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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과 고랑

책방 앞으로는 아이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학원 차를 기다리다 ‘지금 몇 시예요?’ 하고 물으러 들어오는 아이들, 책장의 그림책 표지에 홀려 엄마 손을 잡아끌다 저지당하곤 못내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들, 길 건너에 친구를 두고 홀로 책방에 들어와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금세 ‘다시 올게요.’ 하고 나가는 아이들도 있다. 내가 책방을 연 이후 가장 기다리는 손님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와 자기만의 취향을 찾아가는 아이들이다. 어릴 적 정읍 시내에는 ‘개미음악사’라는 음반 판매점이 있었다. 시내에서 집에 오려면 개미음악사 앞에서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늘 가게 쇼윈도에 붙은 포스터들을 살피거나, 새 음반의 출시 예정일이 전지에 빼곡이 쓰인 목록을 읽었다. 이름을 알고 있는 음악가의 소식은 기뻤고, 모르는 음악가의 소식이 쓰여 있으면 가게에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샘플로 청음을 할 수 있는 음반은 청음도 해 보았다. 지금도 좋아하는 음악가의 새 앨범을 기다리는 마음은 비슷하지만 음악을 손쉽게 얻을 수 없던 그 시절에는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 출시를 앞둔 몇일은 개미음악사의 문턱이 닳도록 오가며 출시일을 확인했다. 문을 빼꼼 열고 아주머니께 ‘OO 앨범 언제 나와요?’ 물어보기 바빴다. 라디오나 pc통신을 통해 알게된 음악이 생기면 ‘이런 앨범을 구할 수 있나요?’ 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나의 음악 취향은 이 시기에 개미음악사에서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올해 처음으로 친구들과 손을 잡고 책방에 와서 책을 고르는 아이들을 만났다. 책방을 열고 기다린지 꼭 3년 만이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찾는 책이 없어도 좋고, 제목을 알아두었다가 인터넷으로 구매해도 좋다. 내가 개미음악사에 드나들며 알게 된 음악가들과 앨범을 떠올리면 책방에서 아이들이 만날 작가들과 책들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이 수줍게 책방의 문을 열고 들어와서 한참을 재잘거리며 고른 책들은 그들의 인생 어딘가에 조그마한 점처럼 남아 있기도 할 것이고, 가늘고 긴 선 혹은 굵고 깊은 고랑이 될 수도 있다. 책방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작은 도시일수록 직접 만지고 고를 수 있는 취향의 가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정읍에 다시 왔을 때, 개미음악사가 없어진 자리를 보며 들었던 헛헛한 기분이 책방의 앞날을 계획하는데 꽤 많은 동력이 되었다. 작은 도시에서 아이들이 취향을 충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테지만, 훗날 어디에 가서든 내가 살던 곳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취향을 채울 수 있는 가게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정읍의 아이들이 책방을 취향의 공간으로 추억할 수 있도록 열심히 갈고 닦고 벼려서 녹슬지 않아야지 했다. 사실 욕심껏 말하자면 지금은 부모님 손을 잡고 오지만 언젠가는 혼자서 책방에 올 책방 키즈들, 타지에 있다가 본가에 오면 들르는 훌쩍 큰 아이들, 이곳을 오아시스처럼 찾는 어른들 모두를 기다린다. 모두들 정읍에서 보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도록 그치지 않고 작게 반짝이며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을테니 이곳에서 만난 작가들과 책들을 각자의 점으로, 선으로, 고랑으로 만들어 계속해서 이어가기를 바란다. 그만한 책방지기의 보람은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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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1 18:47

나의 집 (Home sweet home)

평소엔 관심도 없는 통감자는 휴게소에서 마주치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떡볶이, 핫바 등 다양한 군것질 중 고민하다 동그란 통에 담겨 초록색 투명 녹말 이쑤시개가 꽂힌 통감자를 들고 차에 다시 몸을 싣는다. 차를 산지 겨우 2년하고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주행 누적 거리 100,000km를 채운 나에게 휴게소와 고속도로 풍경은 집 근처 동네의 풍경만큼이나 익숙하다. 심적 친밀도와 익숙함을 기준으로 동네라고 한다면, 군산에서 화천까지도 다니는 나에게 동네는 계절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오는 철새들처럼 넓다. 한 달에 많으면 5~6,000km를 주행하다 보면 ‘자동차’라는 기계 기술에 감동하게 된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하늘에 구멍이 난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로 쏟는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적지로 이동할 때면 나의 연장된 신체인 발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사방을 단단히 둘러싼 철로 나를 보호해 주는 ‘기계’가 생명처럼 느껴진다. 한낱 철 더미에 불과한 기계에 애칭을 만들어 부르고, 인생의 여러 중요한 목적지로 가는 길을 함께했다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며 자동차를 매각할 때 슬퍼지는 건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날씨와 여러 외부 환경으로부터 오는 모든 일을 ‘함께’ 지나치는 자동차는 인생의 동행자이자 집이 되어주기도 한다. 한자 家(집 가)를 보면 지붕이 있다.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누구나 지붕과 벽을 그린다.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집’의 내부에 있는 것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단단한 외부선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빗줄기로부터, 매서운 겨울바람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든든함. 그래서 어떤 것이 ‘집’에 비유하게 될 때면 그 단단함과 안락함을 내포된다.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유행가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집이 되어주라.”라고 속삭이고 어떤 연애편지에는 “You are my home.”이라고 쓰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집은 명사로,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의 의미가 있지만 공간적인 의미를 넘어 공감각의 감각을 준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내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곳, 어떤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곳, 바깥의 소란스러움을 잊을 수 있는 곳. 그 모든 의미가 섞여 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구성한다. 공간뿐만 아니라 사람이 집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순간이 집이 되기도 한다. [정기 휴무: 일요일. 단! 비 오는 날엔 열어요.]라는 사랑스러운 문구가 적혀있는 전 집에서 사장님의 손맛이 듬뿍 담긴 알타리 무김치에 라면을 안주 삼아 식탁을 둘러싼 친구들이 저마다의 취향에 맞춰 누군가는 막걸리, 누군가는 맥주 또 누군가는 소주를 각자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곳이 ‘집’이 된다. 그 어떤 외부의 평가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존재하게 해주는 내 집단으로서 인생의 지붕이자 벽이 되어준다. 새벽 도로를 달리며 마주하는 차를 볼 때면 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해진다. 각자의 사연과 시간이 휴게소에서, 고속도로에서, 카페에서 섞였다가 흩어진다. 모두가 어딘가에 닿기 위해서 출발해서 수많은 도로와 신호를 통과하여 도착을 하고, 다시 출발지로 돌아간다. 차에서 내릴 때면 가끔 ‘뒷자리 짐을 확인하세요.’라는 안내를 해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몇 시간을 달려 함께 이동한 그곳에 뭔가를 두고 내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몇 시간 동안의 여러 생각과 고민 그리고 순간들이 그곳에 쌓인다. 떠난다는 것은 떠날 곳이 있어야 가능한 말이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은 다시 돌아올 곳이 있기에 밖을 탐험할 수 있다. 그곳은 모두에게 집일 것이다.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우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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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4 17:29

