 가려면 전주천을 넘어 들어가야 했는데, 비가 많이 오면 마전 일대에 사는 친구들은 스쿨버스를 타고 먼저 집에 가곤했다. 수업 몇 시간 안하고 일찍 가는 친구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그 마전이 서부신시가지 개발로 말 그대로 천지개벽했다. 그 과정에서 전주의 고대 역사 한 페이지가 새롭게 쓰여졌으니, 바로 마전 고분군이다. 구릉의 능선을 따라 직경 20m 내외의 고분 5기가 줄지어 축조된 마전고분군은 경주의 대릉원과 같은 전주의 상징적인 유적이다. 무덤이 만들어진 5~6세기는 고구려에서 장수왕과 문자왕이 한반도 역사상 최대 영토를 일군 때이며,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후 동성왕과 무령왕이 백제중흥을 도모했던 시기이다. 우리가 배운 바로는 마전고분이 당연히 백제 무덤으로 생각되지만, 고분 안에서 출토된 유물과 다양한 형식의 무덤은 백제가 전주 일대를 직접 통치하기 이전, 마한(馬韓)의 문화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마전고분군은 마한에서 백제로 넘어가는 우리지역 고대문화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이렇게 중요한 유적이 발굴되자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유적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도 있게 논의되었지만, 신시가지 개발에 밀려 현지보존은 불가하였고, 이전복원이 결정되었다. 마전고분군을 이전해 놓은 곳이 바로 황강서원 옆에 조성된 문학대공원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소중한 문화유산을 현지보존하거나 이전복원한 유적공원이 제법 있다. 전주 송천동 자이아파트 앞에 위치한 송천어린이공원에는 만경강유역에서 처음으로 마한의 대규모 마을이 발굴되어 유적의 일부를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전북혁신도시 농업과학원 앞에 조성된 는들근린공원에도 혁신도시에서 발굴된 초기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찬란했던 문화유산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보고자 공원을 찾아 간다면, 십중팔구는 유적을 제대로 분간조차 할 수도 없으며, 찾았다 하더라도 볼썽사나운 모습만 마주할 것이다. 하나같이 데크는 깨져 있고, 유적 안내판은 여기저기 파손되어 있으며, 사진은 색이 바래 있다. 유구를 보호하기 위해 씌워 놓은 유리는 부옇게 변해 내부를 볼 수도 없고, 공원(公園)이 아닌 공원(恐園)은 혹여 아이들이 다칠까 우려스러울 정도이다. 수백수천 년 전의 유적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드물고, 또 유적을 찾아내어 발굴하기도 정말 어렵다. 하물며 그 역사적 중요성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랴!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문화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빛내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상당수 유적공원은 설계된 지 족히 20년이 넘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지금, 20년 전의 컨셉은 이제 낯설기만 하다. 물론 가끔씩 정비를 하고 있지만, 20년 전 설계 그대로 복구하는 것에 급급하지 유적을 활용하려는 새로운 방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주시 홈페이지에는 지역특색을 반영한 문화관광콘텐츠를 시대흐름에 맞게 산업화하여 경제발전의 신성장동력으로 만들겠다고 적혀 있다. 문화유산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가 더더욱 필요한 것이다. 죽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나들이도 가고, 동네 행사도 하고, 체험 프로그램도 개발해서 모두가 같이 나눌 수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한수영 고고문화유산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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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7 17:01

급변하는 시대, 시대를 거듭해도 변하지 않은 것에 집중하길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현대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뿐만 아니라 변화의 양상도 아주 다양해졌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 같은 현상이 펼쳐지고 있다. 이처럼 과학기술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더 빠르게 변화하여 미래에는 어떠한 변화에 발맞추어야 할지 고민한다, 반면, 여전히 변하지 않고 우리 곁에서 유의미한 존재로 남아 있는 것들에 집중해야 할 것인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1990년대를 전후로 PC 운영체제가 생겨났고 이후 인터넷, 윈도, 마우스 등의 낯선 장치와 도구들의 발명으로 인류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첨단문명의 이기 속에 살아가고 있다. 날마다 속도전을 치르며 변화가 가속화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야후의 검색엔진은 구글의 등장으로 무너졌고 이후 스마트폰,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 SNS, 인공지능 등이 우리 곁에 왔다. 농경사회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신기술과 신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전광석화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과학기술 발전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자동차, 인간을 대체하는 기계, 화성 식민지 건설을 꿈꾸게 하였다. 혹자는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미래 시대에 대처할 방안으로 변하지 않은 것에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에너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형태를 바꿀 뿐 창조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보존된다는 ‘에너지 보존 법칙’이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불확실한 무엇인가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분야에서 보존되는 에너지처럼 변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것에 몰입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분야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다를 것이다. 문학, 역사, 철학, 예술 분야는 아마도 인류가 지속하는 한 유효하고 불변할 것이다. 인간 본성은 몇천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고대철학을 현재에도 유의미한 대상으로서 탐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중에서 예술 분야를 깊이 들여다보면 특정 분야의 바이블 같은 텍스트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악곡, 기교, 창법을 토대로 그 기법이나 텍스트에 집중한다면 새로운 창작물이나 경계를 넘나드는 협업을 할 때도 그 이상의 새로운 창작품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도외시하고 동시대적 시류에 편승한 기법이나 유행에 몰입한다면 세대를 잇는 지속 가능한 명작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본과 전통적 텍스트에 집중할 때 우리는 한발 더 내디딜 수 있는 탄탄한 작품을 생산하여 미래에도 자연 도태되지 않을 명작으로 인류 문화에 풍요로움을 더할 것이다. 역사를 통해 자연 도태되지 않고 지금까지 인류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존재로 기능해 오고 있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실재한 대체 불가한 대상이라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인류 보편의 감성과 존재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들에 인류는 환호하고 관심을 갖는다. 인간 보편의 본성은 인종과 민족을 넘어 인류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문학, 미술, 음악, 영화분야 등에서 세계적인 명작들이 회자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가와 민족 간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으나 고유문화의 토종인자는 대체 불가한 유의미한 존재로 기능하고 있다. 억겁세월을 차곡차곡 쌓아 지금, 여기, 우리 곁에 실재하는 문화전통의 텍스트들은 미래 시대에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최고의 자산으로 작동할 것이다. /노복순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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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3 16:38

