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tuin der lusten)> 속 에덴동산을 가리켜 오늘날의 정원의 모습이라 한다. 아마도 당시 기독교 즉, 성서 속 에덴동산이 인간의 이상향을 뜻하며, 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상향의 아름다움을 통한 심리적인 안정감을 전해주고자 했던 노력이었으리라. 이런 예술적인 노력들은 오늘날 단순한 도구적 관점을 벗어나, ‘정원’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정서적 치유를 위한 본래적 가치를 지닌 인간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세속적인>
Jacope Bonfadio(이탈리아, 역사가)는 자연 그 자체를 신의 영역으로, 인간의 영역은 자연 속 예술에 의해 향상된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이렇듯 자연(Nature)의 대립어로써 그 어원을 같이 하는 예술(Art)을 도구로 탄생한 ‘정원’ 즉, 인공적인 자연 공간은 과연 인간에게 무엇을 제공하였는가.
영국의 톰 터너(정원학자)는 인간이 그들의 몸(Body), 특별한 목적(Activity), 정신세계 등 세 가지를 위하여 정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즉, 우리 몸을 위한 우리 집 텃밭, 특별한 목적을 위한 수목원, 개인정원 혹은 사찰의 정원을 통해 정신세계의 안정을 취하고자 했다는 이야기이다.
최근 전북 완주 소양에는 따뜻하고 달콤한 커피향 만큼이나 향긋한 꽃내음이 가득한 공간이 있다. 사시사철 맞는 옷을 한껏 갖추어 입고, 풍성한 다색단풍이 머무는 공간. 동서양의 이질감이 섞여 색다른 느낌을 주고, 모든 이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대신 맡아주는 그 곳. 주인장이 북극성이 잘 보여서 지었다는 ‘두베(Dubhe)’라는 이름은 ‘북두칠성의 시작별이자 가장 밝은 별’이라는 의미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자연 속 또 다른 정원.
초입의 작은 연못과 나무, 수풀 사이로 조용히 흐르는 작은 물소리는 마치 라인강 로렐라이의 노래 만큼이나 매혹적이며, 소리에 취해 돌아갈 길을 잃은 뱃사공만큼이나 스스로를 취하게 한다.
심성까지 부지런한 벚꽃이 부른 초봄의 싱그러움, 화사하지만 냉정한 빛깔의 여름수국의 시원함, 잘익은 곡식만큼이나 다색다양한 가을단풍의 풍요로움, 하얀 목화솜 이불을 덮은 듯한 휴지기의 겨울풍경의 여유로움 등 이 주는 감성적인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 곳을 찾고, 머물게 하는 인간 본연의 심성을 끌어내는 마력을 지닌다.
왜 사람들은 정원을 찾아올까? 그리고 왜 머물길 원할까?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일까? 아님 또다른 의미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이(Human)는 부모의 관심(Nature)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그러나 아이는 동시에 부모의 관심(Art)이 계속되길 바란다.
이는 부모의 존재만으로도 아이에게는 중요한 정서적 안식처가 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최근 전북대학교에서는 사회적 농업(치유농업)을 환경보전과 농공의생명융합 연계라는 콘셉트로 접근하여 “경관치유농업 시범단지”를 구축하려는 모임이 “전북대학교 농공의생명융합산업지원센터 구축위원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위원장 정안성 교수)
자연 혹은 인공자연으로 조성된 경관농업을 활용한 인간의 정신건강 치유법, 대체의학 접근법, 지속가능한 경관치유농업 정책 발굴, 농가소득 창출 방안 등을 마련하여 지역 거점대학과 지자체와의 단계적 협력을 통하여 농생명과학, 공학, 의생명과학 등이 융합된 전북지역 특화형 고부가가치 산업이 발굴되길 진심으로 희망한다.
/박세진 디자인에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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