깨지는 순간은 아름답지 않지만, 깨져봐야 아는 것

연말이 다가온다. 날이 추워질수록 자연스럽게 지나온 계절을 돌아본다. 내년이 되면 완주에 온 지 7년차가 된다. 3년차부터 사투리가 덜어지는 것 같더니 이젠 제법 완주 사람 같아보이나보다. 고향을 알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많지는 않다. 7년을 앞두고 있지만 연차가 쌓인다고 완주살이가 쉬워지진 않는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귀촌한 친구들 중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얼마 전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귀촌 동기 친구와 만났다. 오랜만에 서로의 근황과 완주살이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 하는 일은 달랐지만 제법 비슷한 궤적 안에 살아가고 있었고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 시간 자체가 위로가 됐다. 몇 없는 귀촌 동지가 있다는 동질감을 느낌과 동시에, 소진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완주는 산업단지가 있어 젊은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지역 활동을 하는 청년들의 수가 적은 편일 뿐 인구수로는 계속 증가추세다. 그러다 보니 직업으로 인해 이주한 친구들과 귀촌을 결심하고 이주한 친구들은 목적이 다르고 서로를 만날 접점이 없다. 요즘은 지자체별로 한달살이 등 귀촌을 장려하는 사업과 지원이 많아졌지만 그럼에도 귀촌은 여전히 보편적이진 않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이주한 친구들은 자기만의 색깔과 기준이 확실한 경향성이 보인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정도 깜냥은 있어야 자기 주도권을 가지고 낯선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기도 하다. 나는 후자의 이유로 완주로 왔지만, 성향은 전자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자기다움과 각자의 개성이 있는 공동체에서 묘하게 삐걱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함께 하며 배우기도 하고 즐거움을 느꼈지만 정작 그 안에서 나는 나다운 나, 온전한 내 모습이기 어려웠다. 각지에서 서로 다른 문화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당연하게 겪는 과정일 수도 있다. 서로에게 소중했고 많은 일을 함께 해온 공동체였던만큼 저마다의 노력을 들이부었지만 균열이 난 유리볼이 깨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그제야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유리볼을 만들기 위해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작은 구슬 같은 관계망이 지역 안팎으로 필요했음을 깨달았다. 추구하는 바와 지향점에 따라 함께 할 때 함께하고, 각자일 때는 각자로 서로의 선을 지키는 것이 서로다움을 존중하며 오래갈 수 있는 공동체라는 걸, 깨져보고 알게 됐다. 정답은 없다. 너에게 맞는 게, 나에게 맞는 것이 아니니. 그렇지만 ‘이럴수도 있구나’를 아는 건 도움이 된다. 인적 자본을 0에서 시작해야하는 귀촌 살이는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지역과 서로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동기가 있다는 건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고 나면 무게추는 다시 0에 맞춰진다. 친구에게 ‘우리 지치더라도 다시 끌어올리자’고. ‘이제 소진되며 나를 갉아먹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자’고. ‘7년, 10년 그 후로도 지속가능한 지역살이를 하자고 함께 하자’고 이 지면을 빌려 말하고 싶다. 내 스스로에게 하는 응원이기도 하다. 조아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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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07 18:50