예술가의 창작, 재능 기부가 아닌 정당한 보상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한 점의 그림, 한 편의 소설, 한 곡의 음악이 만들어지기까지 그들은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낸다. 그런데도 종종 그들의 노력은 '재능 기부'라는 명목 아래 너무 쉽게 요구된다. 예술가의 창작이 단순한 나눔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은 결코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진지한 노동이며, 감정을 담은 창작의 결과물이다. 예술가들이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고민과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그들의 창작 과정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작업이 재능 기부로 취급된다면, 그들은 자신이 쏟은 노력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재능 기부라는 개념은 선의를 기반으로 하지만,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 예술가들이 경제적 안정 없이 창작은 지속 가능하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점이 예술가에게 정당한 보상이 필요한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이유다. 창작 활동은 단순한 ‘해주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계와 직결된 일이기도 하다.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예술가는 창작에 전념하기 어려워진다. 예술가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하고, 이는 창작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는다. 결과적으로 창작의 질과 양이 줄어들며, 예술가들은 점점 더 창작에서 멀어진다. 정당한 보상이 없으면 예술가들은 경제적 불안 속에서 창작을 포기할 위험에 처한다. 이는 예술의 다양성과 깊이를 잃게 만들고, 우리 사회는 삶의 건강하고 중요한 도구를 잃게 되는 것이다. '재능 기부'로 예술이 쉽게 소비되면, 예술의 가치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예술은 단순한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약 창작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예술의 힘은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다. 예술의 힘은 단순한 상품의 소비가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형성된 가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창작의 자유를 유지하려면 경제적 자립이 필수적이다. 경제적 독립 없이는 외부의 압박이나 상업적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창작의 자유와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예술가의 노동은 정당하게 보상받아야 한다. 예술이 주는 감동과 위로, 그 안의 메시지는 결국 자유로운 창작에서 나온다. 예술가들이 경제적 안정 속에서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어야, 그들의 창작물은 깊이와 진정성을 지킬 수 있다. 이것은 예술가 개인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화적 풍요로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결국, 모든 노동은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예술 분야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예술가의 창작이 재능 기부로만 소비되는 것은 이 원칙을 어기는 것이며, 그들이 창출한 가치에 대해 보상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존중받고, 그들이 가진 창의성과 열정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필요하다. 그것이 예술의 가치를 지키고, 우리 사회가 문화적 풍요로움을 지속하는 길이다. 예술가의 작업을 단순한 재능 기부로 여기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들의 작품과 노동에 대한 공정한 대우와 보상, 예술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한 때다. /임진아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문화예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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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9 15:34

서예의 본고장! 그 뿌리를 찾아서

우리 도는 명실공히 서예의 본고장이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내년이면 15회째를 맞이한다. 잘 어울리진 않지만 필자가 중학교 때 나름 서예부에서 특별활동을 하였다. 사물함도 없던 그 시절에 동아리 수업이 있는 수요일에는 먹과 벼루, 화선지, 붓, 서진을 챙겨서 무거운 가방을 낑낑대고 왔다 갔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글씨는 엉망이었지만 서예의 본고장인 전북의 피가 모름지기 흐르고 있었나 보다. 여기서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문자를 사용했을까? 한자문화권에 속한 고대 한반도에서는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한자가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 대에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중국의 천자를 직접 만나려고 하였으나, 우거왕이 중간에 교역을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가 기원전 109년으로, 적어도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한자를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문자의 기록은 어떻게 했을까? 국가지정문화유산인 창원 다호리유적 1호 무덤에서는 붓과 삭도가 발굴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다호리 1호는 발견 당시 논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물기를 머금은 논흙이 공기를 차단하여 무덤 안에서는 통나무로 만든 목관과 대나무 바구니가 부장된 상태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대나무로 짠 바구니 안에서 5점의 붓과 철로 제작한 삭도(削刀)가 출토되었으며, 이로써 다호리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한 유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중국 장화(張華)가 기록한 <박물지>에는 기원전 3세기 진(秦)나라 몽염(蒙恬)이 붓글씨용 붓을 처음 만든 것으로 전한다. 이후 기원후 105년에 채륜(蔡倫)이 종이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종이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대나무나 나무판자, 혹은 비단 같은 곳에 붓으로 문자기록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다호리유적에서 붓과 함께 출토된 삭도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 나무판 같은 곳에 글씨를 잘못 썼을 때 칼로 긁어내는 지우개(書刀)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우개로 사용된 삭도가 바로 전북혁신도시 완주 신풍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다호리유적이 삼한(三韓) 가운데 변한(弁韓) 초기의 대표유적이라면, 신풍유적은 마한(馬韓) 초기의 대표유적이다. 신풍유적은 다호리보다 시기가 앞서는 기원전 2세기경의 유적으로 신풍유적이 발굴된 전북혁신도시 일대는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철기가 출현한 곳이다. 그 최초의 철제품 가운데 삭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단, 다호리유적은 오랫동안 습지로 보존되어 붓이 남아 있었지만, 신풍유적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유기물질은 이미 다 썩어서 사라져버리고, 철로 만든 삭도만 남아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아직 신풍유적에서 출토된 삭도가 문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를 단정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우리나라에서 문자의 시작을 알려주는 최초의 유적이 전북혁신도시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실에는 이 삭도가 전시되어 있다. 길이가 20㎝ 남짓 되고, 겉에는 녹이 슬어서 실물을 보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유물이 앞으로 써내려갈 역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서예(書藝)의 본고장임을 자부하는 전북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한수영 고고문화유산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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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2 15:02

