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과 더불어 봄 노래가 한창이다. 화사한 봄은 우리 마음을 꽃처럼 피워낸다. 봄의 낭만에 취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봄을 노래하고 시구를 떠올리며 더욱 낭만적이 되는 듯싶다.
전라북도 정읍에 살았던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은 요즘 시절에 딱 맞게 ‘봄을 맞아 경치를 구경하고 즐기며 하는 노래’라는 의미의 ‘상춘곡’(賞春曲)을 지었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歌辭) 작품으로 그가 벼슬을 사임한 뒤 처가가 있는 태인으로 내려와 어떤 마음가짐과 생각으로 만년을 지냈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
가사문학은 지난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대중적인 시 형식이었다. 고려 시대 후기에 발생하여 조선시대 초기 사대부 계층에 의해 확고한 문학 양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행(行)에 제한을 두지 않는 자유로운 연속체 율문(律文) 형식과 폭넓은 개방성 때문에 양반은 물론 승려, 부녀자, 중인과 서민 등 모든 계층이 참여했던 민족의 문학이었다. 가사문학에는 우리 조상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정신이 투영되어 있다.
紅塵(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生涯(생애) 엇더한고,
(세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고?)
녯 사람 風流(풍류)랄 미찰가 맛 미찰가.
(옛 사람의 풍류에 내가 미칠만한가? 못 미칠까?)
天地間(천지간) 男子(남자) 몸이 날만한 이 하건마난,
(천지간의 남자 몸이 나만한 이 많건마는,)
山林(산림)에 뭇쳐 이셔 至樂(지락)을 마랄 것가.
(산림에 묻혀 있어서 즐거움을 모르는가?)
數間茅屋(수간 모옥)을 碧溪水(벽계수) 앏픠 두고,
(작은 초가를 시냇물 앞에 두고,)
松竹(송죽) 鬱鬱裏(울울리)예 風月主人(풍월 주인) 되어셔라.
(소나무와 대나무 울창한 데에 풍월주인이 되었구나.)
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엊그제 겨울을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桃花杏花(도화 행화)난 夕陽裏(석양리)예 퓌여 잇고,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석양 속에 피어있고,)
綠楊芳草(녹양 방초)난 細雨中(세우 중)에 프르도다.
(푸른 버들과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
-불우헌집(1786) 제2권에 실린 정극인의 ‘상춘곡’ 중 일부
당시의 가사문학을 보면 선조들이 우리 주변의 자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선명하게 알 수 있다. 동양적 사상에 의한 자연은 인간과 조화를 이루며 ‘곁에 두고 즐기는’ 친근한 대상이었다. 특히 자연을 삶의 벗으로 여기고 동경하는 다른 가사 작품들이 항상 임금의 은혜나 그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토로한 것에 비해 상춘곡은 그러한 상투적인 내용이 없어 더욱 특별하다.
이는 그가 이미 벼슬살이를 마친 후에 창작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관직에 대한 욕심 없이 순수하게 안빈지족(安貧知足)의 삶을 즐기는 그의 마음이 잘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호를 딴 ‘불우헌’(不憂軒)이란 집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향리의 자제들에게 협동하고 예의를 갖출 것을 가르친 것이 ‘태인 고현동 향약’(泰仁古縣洞鄕約)’의 시초가 되었고,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향약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예안 향약보다도 81년이 앞섰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행적을 임금 성종이 치하를 하자 정극인은 송축하는 의미로 ‘불우헌가’와 ‘불우헌곡’을 지었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가사는 불우헌집에 남겨있고, 현재는 무성서원에 신라 말 태수로 부임했던 최치원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정극인의 가사 작품처럼 지금까지 전해오는 노래는 문학이 되고 당시 조상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있는 역사의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정극인이 살았던 정읍에는 가사문학 훨씬 이전의 유명한 노래 한편이 더 전해진다. ‘정읍사’(井邑詞)가 바로 그것이다. 작자와 연대 모두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통일신라 경덕왕 이후 옛 백제 지방의 노래로 짐작되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백제 가요’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멀리 멀리 비춰 주소서)
어긔야 어강됴리(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저자에 가 계신가요)
어긔야 즌대를 드대욜셰라(아, 위험한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긔야 어강됴리(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어느 곳에나 다 내려놓고 오시어요)
어긔야 내 가논대 졈그랄셰라(아, 내 님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어긔야 어강됴리(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아으 다롱디리)
-악학궤범에 실린 ‘정읍사’ 전문
당시 정읍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달에게 남편의 안녕을 빌며 밤길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낸 노래이다. 조선시대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정읍사의 노래와 망부석을 연결하여,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던 언덕에 망부석(望夫石)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춘곡에 담겼던 정극인의 순수한 마음처럼, 이 노래에는 하염없이 님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상대방을 향한 원망을 하지 않고 오로지 걱정과 관심으로 일관해 그 마음이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1493년에 출간된 악학궤범에 실리기까지 무려 700년 이상을 구전으로 전해졌다고 하니, 그 그리움과 사랑이 전해지기까지 세월에 쌓인 마음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눈과 마음을 돌려 우리 곁을 돌아보면, 꽃송이 채로 붉게 떨어져 땅 위에서 아프게 또 한 번 피어나는 동백꽃은 남편을 그리는 그 여인의 마음을 닮아있다. 그리고 화사한 봄꽃과 더불어 꽃놀이를 즐기는 모습에선 옛 선조들의 풍류가 느껴진다. 복잡한 시류와 바쁜 일상을 지내오며 우리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미처 생각하고 느끼지 못한 채 지나치는 순간들이 많다. 봄이 건네주는 봄바람 꽃바람에 우리 마음을 담아보며 봄날이 가기 전에 지금 흘러나오는 봄 노래라도 따라 불러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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