난 웹툰 작가이다 3

홍인근 웹툰 작가 저번 이야기에 이어서 공모전에 떨어지고 따로 만난 담당자와의 일도 마무리 지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작품을 기획해야 했다. 그러던 중에 광주진흥원에서 여는 웹툰제작지원사업을 알게 됐다. 형과 난 우리나라의 산신령이란 주제로 새로운 웹툰을 기획했다. 샘플원고와 캐릭터 시트와 기획서, 지원사업 발표를 위한 준비를 마치고 심사를 보러 갔었다. 10명이 심사위원이 앉아있었는데 그 중 한명이 인큐베이팅을 제안했던 웹툰 플랫폼 그 담당자가 앉아 있었다. 업계가 좁아서 뭐든 조심해야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좁을 줄이야. 심사를 마치고 집까지 걸어가면서 형은 얼굴이 죽상이었고, 나도 반 이상은 포기 상태였다. 몇일 뒤, 우리 예상과는 다르게 사업에 당선이 되었고 우린 생활비 걱정에서 다시 벗어나 작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마운틴스쿨이란 제목으로 원고를 만들고 티스토어 웹툰 공모전에 출품을 해서 대상을 타게 됐다. 우리 웹툰 인생에 첫 이력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수상과 함께 티스토어에서 연재를 시작하며 웹툰작가로 데뷔를 할 수 있었고, 완결까지 낼 수 있었다. 이 후에 그슨대란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 꽤나 큰 공모전인 대한민국콘텐츠공모대전에서 웹툰부분 우수상을 타고 차기작으로 카카오에서 연재를 하게 됐다. 반년정도의 짧은 연재가 끝나고 이때부터는 오히려 걱정이 많아졌다. 매번 새로운 작품을 심혈을 기울여 짜서 어떻게 어렵게 연재까지 가더라도 반년 혹은 1년안에 끝나게 되고 다시 새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루틴. 새작품을 만들더라도 꼭 연재가 확정되지 않는 불안감, 연재가 되더라도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은 개천에서 용나듯 매우 어려운 확률성. 점점 나이는 먹어가는데 이런 불안정한 삶속에서 웹툰을 하는게 맞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그슨대를 끝내고 나서는 새작품을 만드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걱정만 끌어안고 술을 마시며 지낸 날이 꽤나 길었던거 같다. 그 고민에서 다시 내 어깰 두드리며 일으켜준건 같이 일하는 형이었다. 다시 한번 해보자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가다보면 빛이 보일거라며 날 다독였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형과 함께 다시 웹툰작업에 집중을 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우리은행에서 운영했던 위비툰이라는 곳에서 작품을 연재하고, 서점에 에세이툰이라는 만화책도 출간을 했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작품을 준비하는 백수작가가 돼 있었다. 이때쯤 되니까 형과 나는 생각의 끝이 같았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웹툰 플랫폼에 들어가야 한다. 그 목표를 세우고 우린 다시 컴퓨터를 켜고 머리를 맞대어 회의를 하며 새 작품 구상을 시작했다. 우리의 기획안을 본 대형 기획사에서 계약을 하고 여러 수정을 거쳐 네이버에 투고를 했고 기다림의 끝에 우린 네이버에서 연재확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 정말 꿈만 같았었다. 웹툰작가가 되는게 꿈이었지만, 작가가 되어보니 차기작을 할 수 있는 작가가 꿈이 됐고, 차기작을 하고 난 뒤로는 가장 큰 플렛폼에서 연재하는 작가가 꿈이 돼 있었다. 그 과정의 끝에 온거 같아 형과 난 정말 날 듯이 기뻤었다. 그렇게 22년 3월부터 괴이란 작품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알게 됐다. 이게 또 시작이라는 것을. 끝은 없었다. 인생에 굴곡이 있다는 말이 뼈저리게 통감이 됐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다. 홍인근 웹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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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31 18:58

망하지 않는다

얼마 전 sns에서 책을 한 권도 못 팔았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책방의 계정을 언팔로우 했다는 글을 읽었다. 안 팔릴게 뻔한 업종을 선택해놓고 안 팔린다고 징징대는 꼴이 보기 싫다는 내용이었는데 글의 대상인 책방주인이 안타깝고 애처로웠다. 대부분의 동네 책방들이 비슷하겠지만 나 역시 한 권도 못 파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서 어느 날은 괜찮다가도 어느 날은 막막함이 몰려온다. 동네책방이 뭐라고 왜 사줘야 하느냐 혹은 동네책방에 가서 살펴만 보고 인터넷으로 구매하면 된다는 댓글을 읽으니 조금 더 막막해졌다. 책은 공공재의 역할을 부여받은 상품이다. 어느 지역에나 주민들이 마음껏 무료로 책을 빌려볼 수 있는 공공도서관이 운영중이고, 지역의 동네책방들은 개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판매보다 공공도서관에 책을 납품하며 근근이 명맥을 이어간다. 그마저도 관행과 독점으로 소외되어 납품조차 하지 못하는 책방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런 동네책방들이 손님 없음조차 한탄하지 못하고 대형서점과의 생존경쟁을 해야 하니 막막하지 않을까. 앞으로 망하지 않고 오래오래 책을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소식을 알게 된 날 저녁에는 마치 내가 수상에 기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방 손님들과 얼쑤절쑤 기쁨을 나누고,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물개박수를 치며 칭찬을 했다. 다른 물건과 책이 무슨 차이가 있길래 더 사주어야 하느냐며 책방 주인을 비난하던 목소리들은 이제 내 귀에는 안 들린다. 구차하게도 책의 가치와 동네책방의 필요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할 뻔했지만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한강 작가님 감사합니다. 노벨문학상의 권위여 영원하라. 그래서 노벨문학상 덕분에 동네서점의 책 판매량이 늘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지 3주 째, 이제야 대형서점에서 지역서점에 책을 공급하려 오프라인 매장의 판매를 제한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출판사와 직거래를 대량으로 하는 대형서점과 달리 동네책방은 중간 유통을 거쳐 책을 사입하고, 출판사와 직거래를 하는 경우에도 중간유통을 통해 사입하는 가격과 비슷하다. 심지어 대형서점은 지역서점의 중간도매상 역할을 한다. 대형서점은 뜻밖의 호재에 도매물량을 차단하고 온‧오프라인을 아울러 몇십만부씩 한강 작가님 책을 팔다가 그들의 공급을 받는 지역서점들의 항의에 못 이겨 지난 3주 간 독점한 물량을 이제야 나누어 주겠다 한다. 그것도 겨우 일주일 간 오프라인 매장의 판매만 제한한다고 하니 전국의 동네책방들은 대형서점의 오프라인 재고를 골고루 나누어 일주일간 판매대행을 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주시는 것은 감사히 받아야지. 다음부터는 제 때에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덕분에 책이 없어 몇주간 무수한 문의를 받았고, 사과를 했다. 감사하게도 많은 손님들이 책이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구매해 주셨다. 이래서 망하지 않는다. 대형서점이 나누어 주는 콩고물 때문이 아니라, 불편하고 느린데도 동네책방을 찾는 손님들 덕분에 망하지 않는다. 그런 손님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끊임없이 책을 읽고, 고르고, 갖추는 노력을 해야 망하지 않는다. 망하지 않아야 누구나 동네에서 슬리퍼를 신고 동네책방으로 책을 고르러 갈 수 있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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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4 18:20