친일파의 생존법

저들의 생명력은 길다. 길고 집요하다. 그것이 그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고 시비, 선악의 구별도 내동댕이쳐버리는 본성, 그것이 뼈에 새겨져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외세가 나라를 침탈하는 난세의 국면에서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무엇이 옳은지와 무엇이 살길인지를 궁리하는 일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둘 사이를 아슬아슬 오가며 생존을 이어간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으면서도 식구들의 목숨을 건사하는 일, 그것이 난세의 민중들이 그 험한 세월을 견디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옳은 길만을 바라보고 재산도 가족도 초개같이 버릴 각오를 한 이들은 끝내 저항하는 독립운동가가 되었을 것이고, 오로지 무엇이 살길인지, 어떻게 해야 난세의 혼란을 틈타 한밑천 두둑이 챙길지를 고민한 자들은 친일파가 되어 호의호식 살아남았다. 동양적 사고의 중심에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일에는 네 가지 정도의 기준이 필요하다. 나보다 약한 존재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움을 아는 일, 겸손하고 양보할 줄 아는 것, 그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친일파들의 사는 방식에는 그 어느 하나도 부합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남을 짓밟고 대의명분을 어기면서까지 제 이익을 도모하는 일은 인간답지 못 한 일이요 나쁜 짓이다. 친일파의 뿌리는 바로 나쁜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의 길을 걸은 자들이 세상이 바로잡힌 뒤에 살아남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소한 자신의 무지와 잘못된 선택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깊이 은둔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는 저들에게 그런 성찰의 기회마저 제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저들의 재산과 알량한 경험을 새 나라를 세우는 근간으로 삼으며 저들을 지지하고 부추기는 길을 택했다. 약하고 가난하나 올곧게 산 이들에 대한 저들의 공포와 적개심을,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왜곡된 이념전쟁의 논리로 삼았고 그로 인해 무수한 학살이 벌어졌다. 그것이 저들이 그토록 추앙해 마지않는 이승만 시대의 진면목이다. 한동안 잠잠한 듯하던 친일파들이 다시 세상의 중심에서 분탕질을 일으키는 데에는 이전과는 다른 분명한 이유가 있다. 대다수의 기성 세대들이 분명히 정부수립일이라고 배우고 외웠던 1948년 8월 15일을, 그 시절의 언론이 이구동성으로 정부수립이라 쓰고 찬양하던 그 날을 두고, 건국절 운운하며 기를 쓰고 내세우려는 데에는 분명 새롭고 음험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뼛속까지 친일의 유전자를 이식받은 자들이 이 나라 권력의 중심에 선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식량 수탈과 병참기지화를 위해 건설한 철도며 공장을 두고 저들이 내린 시혜쯤으로 여겨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다. 그래서 식민 통치는 그 자체로 국제법상 정당한 것이었다며 진짜 독립투사들을 조롱하고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밀어 올리려는 것이다. 겉으로는 건국절 운운한 적 없다는 정부가 독립운동 단체들을 포함한 정부의 요직에 저들 이데올로그를 줄줄이 배치하고 있는 것은 장차 한일군사동맹까지를 염두에 둔 집요한 포석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은인자중하다가 그럴듯한 이론을 들고 나와서 다시 발호하는 친일파들의 본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이 갈수록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치장을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 무엇보다도 저들의 뿌리가 참으로 나쁜 사람임을 다시 확인하고 알리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곽병창(극작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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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6 15:27

