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연두 빛 연정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버드나무의 다정한 나부낌을 바라보니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리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란 <고향의 봄> 노랫말이 절로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봄을 상징하는 나무로 버드나무를 손꼽고 봄의 색을 버드나무의 한자어를 사용하여 유색(柳色)이라고도 한다.
버드나무의 옛 정취는 고창의 무장읍성을 그려낸 보물 지도와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으며, 다양한 시화와 문헌 등에 주요 소재로 표현되었다. 버드나무를 심은 오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년) 3월(음력) 궁궐 남쪽에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고 기슭에 버들을 심었다는 등이 남아있다.
오랜 세월 함께한 버드나무는 우리나라에 40여 종이 있는데, 버들강아지인 갯버들과 능수버들, 수양버들 등 종류가 다양하다. 물을 좋아해 주로 물가에 많이 자라는데 하늘거리며 춤추는 버드나무는 대부분 능수버들이다. 수양버들은 중국이 고향으로 수나라의 양제가 양자강에 대운하를 건설할 때 심어 그 이름이 유래된 나무로 우리 주변에서는 흔치 않다. 그 둘의 구분은 어린 가지가 적자색이면 수양버들 녹황색이면 능수버들로 구분한다는데 쉽지 않다.
버드나무의 하늘거리는 모습은 여인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였는데, 가지가 가는 버들을 세류(細柳)라 하며 여인의 가는 허리를 유요(柳腰)라 했다. 버들 같은 눈썹을 유미(柳眉)라 하며 “미인의 눈썹은 새로 핀 버들잎 같다”고 표현했다. 버드나무는 여인과 더불어 이별의 징표로도 두루 쓰였는데, 버들의 ‘유(柳)’와 머물게 하는 ‘유(留)’와 음이 같아서 버드나무 가지를 건네는 것은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뜻이 담겼다 한다.
또한, “버들은 가지를 꺾어 눕혀 심거나 거꾸로 심어도 잘 자란다”란 말이 있다. 하여 버드나무에 새잎이 돋으면 나를 생각해 달라는 의미와 이른 봄에 가장 먼저 싹이 피니 가장 일찍 돌아오라는 당부도 담겨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지에 새잎이 돋아나 금세 무성해지는 왕성한 생명력에 빗대어 떠나는 이의 강건함과 안녕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도 담았다 한다.
버드나무의 생명력은 해열과 진통에 효과가 탁월한 천연 약재로 효능이 입증되었는데, 기원전부터 진통제로 히포크라테스가 버들잎을 사용했으며 아스피린의 주성분도 버들잎에서 추출했다. 『동의보감』에도 풍을 없애고 소화에 좋고 충치와 아픔을 줄이는 등 만병통치 격인 약효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버드나무 속껍질을 달인 물로 양치질을 하는 양치도 버드나무 가지인 양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나그네에게 물을 건네는 바가지에 버들잎을 따 넣어 후후 불어 물을 마시라며 건넸던 낭만적인 풍경도, 천천히 숨을 고르라며 마음을 챙겨주고 몸까지 두루 헤아린 것은 아닐까 싶다. 그 버들잎을 띄운 물 한 바가지가 부부의 연으로 이어진 이야기는 왕건과 신혜왕후 류(柳)씨의 전설로 유명하고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의 어머니도 유화(柳花)부인으로 버드나무와 인연이 깊다.
여느 가녀린 버드나무와 달리 ‘버들 중의 왕’이라 이름 붙은 왕버들은 아름드리나무이다. 수백 년을 살 수 있는 왕버들은 물가의 습한 기운에 둥치가 잘 썩어 대부분 커다란 구멍이 있다. 야사에는 기생집에서 잠자던 수양대군이 갑자기 들이닥친 기둥서방을 피해 도망치다 커다란 버드나무 구멍에 몸을 숨겨 화를 면한 이야기가 있다. 수양대군의 이름을 따 수양버들이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가 몸을 숨길 정도로 구멍이 뚫린 나무는 수양버들이 아니라 왕버들일 것이다.
왕버들에 많이 있는 인의 성분으로 밤에 도깨비불이 번쩍여 귀신이 사는 버들이라 하여 귀류(鬼柳)로도 불렸는데, 반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문간에 달아두면 사악한 귀신을 물릴 칠 수 있다 하였다. 오랜 세월 온갖 풍상을 함께한 노거수로 마을의 신목으로 신성시되는 왕버들 중에는 민속학적 생물학적 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그중 <김제 종덕리 왕버들>은 청와대에 걸린 그림 속의 주인공이었다.
청와대 본관 1층 회랑의 동쪽 벽에 손장섭 화백의 작품 <김제왕버들>로 2006년 4월 다른 그림에게 자리를 내주기까지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했다.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원평천 옆 <김제 종덕리 왕버들>은 올해도 새잎을 피워내며 까치를 비롯한 새들에게 가지를 내어주고 몇 년 전부터는 천연기념물인 후루티에게 구멍도 내주고 있다.
수형이 우람하고 아름다운 <김제 종덕리 왕버들>은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 대략 300년 정도로 추정되는 나무로 마을의 정자목이자 신목으로 신성시되는 나무이다. 1980년 중반까지 매년 삼짇날과 칠월칠석에 마을에서 제를 지내던 풍습이 전해졌지만, 지금은 지낼 사람이 없어 서로를 보듬으며 켜켜이 이어온 일들이 마을의 오랜 기억으로만 남았다.
김소월의 시구처럼 실버들을 천 만사 늘여 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 못하겠지만, 조금 숨통 트인 일상을 추스르며 오랜 나무가 아낌없이 건네는 힘을 받고 신록의 계절을 맞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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