전시장의 뒤편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우만컴퍼니 대표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어오면 대답을 고르기가 어려운 때가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문화 기획’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기획자’라는 게 어딘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에야 “지역에서 문화 기획하며 출판사 운영하고 있습니다.”라고 매끈하게 소개를 하지만 한때는 그랬다. 기획자라는 게 어딘가 사기꾼 같은 면모가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종이에 담긴 계획과 청사진을 실현해 내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건 때로 계획보다 월등히 좋을 수도 있고, 계획된 바에 미치진 못했으나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과정임은 분명하다. 과업을 맡긴 사람은 기획자를 전적으로 믿고 맡기기에 신뢰의 무게를 견디며 자신의 맡은 임무를 해내는 것이 기획자인데, 이런 업을 하다 보면 매끈한 전시나 행사장에 가서 뒷면을 상상하게 된다. 그곳은 우스갯소리로 “전시 기획의 정수는 막노동이다.”라고 하는 말의 현장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사람들을 위한 몇 가지 체크리스트가 있다. -이른 아침에 집결하는가? Y -목장갑에 익숙하고, 공구와 크레인을 능히 쓰는가? Y -점심엔 국밥, 저녁 설치 완료 후에는 고기를 먹는가? Y -현장이라고 부르는가? Y -작업이 끝나면 어딘가 피가 나거나 멍이 들어있는가? Y -공기를 마치기 위해 주야 없이 작업하는가? Y -가족보다 화물차 기사님을 더 자주 만나는가? Y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노동력에 기대는가? Y 완벽하게 잘려 시공된 시트와 디자인과 작품 그리고 유려한 동선을 자랑하는 행사장의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다. 이건 비단 하나의 공간을 넘어서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아 완성되는 책이나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글은 글을 쓴 사람과 닮았다. 종이에 기계적으로 인쇄된 자간과 행간일 뿐이지만, 그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는 문장과 사용되는 단어와 조사의 흐름 안에서 글을 쓴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잡지에서 촬영한 인터뷰 사진에서 드러난 뼈가 도드라진 발이라던가, 자신이 대중 앞에 서는 게 서툴다며 유창한 강연 대신 인쇄해 온 글을 읽던 모습이라던가, 머리를 넘기는 습관 때문에 헤집어져 있던 머리카락이라던가. 그럴 때면 글자들을 만져본다. 어떤 입체감도 느껴지지 않는 종이 속에서 글을 쓰는 모습을 읽어본다. 영화를 볼 때도 카메라에 담긴 화면을 바라보면서 카메라 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로케이션의 순간부터 촬영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 그리고 편집실에서의 뒷모습 같은 것. 영화를 보면서 촬영장에서 무전기를 통해 이야기하고 모니터 룸에서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여 촬영본을 확인하는 감독과 배우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건 영화를 이해하거나 비평하는 데 도움 되진 않지만, 영화가 살아있다는 느낌은 든다. 생동감 있는 손길과 호흡이 섞여 만들어낸 자식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러 사람이 만들어 낸 행사나 전시 또는 작품을 보면 작고 큰 희로애락 속에서 헤엄치는 사람의 인생사에서 가장 매끈한 것만 모아 담아놓은 것 같다.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걸 위해 며칠, 몇 달을 전전긍긍하며 보기 좋은 만듦새로 담아내는 시간, 염원, 바람, 열정...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에 담겨 전해지는 걸 상상해 보면서 결국 영원히 내가 사기꾼 같다는 기분을 떨쳐내지는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기획’을 하는 건 결국 어떤 아름다움의 이면에 매료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우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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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7 15:07