K-music의 원소스인 판소리, 전용공간 마련으로 글로벌 대응성 강화해야

며칠 전 막을 내린 파리 올림픽은 도시의 지형지물을 활용한 파격적인 개막식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지구촌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동안 여느 올림픽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경기장 밖에서, 경기장을 벗어난 혁신적인 개막식을 펼친 것에 대해 혁명의 도시, 예술의 도시다운 면모를 발휘했다는 평이다. 이번 올림픽 개막식은 이른바 ‘파리 스타일’의 개막식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부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막식의 기저에는 파리와 프랑스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파리의 콘텐츠를 활용하여 그들의 역사, 문화, 스포츠, 가치지향을 서사로 엮어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취하고 싶은 내용을 영리하게 잘 포장하여 작품으로 승화한 것이다. 이번 개막식에서는 파리라는 도시 공간을 전면에 내세우며 하나하나 그 가치를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거대한 세계인들의 축제를 통해 프랑스가 가진 콘텐츠를 거대 작품에 집약하여 보여줌으로써 파리의 도시 공간을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전북, 전주라는 도시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전주는 전통문화예술을 생산·소비하는 지역으로 표상된다. 이는 사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선창극사(1940)에 수록된 89명의 판소리 명창 중 37명, 전·후기 8명창과 근대 5명창은 14명으로 전북 출신이 제일 많고 전북도가 지정한 판소리무형유산 보유자는 10명으로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이다. 전라감영, 전주통인청대사습, 전주권번, 전주국악원, 청학루로 이어온 판소리 교육은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전국고수대회를 개최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후 소리문화에 대한 도민의 가치 인식과 관심은 전북도립국악원 설립과 우진문화공간의 <판소리 다섯바탕의 멋>, 한벽문화관의 <해설이 있는 판소리>를 기획하여 소리꾼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 예술적 토대는 전주세계소리축제 개최와 전주판소리합창단을 창단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전주는 판소리를 중심으로 생산자, 패트런(patron), 소비자가 균형 있게 정주하고 있어 소리꾼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세대를 이어 가꾸어 온 판소리적 환경을 전주의 대표 문화예술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나아가 K-music의 산실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동시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판소리 전용 공연 공간 마련이 요구된다. 다른 지역에서는 판소리가 자연도태 되어 소리문화가 사라져버렸지만 전주 소리판은 처절한 생명력을 가지고 자생하며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고귀하고 숭고한 예술자본을 완전하게 정착시켜 더 이상 과거의 유산이 아닌 동시대인들에게 살아있는 소통 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이제는 특성화된 전용 공연 공간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전주에서는 소리꾼은 물론 소리에 진심인 팬덤 문화가 형성되어 있어 판소리적 생태계는 양호하다. 이러한 판소리적 자본이 세계적인 예술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글로벌 대응성을 강화한 전략이 필요하다. 판소리는 K-music의 원천소스이자 토종 유전자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다양한 음악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다. 지구촌이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국가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유문화의 경계가 와해되고 있다. 우리는 전통예술의 세계화·대중화를 외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유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을 때만 세계화는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전주는 판소리’라는 명제가 정합성을 획득하여 전주라는 도시 공간의 대표 문화로서 전 인류와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노복순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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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9 15:11

오롯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기를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2011년, 영화계의 유망주로 주목받던 신예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이웃집 문에 붙였던 쪽지다. 그 해,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안타깝게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예술계의 비극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은 예술인의 열악한 삶을 고발하며, 예술계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되었다. '최고은 법'으로 불리며, 이후 10년 넘게 수차례 개정을 거쳐 예술인 복지의 기틀을 어느 정도 마련했다. 하지만, 예술인들의 삶은 나아졌을까? 이 물음으로부터 글을 시작한다. 예술인복지법 시행 이후, 예술인 지원의 방식과 기준에 변화가 있었다. 예술인은 단순한 창작자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자로서 존재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는 헌법 제1조에 명시된 '국가는 예술가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과 합의의 결과다. 이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되면서 예술 노동과 예술인 삶을 지원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올해 예산은 5년 전보다 166% 증가한 1,067억 원. 예술활동준비금, 생활안정자금, 예술인 고용보험, 공공임대주택 지원 등이 그 대표적 사업들이다. 필자가 속한 기관에서도 많은 예술인이 중앙복지사업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그 결과, 약 6,100명이 예술인 활동증명을 완료했고, 올해 601명이 예술활동준비금 18억 300만원을 지원받았다. 이는 전북지역 예술인 활동증명 완료자 수 기준 약 10%에 해당하는 수치다. 높지 않은 비율이라 아쉽지만 그나마 이를 제외하고는 지역 예술인들이 혜택 볼 수 있는 사업은 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국토부와 협력하여 예술인들에게 주거∙창작공간을 지원하는 사업은 주로 서울 중심부에 공공임대주택이 위치해 있어 생활권이 지역인 예술인에게는 먼 이야기일 뿐이다. 육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자녀돌봄센터도 마찬가지다. 또한 예술인고용보험과 산재보험도 문화예술 용역 및 일거리와 연결되는 것을 고려할 때, 예술시장이 열악한 지역의 현실에서는 그 체감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지역 소외와 차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인복지사업에서도 나타나는 수도권 쏠림 현상으로 예술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청년예술가의 지역 유출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국가의 정책은 지역 곳곳으로 이어져야 하며, 예술인 복지정책 또한 예술인의 삶 곳곳에까지 맞닿아야 한다. 중앙과 지역, 현장과 사람, 일상으로 연결되는 범국가적 예술인 복지정책을 위해서는 지역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바로 중앙과 지역을 잇는 강력하고 활발한 협력적 연계망이다. 그리고 광역단위든 지역이든, 예술인 복지 기능과 역할을 위한 거점이 마련될 때, 중앙 정책이 지역 곳곳, 예술가의 삶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다. 지역 예술의 수요를 반영하지 못하는 예술인 복지정책 한계점에 대한 지역의 제안이다. 예술인들의 삶은 좀 나아졌을까? 지금도 예술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공공기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증하고 있을 그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란다. 비록 작고 습한 지하 작업실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을지라도, 오롯이 창작에 매진할 때, 무대와 관객을 압도하며 우리 삶과 사회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아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문화예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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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2 17:36

