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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일기를 통해 100년 전 전주를 재조명

1916년 6월 4일 최씨서재가 기록된 일기장
1916년 6월 4일 최씨서재가 기록된 일기장

조그만 일기장 속에는 1916년 전주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한벽루와 다가산의 풍광을 가감 없이 기술하고 있다. 일기의 주인공은 진안 용담현에서 태어나 20살인 1916년에 전주농업학교에 입학한 이상래(1896~1979)학생이다. 일찍 진안 주천의 사립화동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에 오니 문화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휴일이면 명승지인 오목대, 덕진운동장, 한벽당, 다가정 등을 친구들과 다니면서 상세한 기록을 남긴다.

1916년 전주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그 당시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간혹 사진이나 문서를 통하여 사료를 접하기도 하지만, 출처가 분명하지 않아 활용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전주시에서는 전주 관련 기록물을 통한 전주정신을 찾기 위하여, 각종 사진, 문서, 박물류 등(1910년 이후)을 2017년부터 수집공모하게 된다. 그래서 2017년도 제1회 전주시기록물공모전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전주시민의 많은 호응이 있었고 여기서 선친일기는 내용의 소중함을 인정받아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일기는 양도 많지 않고 기간도 1916년 5월부터 8월까지 약 3개월만 기록하고 있다. 지질도 좋지 않다. 만지면 부서지는 갱지에 가는 세필로 썼다. 그리고 6·25사변으로 피난을 다니면서 일기장의 앞뒤가 다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이러한 보잘 것 없는 것이 어떻게 자료를 인정받게 되었을까. 바로 선친일기 속에는 전주의 자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학교생활도 군사교육이나 다름없는 교육이라, 모든 기록에 한글을 쓰면 제재를 당하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국한문과 일본어를 섞여 쓴 것이다. 특히 국어를 쓸 때도 語라 쓰고 있어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다 보면 임금이 나라안에 있지 못하고 나라 밖에 있는 것을 이체자로 쓴 것이다.

선친일기 속에는 한벽당에 있는 서당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에 와서 서당 얘기를 하면 먼 과거의 얘기 갖지만 이 서당은 금재 최병심(1874~1957)이 타계하기 전까지 운영되었다. 일기 속에는 서당에 관한 얘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1916년 6월 4일 일기를 옮겨 본다.

“돌아오는 길에 한벽루 근처에 있는 최씨의 서재에 들러 구경하였다.

 

1910년 전주성외 동남부와 전주천 전주향교 뒤로 최씨서당(금재 최병심).
1910년 전주성외 동남부와 전주천 전주향교 뒤로 최씨서당(금재 최병심).

사방인 대밭인 가운데 2-3동의 초가가 있고 동자 5,6명과 갓을 쓴 학동 6,7명이 소매가 넓은 도복을 입고 단정히 앉아 독서하고 마당에는 해당화 백작약 등의 꽃이 교태를 부리며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죽간(竹竿) 한 가지를 주인에게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일기 속에서 말한 최씨서재는 금재 최병심의 서당이다. 바로 이곳은 한벽당 옆 최담유허비가 있는 교동 산 7-9번지이다. 이곳은 사방이 대나무밭이였고 초가집이 3채 있었다고 금재의 손자 최동호씨도 증언한다. 너무나 일기장과 일치한다. 서당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으며 바로 옆에 흐르는 옥류천은 물이 맑아 이 물로 콩나물을 길렀다고 전한다. 바로 이곳은 또 전라도의 최고의 명필인 이삼만이 살던 집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바위에 암각서가 많이 현존하는데 바로 이것이 이삼만의 글씨이다.

금재 최병심은 이곳에 살면서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는 반드시 광복된다는 의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교육의 목표가 뚜렷했다. 한 사람이라도 독립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갓을 쓰고 학생들에게 도복을 입혀 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전라선철도를 설계할 때 한벽당으로 설계하여 철거의 위기에 처하자 금재는 끝까지 투쟁하여 한벽굴을 뚫게 한 장본인이다.

과거 학계에서는 왕조실록이나 관에서 발행한 고문서는 역사성을 인정하지만, 지역의 역사는 향토사로 인정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 전주 분조를 기록한 죽계일기나 고종 때 완산동에 살았던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공모에 선정된 선친일기는 비록 3개월의 짧은 기록이지만 전주시사에도 기록되지 않는 전주-이리간 경편철도 기록이 나오고, 덕진공원의 운동장에서 전주구락부 주최로 전국자전거대회를 개최하였다는 것이다.

 

1910년 다가산 아래  다가정.
1910년 다가산 아래 다가정.

흔히 사람들은 ‘사사로운 일기가 역사가 될 수도 없다’라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역사의 한토막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친일기를 통해 1916년도 전주를 살피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고, 소중한 자료를 사장하지 않고 후손들이 번역하여 전주시민에게 제공까지 하고 있다.

이 선친일기는 출품자의 관점에서 이름을 붙여졌지만 이제는 전주시민의 일기가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일기를 쓴 이상래의 호를 따서 시강일기로 불렀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일기 속에는 전주의 많은 인류학적 문화코드가 숨겨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가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예를 들어 다가정에서 제1보통학교와 제 2보통학교가 운동회가 벌어지는 광경이 있다. 이 사실을 통하여 두 학교가 왜 본 학교에서 운동회를 안 하고 다가산 아래에 와서 연합운동회를 했는가도 연구해 봐야 할 것이다.

시강일기에는 전주에서 벌어지는 사월 초팔일의 관등행사, 삼천동의 농장견학, 누에 키우기 실습, 전주단오절 행사 등을 기술하고 있어 좀 더 세심한 연구가 필요 할 것이다.

 

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주문화원 사무국장)
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주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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