지역살이 그리고 먹고사니즘

올 초 퇴사를 하고 나니 휴대전화가 조용해졌다. 좋으면서도 씁쓸한 기분, 노는 게 제일 좋다고 하지만 젊은 나이에 갑자기 일이 없어지니 얼떨떨하고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나는 K-장녀 아닌가. 가뜩이나 혼자 산다고 걱정이 많은 부모님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고, 앓는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족들의 걱정을 덜기 위해서라도 지역에 잘 뿌리내리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동시에 드디어 ‘나도 지역의 일자리 문제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는군. 한 번 겪어보자!’ 하는 괜한 책임감과 출처 없는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일을 구하게 된 건 취업사이트를 통해서가 아니었다. 새로운 일에 도전을 다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하던 전화기에 모르는 번호가 찍혔다. 전화 올 곳이 없는데 누굴까 하며 받은 전화 덕분에 처음으로 프리랜서로 일을 하게 되었다. 바로 지역 결혼이주여성들과 그들의 자녀인 중도입국 아동들의 한국어 선생님이 되는 일이었다. 중간지원조직에 근무 당시 이주 여성분들의 삶에 관심이 많아 관련 사업을 진행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 후 지원 기관에 방문 할 기회가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협력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들이 쌓여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자격이 필요한 일이었다. 일과 병행 가능한 수준에서 관심 분야 자격증을 준비했고 그 일과 관련된 지역 상황을 알고 있었으며 관계자와 소통했던 경험을 통해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아마도 크고 복잡한 도시에서는 이렇게 정보를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이 귀하고, 관계망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농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정보와 기회는 좀 더 쉽게 얻을 수 있으나, 공정성은 도시나 지역이나 똑같다. 얼마 전 한국어 강사를 병행하며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추천을 받아 지원했으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자격을 갖추고 경쟁력을 만들고 업무의 특성과 맞아야만 기회가 내 것이 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물론 도시와 같은 근무 조건을 기대한다면 부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같은 프리랜서라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보는 화려한 조건들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나의 상황과 관심사를 기억하고 관심 분야의 일을 시작해볼 기회를 받았다는 점이 감사했다. 사수와 동료의 도움으로 함께 일을 하던 체계에서 프리랜서로 홀로 일을 해보는 경험도 소중했다. 나에게 맞는 업무 체계는 무엇인지 비교해볼 수 있었다. 새로운 분야의 일을 통해 앞으로 삶의 진로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특히 소비 습관을 다시 점검해보게 됐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사용하지 않는 신용카드를 처분했다. 불안정한 수입에 맞추려면 지출을 다이어트해야 지속 가능한 지역살이를 이어갈 수 있다. 완주살이 7년 차를 앞두고도 아직 처음 해보는 일이 한가득하다. 왜 불안하지 않겠냐마는 이젠 피할 수 없는 불안은 수용하고, 생각지도 못하게 나에게 기회를 주는 지역살이의 장점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러고 보니 이 청춘예찬의 지면 역시 일을 하며 맺은 다양한 인연을 통해 받은 연락이 시작이었다. 달리 보면 보이는 것들과 그런 시선을 키워준 지역에서의 삶에 새삼 감사하다. 조아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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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0 17:29

난 웹툰작가이다 2

나와 형은 지원사업을 통해 전시회와 함께 웹툰 원고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웹툰 플랫폼에서 공모전이 있었다. 광복 70주년 주제로 제작하고 있는 원고였지만, 상업성과 대중성을 고려해서 동양판타지 장르로 만들고 있던 중이어서 공모전에 출품하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공모전 성격에 더 맞게 탈고를 한 뒤에 작품을 공모전에 출품을 했다. 기다렸던 결과는...되지 않았다. 같이 일하고 있는 형과 씁쓸한 위로주를 하며 멘탈을 다듬고 다음 날, 다시 원고 작업을 하던 중에 메일이 하나 왔다. 공모전을 열었던 웹툰 플랫폼에서 온 메일이었고 내용은 수상은 못했지만 작품의 가능성을 보고 미팅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형과 나는 기뻐서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있다. 담당자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미팅할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두근거리는 마음과 함께 만나게 됐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설레는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당황스러움만 남았었다. 그분이 말씀하시길, 아직 등단하지 않은 작가들이기에 연재의 신뢰를 할 수 없고, 작품도 가능성은 있지만 많은 수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큐베이팅'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몇 화 분량의 원고를 만들고 연재를 결정하자는 거였다. 내용으로만 생각해보면 괜찮은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설득도 되었다. 아직 등단하지 못한 예비 작가들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회당 고료는 20만 원, 또 원고를 만드는 동안 작품에 담당자의 많은 관섭이 있을 거라는 것. 당황스러웠다. 20만 원이면 한 달 꼬박 해도 8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이 돈으로 형과 함께 생활해야 했다. 또 분명 우리가 저작권을 갖고 있는 작품을 말 그대로 담당자 마음대로 수정을 쥐락펴락하겠다는 말이 굉장히 불편하고 거북했다. 물론, 대화 중에 느껴지는 담당자의 무시가 깔려 있는 태도도 한몫을 했었다. 생각을 해보기로 하고 형과 작업실로 돌아와서는 한동안은 둘 다 조용히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생각 끝에 형과 나눈 대화의 끝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인큐베이팅동안 이 작품에만 전념하라는 조건이 있는데 그 고료로는 도저히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작품을 우리는 아직 미숙하니 의도와 생각을 갖지 말고 시키는 대로 만들어라는 작업 형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조심스럽고 예의 있게 거절의 메일을 담당자님한테 보내드렸다. 다음 날, 읽음이라고 써 있는 거 보니 메일을 확인은 했는데 우리에게 답장조차 안 해줬다. 시간이 지나고 웹툰 작가로 경험이 쌓였을 때 이때를 생각해보면 불공정 계약의 하나였다. 그 당시에는 웹툰 시장이 이제 막 커지고 있을 때라 예비 작가들이 많아질 때였다. 이 틈을 노려 실력은 있지만, 정당한 계약 내용이라든지, 최소한의 고료가 얼마인지 저작권의 이해가 없는 예비 작가들의 등단하고 싶은 마음만 건드려서 불공정 계약으로 웹툰을 만들어 팔던 게 흔할 때였었다. 그 담당자도 그중 하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런 피해들이 속출하다 보니,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표준계약서를 만들고 누구든 사용할 수 있게 공유하고 적극 활용을 위해 많은 홍보도 하고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어진 문제지만, 그때 나와 형이 그 담당자의 손을 잡았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관련된 일을 준비하시는 분이라면 문체부에서 고시한 표준계약서를 꼭 참고하시길. /홍인근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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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3 15:49