'파묘(破墓)'를 파다

근래에 천만 관객을 넘은 영화가 〈파묘〉이다. 이야깃거리도 흥미롭지만 고고학을 전공한 필자의 눈에는 무당, 굿, 목관 등의 다채로운 아이템들이 눈에 들어왔고, 영화를 보고난 후 마치 과거 속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은 무엇일까? 바로 무당이다. 영화 속 주인공 이화림(김고은)의 직업인 무당의 역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과 맞닿아 있다.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하고, 단군왕검은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의 군주이자 곧 왕이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물론 신화 속의 내용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수 천 년 동안 제사장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했음을 알 수 있다. 농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당시에는 비가 안 와도, 비가 많이 와도, 병에 걸려도, 혹은 죽은 조상을 위하거나, 죽음을 앞두고 내세를 위해서도 단군을 찾았을 것이다. 단군은 인간의 소원을 신에게 전달하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였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특정인만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제사장 단군이 신과 소통하는 모습은 흡사 영화 속에서 돼지를 재물로 바치고 이화림이 굿을 하는 장면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의식을 행할 때는 일반인이 가지기 어려운, 뭔가 신령한 도구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환웅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인간세상으로 내려올 때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천부인 3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권력을 상징하는 청동칼과 태양을 상징하는 청동거울, 신의 소리를 뜻하는 청동방울 이 3가지로 추측되고 있다. 이 천부인 3개가 바로 절대 권력과 신비로운 힘을 상징하는 희귀 아이템인 것이다. 또한 영화에서는 봉분을 파헤치자 목관이 등장하는데, 이 목관은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지금도 사용하는 나무관이 무엇이 대수겠냐만 기록이 적은 우리 역사를 복원하는데 목관의 출현은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관을 사용하기 전에는 땅에 바로 시신을 매장하기 때문에 부장품이 많이 없지만, 목관을 사용하면서 관 내부에 공간이 생기고 부장품이 증가한다. 부장품의 희소성이나 수량을 근거로 계층을 나누고, 계층이 다양해질수록 보다 발전된 사회로 해석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목관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용되는 시기에 청동거울과 청동칼, 청동방울과 같은 의례용 청동유물이 함께 발전한다는 점이며, 이는 곧 계층이 나뉘고, 권력자가 등장하는 고대국가의 시작, 즉 마한의 시작점인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롭게도 그 고대국가의 시작을 알려주는 목관과 청동유물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발굴된 지역이 바로 전북혁신도시이다. 전북혁신도시는 당시 고대국가의 수도 서울인 것이다. 2024년 영화 파묘에는 마한(馬韓)에 터전을 잡고 살아 온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조상들이 마한에서 백제로, 백제에서 후백제로, 후백제에서 조선으로 이어져 왔다. 쌍둥이도 세대차이가 나는 요즘이지만 목관의 역사, 무당의 역사가 2천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이 새삼 놀랍다. 더욱이 그 시작이 바로 우리 동네라는 점이. 보다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면 소중한 우리 것들이 차고 넘친다. 약간의 호기심만 있으면 누구든 고고학자가 되어 어디로든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 한수영 고고문화유산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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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5 15:47

참 나쁜 극장

유대인이면서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현재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온 일란 파페는 <이스라엘에 관한 열 가지 신화>에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불모의 사막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가짜 신화부터 통렬히 비판한다. 단순한 주장이 아니다. 역사가답게 그는 1917년의 발푸어선언을 전후한 시기의 모든 조약문, 선언, 협정문 등을 일일이 들어 증거로 삼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마을 500여 개를 짓뭉개고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쫓아내버린 1948년의 대재앙(Al Nakbah)은 모든 일의 서막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후 이스라엘이 저질러온 학살과 점령, 폭격, 장벽 세우기, 물과 전기마저 끊어버리는 가두기 정책 등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어온 고통, 공포, 처참한 일상에 대해 그는 매우 차분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숱한 증거와 증언을 통해 밝혀낸다. 그리고 이처럼 처참한 내부 식민지의 주민으로 차별과 불평등을 감내하며 살아가든지 아니면 죽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종족 절멸의 메시지가 이스라엘의 공공연한 정책임을 고발하고 있다. 한편 얼마 전 떠나간 이스라엘 대사는 이임 인터뷰에서, 불모의 사막 위에 건국한 이스라엘 역사를 자랑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희생은 매우 부수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라는 입장을 세련되게 설파하고 있다. 도대체 저 나라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세상 어느 누구도 하마스의 테러에 의한 작년 연말의 기습과 대량 살상, 납치를 옹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강심장도 그렇게 끌려간 이들이 무사히 구출되어 나오기를 바라지 않거나 그 일을 저지른 조직을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느냐에 대한 모두의 성찰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성찰은 역사적 진실에 대한 개안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눈앞에 벌어진 일에 분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 모든 일의 연원을 찾고 그동안의 과정을 통렬하게 반추해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가자에서 이스라엘이 퍼부어대는 일상의 폭격은 병원, 학교, 구호소를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몇 해 전 거기 얹혀 전해온 믿기 힘든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다. 폭격의 현장, 그 죽음의 도시에서 직선거리 몇 킬로 바깥의 언덕 위, 맥주를 마시며 이 광경을 즐기고 있던 한 무리의 이스라엘 청년들, 그들의 환호는 참 해맑고 숨김이 없었다. 저 가학적인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는 참 나쁜 극장과 관중들-. 그리고 다시 오늘, 우리는 가자의 비극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댓글을 바라보고 다시 절망한다. 저 비극을 끝낼 유일한 방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세상의 지도에서 없애는 것이라는, 저항할 여지를 없애는 길은 인종 청소밖에 없다는 무시무시한 주장이 인터넷 공간을 망령처럼 떠돈다. 저들이 기독교도가 아니기를 빈다. 원래 극장은 비극을 위한 공간이었다. 타인이 겪는 진퇴양난의 비극적 상황을 목도하면서 관중들은 전율하고 공포에 떨었으며 자기 삶을 깊이 반성했다. 그게 극장이 이룩해온 순기능이다. 사자에게 뜯기거나 동료들끼리 찔러 죽이는 검투 시합을 와인을 마시며 즐기던 극장과 그 문명은 결국 처절하게 망했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현장에서든 사이버공간에서든 저 비극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다. ‘온 세상이 가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고 온 세상이 가자를 지켜보는 서구를 지켜보고 있다. 서구의 도덕적 자살을 우려하면서~’ 프레데릭 로르동의 말이다. 어찌 서구뿐이랴? /곽병창(극작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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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9 15:06

