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피우고 맑게 앉아 시 읊으며 머리를 갸우뚱하니, 한 방이 비고 밝은데, 작기가 배[舟] 같네. 가을빛을 가장 사랑하여 지게문 열어 들이고, 다시 산 그림자 맞아들여 온 뜰에 머물게 하네….” 고려 말 문인 목은 이색(1328-1396)이 마니산 참성단(塹星壇)에 대하여 읊은 시구이다. 그곳 참성단에서 채화(菜火)한 전국체육대회의 성화(聖火)가 익산에서 타오르고 있다.
전라도 정도 천년이 되는 시기에 익산을 중심으로 전북 일대에서 열리는 전국체육대회는 그 의미가 크다. 전국체육대회는 매년 가을에 열리는 전국 규모의 종합경기대회로 큰 축제이다.
우리나라의 전국체육대회는 1920년 7월 조선체육회가 창립되고 그해 11월 열린 ‘전 조선 야구대회’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초기에는 단일 종목별 경기를 개최하다가 1934년 조선체육회 창립 15주년을 기념하면서 종합대회의 형태로 열렸지만 1938년 7월 일본인 체육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조선체육회가 통합되면서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다 해방이 되면서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란 주제로 1945년 제26회 전국체육대회로 부활하게 된다. 이후 1947년 ‘조선올림픽위원회’가 설립되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하고 이듬해 대한체육회 및 대한올림픽위원회(KOC)로 개칭하였고 자유롭게 참가했던 방식을 시도별 대항제로 바꾸면서 지금의 체제가 만들어졌다. 1920년 첫 경기가 치러진 이후 99회 차 전국체전이 우리 고장에서 개최되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다. 큰 행사인 만큼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아 주요 개최지인 익산은 분위기가 고조되고 흥이 넘치고 있다. 하지만 전국체전은 개최지뿐만이 아니라 참가하는 선수는 물론이고 올림픽의 정신으로 오랜 인류 역사를 잇는 큰 축제임을 상기해야 한다.
전국체육대회가 열리는 기간 내내 메인 경기장인 익산종합운동장을 밝히는 성화도 우리나라 전국체육대회의 역사를 이으며 전통을 따랐다. 전국체육대회는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서 채화된 성화를 봉송하며 개최지의 성화대에 점화하는 의식으로 시작된다. 성화 채화의 전통은 1956년 제37회 대회 때부터 민족의 역사가 깃든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의 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1872년 제작된 강화부의 지방지도를 살펴보면 마니산 정상에 단군시대 이래 제사를 지내왔다는 참성단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는 정족산성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었던 정족산 사고 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에는 참성단과 단군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사단 참성단은 마니산 꼭대기에 있다. 돌을 모아 쌓았는데, 단의 높이는 10척이며, 위는 모가 나고 아래는 둥근데, 위는 사면이 각각 6척 6촌이요, 아래 둥근 것은 각각 15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본조에서 전조(前朝)의 예전 방식대로 이 사단에서 별에 제사 지냈는데, 아래에 재궁(齋宮)이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참성단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속 단군신화에 다다른다.
이렇듯 오랜 세월 단군에게 제사를 올린 ‘참성단’에서 불꽃을 받아온 전국체육대회의 성화와 백제 문명이 융숭하게 깃든 ‘미륵사지’에서 채화된 전국장애인체육대회의 불꽃은 대회 기간 내내 성화대를 밝힌다. 전국체육대회의 성화는 올림픽의 성화와 맥락을 함께한다. 올림픽의 성화는 고대 올림픽 경기 기간 중,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낼 때 신성한 불꽃을 밝히며 경기를 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 경기를 신에게 봉납하는 의미로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 엘리스 주의 헤라 신전에서 태양의 빛을 받아 채화한다. 그와 같은 전통을 지켜 “성화를 밝힌다.”는 것은 “고대 올림픽 정신의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연관하여 하늘의 불을 훔쳐 인류에게 전달한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왕 제우스 몰래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어준 죄로 매일 새들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이다. 그로 인해 인간들은 문명을 밝히게 되었고, 프로메테우스 신화로부터 불은 인류의 이성, 계몽, 창조적 능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또한, 신성한 불꽃을 밝히며 경기를 하고 그 불이 전 인류를 비추는 올림픽의 정신과도 연결되었다. 올림픽은 신에게 제사를 올린 종교행사로 시작해 전쟁을 위한 훈련의 성격을 띠며 고대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의 대표선수들이 겨룬 올림피아 경기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776년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엘리스에서 헤라클레스가 처음 개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그보다도 1세기 전부터 올림피아에서 4년마다 한 번씩 열렸다고 한다.
당시 남자들이 모두 옷을 벗은 채 경기에 임했고, 여자는 참가는 물론 관전조차 금지됐었다고 한다. 최초의 경기 종목은 단거리 달리기만 있었지만 점차 중거리 달리기, 장거리 달리기가 포함되었고 이후 레슬링,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마차경주, 권투 등이 더해졌다. 그 흔적은 그리스의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 안에서 겨루기 대회로 보이는 포즈를 취하고 경기를 벌이는 근육질의 모습으로 남아 그 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올림픽을 거슬러 올라가 서구의 문명과 정신의 밑거름이 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당시 그들이 남겨놓은 철학과 예술, 문학과 건축 등의 유산은 오늘날 서구문물 거의 모든 분야의 원형으로 손꼽히고 있고 그리스신들의 이야기는 그 특별함을 더해준다.
올해 열리는 전국체육대회와 전국장애인체육대회는 지금까지 개별 봉송되었던 방식과 달리 개천절인 10월 3일 같은 날 채화하여 동시에 봉송되었다. 전통적으로 채화를 해온 참성단은 우리 민족의 시원이 되는 단군신화와 민족의 염원을 담은 장소이고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 2년이 되던 601년에 창건되어 백제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우며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곳이다.
전국체육대회의 개폐회식이 열리는 익산종합운동장의 주 무대와 성화대도 어김없이 그 의미를 이어받아 미륵사지 석탑을 형상화했다. 성화대의 모습은 하늘을 받든 두 손이 모여져 미륵사지 선형을 나타내고 보석 같은 불꽃을 피워 내도록 디자인되었다. 아름다운 가을날 천년의 문을 활짝 열며 백제 무왕이 품었던 큰 꿈도 헤아려 본다. 그 미륵사지를 창건하며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 간절한 마음도 불꽃으로 화하여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전북을 밝히고 한반도를 환히 비추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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