함께 자라나기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계절이 왔다. 유난히 길고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으니 이제 다시 마당으로 나갈 시간이다. 좋은 날씨가 이어지면 큰아이는 자연스럽게 캠핑을 하자고 이야기한다. 미리 예약해 두지 않아서 어쩌지 하는 걱정은 필요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마당에 텐트를 치고 놀이 테이블을 옮겨 놓으면 그것으로 캠핑 준비는 끝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루 온종일 마당에서 볕을 쬐고 바람을 느끼며 아침, 점심, 저녁을 보낸다. 부엌에서 요리한 음식도 바깥에 차려 먹으면 레스토랑의 야외석처럼 느껴진다. 보드게임도 텐트 안에서 하면 더욱 재미있다. 여유가 있다면 이틀, 삼일 정도 텐트 생활을 한다. 집에서 하는 캠핑이 시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안과 밖의 온도와 감도는 엄연히 다르다. 아이들은 바깥에서 더욱 쑥쑥 자란다. 우리집 아이들에게 바깥 생활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봄‧가을에는 마당 캠핑을 하고 여름에는 옥상에서 수영을, 겨울에는 마을의 경사진 길에서 봅슬레이같은 눈썰매를 탄다. 덕분에 팬데믹으로 집에서만 생활해야 했던 때에도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층간소음 걱정 없이 마음껏 뛰어놀고, 소리 지르며 놀 수 있어 좋은 점도 있겠지만 가장 큰 장점은 땅과 식물, 벌레들의 존재이다. 아이들이 집안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느낄 땐 마당으로 나왔다. 시골의 마당에는 계절마다 할 일이 너무도 많은데, 아이들과 재미나게 잡초뽑기 대회도 하고 물주기 시합도 하다 보면 두어시간 지나는 동안 함께 마당 정리를 마치게 되기도 한다. 책 속의 식물들과 곤충들의 진짜 모습이 내 옆에 있는 놀라움은 덤이다. 처음에 흙을 만지기 싫어 했던 첫째는 ‘흙 묻으면 털지 뭐’ 하고, 벌레를 무서워했던 둘째는 ‘저거는 뭐야?’ 한다. 아이들과 우리 부부는 여기서 같이 자라고 있다. 나와 남편이 귀향 계획을 친구들에게 알렸을 때, 아이들 학교는 어떻게 할 거냐고 했다. 나와 남편의 대답은 ‘그건 그때 가서 봐야지.’ 였다. 어디에 살든 아이가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무엇을 잘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우리가 서울에 산다고 아이들을 더 잘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더 잘 키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기도 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무엇을 원하게 될지 모르겠고, 나와 남편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격변하는 시대에 ‘라떼는 말이야’ 하고 어줍짢은 코치를 하려 했다간 오히려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해서 우리가 지금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지금의 환경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데 까지 왔다. 우리가 자랄 때는 맹목적으로 달려나가느라 지나치고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찾아와 발견한 일이 결코 의미 없는 회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은 언제든 돌아올 곳이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사람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다른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는 사람은 훗날 좌절이나 실패가 다가와도 다시 잘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좋겠다. 인간의 문제는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아이들은 여기서 우리와 함께 자라며 무엇이 되었든 자기가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아차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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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6 14:52