전북문화의 세대 계승과 문화생태계 구축에 구심점 역할 기대

전북은 예로부터 전통예술의 대표적 생산지이자 공급지로 전승과 유통이 활발한 지역이다. 근대 시기 권번이 해체된 후에도 지역 유지들이 전주국악원을 설립하여 전통예술의 전승 활동을 지속해 왔고, 1960~70년대 라디오, TV 등 대중매체가 문화 전반을 잠식하였을 때도 문화 예술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전북의 이러한 문화예술적 기반은 전통 예인을 대거 배출하는 자양분이 되었고 나아가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이하 도립국악원) 설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올해로 개원 38주년을 맞은 도립국악원은 행정 관료의 운영에서 벗어나 국악전문가 수장 체제로 거듭나면서 국악계는 물론 도민들의 관심과 기대가 집중되고 있다. 또한 국악원 본원의 증개축으로 신청사 입주를 앞두고 있어 국악 연수, 국악 공연의 상설화 등 앞으로 국악의 전승과 생산 공간으로서도 이목을 받고 있다. 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은 8만6000여 명의 연수생 양성, 학술행사, 전통예인 구술 채록, 민속예술발굴총서 출간 등 국악교육과 연구로 국악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제고하며 국악의 저변확대에 기여해 왔다. 나아가 예술단은 지속적인 정기연주회(창극단(57회), 관현악단(50회), 무용단(32회))와 기획·상설연주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며 대표 예술단으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다. 이에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악가무 일체를 갖춘 제작환경을 구축하며 수준 높은 공연작품을 생산 유통하고 있어 국내외적으로 공연예술단체로서의 명성을 떨치고 있다. 전북도립국악원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1980~90년대 부흥기를 맞이했던 국악계는 현재 학령인구 감소와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영향으로 지방 대학의 국악과는 폐과와 통폐합을 거듭하고 있다. 작금의 시대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쓰는 사람들) 시대를 지나 생성형 AI가 산업생태계를 지배하는 AI사피엔스시대(AI를 신체의 일부처럼 쓰는 사람들)에 진입하고 있다. 이처럼 국악 교육을 통한 전문 인재 양성이 축소되고 가파르게 사회 구성원과 그들이 사용하는 생활 도구가 급변하고 있는 시기이다. 문화예술을 교육, 생산, 유통하고 있는 도립국악원도 문명의 교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신산업 구조의 패러다임 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전통을 고수하며 원천소스의 가치를 추구해야 할 것인지, 멀티유즈(multi use)의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인지, 동시대인들의 요구와 동시대의 문화 생산은 어떠한 점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인지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다. 최근 창극 <춘향>을 무대에 올려 관객들에게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받았다. 이 작품을 통해 앞으로 도립국악원의 행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수준 높은 전통 소리를 바탕으로 세련된 시청각적 요소를 구현하며 낯익음과 익숙함을 조화롭게 구성하여 동시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국악의 대중화와 저변확대에 가치를 두었다면 도립국악원은 이제부터는 전북의 문화 환경을 어떠한 양상으로 조성해 나갈지에 대한 촘촘한 밑그림이 요구된다. 또한 전북문화의 세대 계승과 느리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가치를 생산하는 이 시대의 문화 아이콘으로서의 역할과 기능 수행이 절실하다. 나아가 전북만의 특별한 문화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구심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노복순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노복순 실장은 한국음악을 중심으로 공연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의 현상을 바라보고 있는 국악평론가이자 연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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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2 15:16