도시를 걷는 법

“뭔가를 지도로 만드는 것은 대개 좋은 일이다. 세상의 구석구석에 햇빛을 비추는 일이니까.” 데니스 우드, <모든 것은 노래한다>(2011, 프로파간다) 지역재생의 활동으로 자주 거론되는 단어는 ‘아카이빙’ 또는 ‘매핑(mapping)’이다. 도시와 동네를 함께 걸거나 공간에 대한 지역민의 미시사를 이야기 나누고 그것을 기록하며 의미화한다. 아카이빙이라는 것은 현재 존재하는 것에 애정을 가지며 그것의 현재를 기록함에 목적이 있지만 어찌 보면 그 대상이 변화하거나 사라질 때 의미를 가지는 아이러니함도 있다. 변화가 당연한 시대 속에서 아카이빙과 매핑은 도시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앞서 인용한 데니스 우드는 기존 지도의 객관성을 믿지 않고 누군가의 주관적 시선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했다. 하여 그는 ‘짖는 개’, ‘나무의 나이’, ‘건물 자국’, ‘일광의 리듬’ 등의 여러 요소를 통해 공간을 탐구하고 기록했고, “서정적이며 개인적인 임무(아이라 글래스)”로 책을 ‘지도’를 완성해 냈다. 그의 방식은 내가 군산에 정착하며 단순히 경제적 활동을 해내고 주거가 있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 인식한 과정과 유사하다. 군산의 첫인상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틈’이다. 깨진 벽 사이에서 자라는 나무들, 동네 골목에서 쉽게 발견되는 버려진 욕조를 대용화분으로 쓰며 키우는 식물들, 과거와 현재가 섞여 있는 낮고 고른 건물의 선들. 천천히 자신만의 시선으로 발견할 때 도시는 내 것이 된다. 모든 애정은 관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딘가 부족해도 사랑하게 되는 공간들. 그냥 지나치면 스쳐 지나가면 그저 풍경으로 끝나버리는 동네의 모습을 ‘아, 이곳에 이런 게 있었네.’, ‘이 시간엔 늘 저 고양이가 있네.’라는 생각으로 산책하고 걷고 관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동네와 지역에 애정이 생긴다. 그렇게 자신만의 동네 지도가 완성된다. 수저가 깨끗한지 확인하며 놓고, 테이블이 끈적여서 친구와 대화하는 내내 식탁을 닦아야 할지라도 어딘가 편안하고 그곳에서만큼은 진실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술집처럼. 자신만의 동네 지도가 완성되면, 나의 마음과 상태에 따라 발길을 편안하게 닿는 나만의 아지트가 생기는 것이다. 오래된 간판의 디자인이 남아있는 구도심, 곳곳에 놓인 화분과 의자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주택가의 골목, 노을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아름다운 빛을 만들어내는 동네, 마음이 번잡할 때 훌쩍 달려가 복잡함을 털어놓고 올 수 있는 해변. 군산에서 숨 쉬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나의 군산 풍경들이다. 다시 돌아온, 기후 위기의 무서운 경고장인 지난한 여름도 이번 주면 끝이라는 일기예보가 있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엔 동네를 걸어보며 내가 발 딛고 있는 풍경을 관찰하는 건 어떨까. 겨울에 두릅나물을 먹고, 초봄에 냉이가 들어간 된장을 먹으며 식탁에 내려앉은 계절을 느끼는 것처럼, 지금 이 시기에만 내려앉는 햇볕과 지금 존재하는 건물과 사람들 그리고 동네의 여러 새와 동물을 보다 보면 매년 같이 느껴지는 시간과 공간, 계절과 일상이 조금은 특별해질 것이다. 애정 하는 우만의 동료(김다희)가 과거 『우만플러그, 군산』(2021, 우만컴퍼니)의 마지막에 쓴 글을 마지막으로 글의 마침표를 찍는다. “‘지역’이란 게 사람이 아닌데 그에겐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현재를 생동하며 살고 있는 것까지. 어쩌면 생명체인 나보다 살아있는 존재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 움직이는 것 안에 있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움직이며 살게 되는 게 아닐까?”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출판사 우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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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9 15:53

평범해서 찬란한 000의 삶

고백하자면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는 끝 삼재라 몸과 마음이 이렇게 힘든가 싶은 일의 연속이었다. ‘그런 거 믿지 않는다’라고 하면서도, 뒤돌아서면 ‘진짜 삼재라는 게 있나?’ 싶었다.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귀촌을 했으니 건강하게 살 것 같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고 또 다른 고민과 걱정이 이어졌다. 퇴사 후 나를 설명할 수단이 없어진 것 같았다. 시간이 많아졌지만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사실 그건 내가 몽골에 살든, 캐나다에 살든 어디에 살아도 겪을 힘듦인데 그것들이 어느 날은 큰 고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귀촌이 대다수 청년의 선택지는 아니었기에 평균의 범주 안에서 살던 내게 귀촌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특별했다. 평범한 내가 한 특별한 선택,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하는 일로 증명해 보이고 싶어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올해 초 퇴사와 함께 여러 관계가 정리되며 진짜 내게 남은 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됐다. 귀촌 두 글자가 주는 특별한 마법은 사라진 것이다. 평범한 나, 무기력함에 초조함을 느낄 때면 그것을 잊으려 정리를 한다며 집을 뒤집어놓거나 유튜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최근 중독에 대해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중독에 빠지는 주된 이유가 바로 고통으로부터 회피라고 했다. 강사님은 마약을 예시로 중독과 고통을 이야기 해주셨는데 코카인과 헤로인, 두 가지 약은 인체에 작동하는 기제가 다르다고 한다. 코카인은 감각들을 활성화해서 쾌락으로 고통을 잊게 하고 헤로인은 모든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차단해서 고통으로부터 외면하게 하는데 공통점은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감을 원했겠지만, 특히 헤로인을 하는 순간 즐거움과 행복조차 느끼지 못하는 생기 없는 삶을 살게 된다. 피하고 싶은 것만 선택해서 느끼지 못하게 할 순 없는 것이다. 결국, 고통은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 중독 강의에서 배우게 되었다. 머리로는 삶에서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며 살았지만 정작 내가 고통스러울 땐 제발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피고름을 바늘 찔러 빼야 하듯, 강의를 통해 고통을 도구로 생각해보니 내가 이 도구를 삶에서 어떻게 사용했나 돌아보게 됐다. 평범하고 중간인 삶은 종종 고통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평범함을 긍정하기 쉽지 않은 사회다. 나의 특별함을 찾아보려다 평범하기만 한 나를 마주하면, 온갖 이유로 자신을 고통에 몰아넣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실수임을 알고 있어도 반복하는 실수다. 그렇지만 동시에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중독을 단계별로 치료하듯 실수하고 바로잡는 과정에서 평범함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도 점차 성숙해질 거라 믿는다. 오늘 하루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원고를 쓰며 막힐 때 때마침 전화 온 친구 덕에 환기했다. 곧 쉴 수 있는 명분 가득한 명절이 있다. 그 속에 친척들의 눈치와 질문 폭탄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도 평범하게 잘 살아온 것 자체로 내가 나를 기특해하려 한다. 그래서 나처럼 제목의 000에는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분들이 자신의 이름을 넣어 스스로 한 번 응원해줬으면 한다. /조아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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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2 16:11