하얀양옥집 문턱을 넘으면

“특권 의식을 내려놓고 도민들의 눈높이에 다가서기 위한 취지로 역대 도지사가 사용했던 관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도민에게 돌려주는 게 도리다.” 김관영지사의 뜻에 따라 도민들에게 높고 큰 성역이었던 관사가 철문을 떼어내고 담을 낮춰 도민들이 문턱을 드나들 수 있도록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지사 취임 2년만이고 이 집이 지어진지 53년 만이다. 1971년 준공한 2층 단독주택. 도민들에게 환원하겠다는 원칙은 정해졌지만, 콘텐츠는 무엇으로 할 것이며 어떤 방향성을 가질 것인지가 결정되기까지 상당한 고민의 과정이 있었다. 지역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의 역할과 한옥마을이란 관광지 안 장소로서 전북을 알릴 수 있는 복합적 기능을 담는다는 방향성에 의견이 모아졌고 결국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에게 어렵고도 무거운, 그래도 흥미롭고 해볼 만한 숙제가 던져졌다. 곧 바로 관사조성 TF가 꾸려졌다. 구도심에 위치한 타지역 사례에 비해 한옥마을 관광지 안에 위치하고 크지 않은 아기자기한 사이즈인 점을 최대 장점으로 살리는 게 포인트. 내부에서 이 고민을 이어가는 동안 외부의 도움을 받아 이 집의 이름이 찾기로 했다. 촘촘한 공모를 거쳐 “하얀 양옥집”이란 타이틀을 얻었다. 알고 보니 예전부터 동네 주민들이 불렀던 ‘하얀집’, ‘양옥집’의 새로운 버전이다. 과거의 이름이 50년이 흐른 후 오늘의 새 이름이 된 것이다. 관사를 도민에게 되돌려주겠다는 본래의 취지와도 일맥상통한다. 게다가 건물의 역사성과 미학, 사람들의 기억과 구술이 한 장소의 이름을 짖는 기준이 된다는 전문가의 의견과도 딱 맞아 떨어지는 걸 보니 정말 제격인 이름이다. 집을 보면 집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는데 1, 2층 합쳐 100평이 채 안 되는 이 곳에 전북의 컬러를 어떻게 담을까? 먼저 콘텐츠 구성의 원칙을 정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어느 누구나의 곳”이어야 한다는 것. 이 점은 처음부터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가장 중요하게 꼽는 점이다. 도민 대신 “이웃”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하고 이웃 100명을 모았다. 책을 매개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인생을 공유하는 방으로 여러 이웃들의 인생책이 있는 곳이다. 세평 남짓의 제일 작은 방이지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 방문객들이 가장 좋아하고 오래 머무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 곳 “100인의 서재”가 하얀양옥집의 철학을 대표한다. 공간 구성의 가장 핵심키워드는 ‘조화’다. 한옥마을 안 양옥집이라는 이질적 충돌을 “양옥집 안 한옥” 콘셉트로 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그래서 한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한지, 창살, 원목 등을 주요 소재로 사용했고 자개머릿장을 2층 메인 자리에 놓은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TF 구성 후 두 달여가 지나고 ‘하얀양옥집’이 문을 열었다. 지역 청년들의 <들턱 전(展)>으로 집들이를 마쳤고 지금은 우리가 사는 지역, 동네를 스케치로 만날 수 있는 전시가 한창 진행 중이다. “문턱을 넘어 첫 발걸음이 닿는 이 곳은 늘 새로운 일로 분주합니다. 과거, 휴식과 담소의 공간이었던 응접실에 이제는 작품 한 점을 걸고, 라디오와 TV 소리 대신 예술가의 연주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설레는 마음으로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늘 멋진 무언가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하얀양옥집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이 글처럼 예술이 있고 사람으로 북적이는 공간이길, 문턱을 넘을 때마다 설레이게 하는 것이 우리 지역의 예술이길 바란다. /임진아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 문화예술본부장 △임진아 본부장은 전북대학교에서 가구디자인을 전공하고 미술관 큐레이터, 전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업무에 이어 2016년부터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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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5 15:04

돌도끼도 자산이다.

아마 경기도 연천군은 낯설어도 전곡리 구석기유적은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 학비를 마련하려고 군에 입대한 그렉 보웬은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던 중, 1978년 한탄강변에서 석기 몇 점을 줍게 되고, 이 석기가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로 밝혀지면서 세계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는 대사건이 되었다. 전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문화는 날을 한쪽에서만 가공한 찍개문화, 양쪽에서 날을 떼어내 좌우와 앞뒷면이 대칭을 이루는 주먹도끼문화로 구분된다. 마치 찍개가 커터칼이면 주먹도끼는 맥가이버칼일 정도로 쓰임새가 다양하다. 프랑스 생 아슐유적에서 발견되어 아슐리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미국 하버드대학의 고고학자인 모비우스는 주먹도끼가 인도의 서쪽인 아프리카와 유럽에서만 확인되자 인도를 경계로 모비우스라인을 설정한다. 이는 곧 구석기문화 이원론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유럽이나 아프리카에 살았던 인류가 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가미된 시각이며, 당시 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인도 동쪽인 전곡리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됨에 따라 그 학설이 깨지게 된 것이다. 전곡리 유적의 발견은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3만 년 전보다 오래된 유적이 없었는데, 후지무라 신이치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1980년대부터 약 20여 년 동안 활동하면서 일본의 역사가 우리나라와 같이 70만 년 전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후지무라는 일본 내에서 신의 손으로 불리게 되며, 그가 조사한 유적은 국가 사적이 되고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다. 그러던 2000년, 한 신문사 기자의 몰래카메라로 석기를 땅 속에 묻어 놓고 나중에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 찾아낸 것처럼 조작한 것이 만천하에 공개된다. 후지무라 조작 사건은 일본의 맹목적 국가주의와도 연관되어 있지만, 전곡리유적에 대한 강박관념이 작용한 결과이다. 이처럼 전곡리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구석기 유적이고, 그 유적을 대표하는 유물이 바로 주먹도끼이다. 그 주먹도끼가 우리지역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남고창IC 자리에서 확인된 고창 고수면 증산유적과 익산 춘포면 쌍정리유적, 전북혁신도시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주먹도끼가 발굴되었다. 우리지역의 구석기문화는 임실 하가유적에서 정점을 찍는다. 섬진강 최상류에 위치한 하가유적은 강이 휘감아 도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전곡리와 입지가 매우 유사하다.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하가유적의 석기제작 기술은 섬진강을 따라 일본까지 전해진다. 당시는 빙하기로 해수면이 낮아 서해는 육지로 이어져 있었지만, 하가유적에서 일본까지 가는 길은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야 한다. 원거리 교류망을 형성한 하가 구석기인들의 기술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올해 5월부터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문화재가 국가유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문화재(文化財)는 물건이나 재화적 의미가 강한 반면, 문화유산(文化遺産)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자산으로 가치를 더하자는 의미이다. 주먹도끼 한 점이 계기가 되어 연천군이 세계적인 구석기유적의 보고가 되고, 30여 년 이상 이어진 구석기 축제가 연천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 되었다. 아쉽게도 우리 지역에서 주먹도끼가 나온 유적은 도로가 나거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다행히도 임실 하가유적은 지금도 구석기시대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전곡리보다는 늦었지만 하가 구석기인의 문화유산을 전북특별자치도의 문화자산으로 가꾸어야 한다. / 한수영 고고문화유산연구원 원장 △한수영 원장은 전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환기의 분묘와 매장>(공저)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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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8 15:13

풍선 날리기, 작란(作亂) 또는 전쟁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띄워 올리는 일은 그 행위만으로도 낭만적이다. 타이완 시골 마을 지우펀의 풍등처럼-. 띄우는 이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풍등이 저물어가는 금빛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를 때 우리는 환호작약한다. 거기 쓰인 글귀가 ‘선영아 사랑해’든, ‘엄마 아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요’든 그걸 띄워 올리는 마음들이 두루 간절하고 아름답기에 나랑 별 관련 없는 풍등에도 같이 손뼉 치며 기뻐한다. 이래저래 풍선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맨몸으로는 지상에서 오 미터도 못 떠오르는 인간의 유한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낭만적 소품임에 틀림이 없다. 반면에 이런 풍선은 어떤가? 오늘도 어김없이 재난 문자가 온다. “00시 00분경 00지역 상공에서 북한에서 날려보낸 오물 풍선이 포착되었습니다. 야외활동 간 적재물 낙하에 유의하시고 발견 시 내용물은 열어보지 마시고 가까운 군부대나 경찰관서에 신고하시고-.” 말 그대로 재난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풍선을 들고 나라와 나라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희한한 일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다. 한쪽은 위대한 공화국 이름으로 한쪽은 풍요의 상징 자유대한의 이름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아름다운 한반도의 밤하늘을 향해 밤도깨비 두상처럼 괴이한 풍선을 날려 보내며 그들끼리 박수를 친다. 선진국 문턱에 다 왔다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도대체 이 유치하고 졸렬하기 그지없는 풍선질을 얼마나 더 지켜봐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대체 낭만적이지도, 랑만적이지도 않다. 전략으로도 전술로도 그다지 효과적일 리 없다. 그저 네가 하니 나도 한다는 단순한 발상, 네가 먼저 멈추기 전엔 언제까지나 계속한다는 억지 떼쓰기에 다름 아닌 짓이다. 저쪽이 담아 보내는 건 오물에 양말짝에 담배꽁초요, 이쪽이 보내는 것은 상대방 vip의 포르노 합성사진, 드라마, 가요가 담긴 유에스비란다. 이런 일로 상대방 접경지역의 주민들 사이에 자기 정권에 대한 저항정신이 싹트고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심이 사무치게 치밀어 오른다면야 반쯤은 효과가 있다 할까? 문제는 하늘이 무너져도 그럴 리 없다는 사실 아닐까? 그렇게 자유대한을 동경하게 하고 싶으면 전면적인 개방정책을 펼쳐서 남한의 드라마며 가요가 북한 주민의 일상을 헤집게 할 궁리를 하는 게 훨씬 빠른 길 아닐까? 적개심과 조급함에 사로잡힌 몇몇 탈북자들이 이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저 불장난이거나 아니면 소동을 만들어 주목받으려는 작란(作亂)에 지나지 않는다. 장난이거나 작란이거나 그것이 총질로 이어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들어가고 마는 것을 숱한 전쟁사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끔찍한 일인가? “조카는 폐결핵으로 죽어가는데, 이래 가지구 약이나 제대로 들어가갔네? 내레 다시 묻갔어. 도대체 이거이 누구를 위해서 보내는 거이가?” 얼마 전 막을 내린 어떤 연극에서 한 탈북자가 풍선 날리기를 막으며 애타게 호소하는 대목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풍선이란 말인가? 제발 멈추자. 이제 먹고 살 만한 나라, 체면과 자존심도 좀 챙길 때가 된 나라가 한발 양보하고 먼저 멈추자. 그게 그리 어려운가? 영 멈출 수 없다면, 그 안에 몇 안 남은 이산가족들의 편지라도 넣어보면 어떨까? 빛바랜 가족사진이라도, 눈물 젖은 손수건이라도 넣어 보내면 어떨까? 꿈인 듯 생시인 듯 답장이 오지는 않을까? 유치한 장난에 하도 지친 끝에 해보는 공허한 상상이다. /곽병창 극작가∙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곽병창 교수는 창작극회 창작소극장 대표·전주시립극단 무대감독·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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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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