난 웹툰작가이다

나는 현재 웹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1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여러 작품을 연재하고 에세이툰도 출간했으며, 여러 공모전 수상 경력도 있다. 예전부터 만화는 존재했었고, 만화의 대표적인 나라를 떠올리면 일본이라는 건 웬만한 일반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김산호, 김광식 같은 작가분들께서 초반 일본 만화의 형식을 보고 배우면서도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가며 한국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70년대 군부정권 시대의 개막과 함께 만화를 사회 5대 악 중 하나로 규정하면서 심한 탄압과 함께 만화 불태우기 운동까지 했었다. 하지만 어디 깊이 자리 잡힌 문화란 것이 쉽게 죽으랴. 이후에 이현세, 김수정, 이두호, 허영만 등으로 대표되는 신진 작가들이 등단하여 보다 다양한 장르를 개척하였으며, 9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만화 대여점이 생기면서 일반인들이 좀 더 쉽게 만화를 만나게 될 수 있었다. 물론 대여점을 통한 유통이나 인세, 등 문제점들도 꽤 있긴 했었다. 그러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마린블루스 등을 필두로 웹툰이라는 콘텐츠가 나오기 시작했고, 강풀, 강도영 작가님들의 작품이 흥행하면서 웹툰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만화는 앞서 이야기했듯 일본을 보고 모티브 삼아 배워온 것들이 많았다면, 웹툰은 그 만화를 보고 즐기며 성장해온 젊고 새로운 작가들이 만들어낸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콘텐츠이다. 나는 만화를 보며 컸고 고등학생 시절에 웹툰을 접하고 두 장르를 다 경험하며 자란 세대이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가라는 꿈이 있었지만, 가정환경으로 인해 꿈을 접고 입시만화학원에서 전임강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유명 만화작가분의 어시생활과 웹툰에서도 어시로 일한 경험이 있는 형을 만나게 됐고 그 형의 여러 번의 권유로 같이 웹툰 작가가 되보기로 결심했다. 30이라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였고, 모아놓은 돈도 없을 떄였다. 당시 웹툰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에 작가로 등단하는 게 꽤나 어려울 때였다. 그걸 알기에 형과 나는 학원을 그만두고 등단이란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다. 작업실이란 이름의 원룸을 하나 구했고, 그곳에서 우리는 숙식과 작업을 같이 했다. 방을 구하고 작업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컴퓨터와 모니터 타블렛을 마련하고 나니 우리에게 남은 돈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작품을 만들어서 플랫폼에 연재 제안을 하려면 못해도 석 달은 필요했는데 당장 생활비가 없었다. 이때 형이 개인적으로 대출을 받아 조그만한 생활비를 마련했다. 그렇게 작품을 만들던 중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지원사업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지원사업을 살펴보던 중 우리가 만들고 있는 작품과 맞는 지원사업이 있는 걸 보고 지원하게 됐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제2의 각시탈과 같은 만화작품을 찾는 지원사업이었다. 운이 좋게 당선이 됐고, 우리는 원고료를 받으면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정말, 생활비가 딱 떨어질 때였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의 미팅이 있을때는 진흥원 여러 담당자님, 관계자분들께서 잘 대해주셨고 덕분에 부천에서 작품 전시도 할 수 있었다. 작품 전시회는 우리 말고도 당선된 작가분들의 프로필이 적혀 있었는데 너무나도 화려했었다. 반면, 우리의 프로필은 전시된 작품 딱 한 줄. 우리는 그렇게 시작했다. 이렇게 고마움으로 시작됐으나, 일이 좋은 일만 있으랴. 이후에 웹툰 시장의 씁쓸함을 느끼는 경험도 있었다. 다음 예찬에서 이어서 하도록 하겠다. /홍인근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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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5 16:53

좋아하는 일로 살아가기

어쩌다 책방을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원래 책을 다루던 일을 했는지, 전에 하던 일과 관련이 있는지, 전공은 무엇인지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커피를 좋아해서 카페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하고. 꿈으로 삼고 전공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원하던 학과에 진학했는데 내가 가진 재능이나 성향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른들은 뭐든 대학만 가면 다 된다고 했었다. 그래서 모두 미루고 열심히 공부만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찾아온 막막함은 해결할 방법을 몰랐다. 대학생활은 짧고, 다음은 취업이었다. 나는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가, 어떤 상황에 취약한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은 중요하지 않았다.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이든, 나는 어떤 일을 잘하든 상관없이 취업의 문만 통과하면 되는 것이었다. 결국 주어진 보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택을 했다. 당연히 계속 부딪혔고 자아실현은 별개로 생각하자 싶어 일은 도구로 여겼다. 서른이 넘어서야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아무리 오래 해왔더라도 회사를 벗어나면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일은 가짜노동에 가깝다. 내가 톱니바퀴가 아닌 일을 하면 똑같이 갈아 넣더라도 내 안에 무엇이라도 쌓이지 않을까. 평소에 좋아하던 것이지만 업으로 삼기에는 가장 뒤로 미루어 놓았던 것을 떠올렸다. 내내 책만 끼고 공부만 하던 사람이 가려고 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길이기도 했다. 6개월간 핸드드립 전문가 과정을 마치고 커피 전문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론과 실전이 다르다는 건 말로만 들었지 처음 겪어 봤다. 책상머리에 앉아만 있던 내가 처음 겪은 체험 삶의 현장이었다. 처음 3개월 동안 커피에는 손도 못 댄 채 설거지와 서빙을 했다. 3개월만에 겨우 커피 제조를 하게 되었는데 수십종류가 넘는 커피 메뉴를 숙련된 동료 바리스타와 같은 품질로 만들어내는 일은 여태 해 온 일 중에 가장 힘들었다. 연습하고 평가받기를 수백 수천번 지나 이제 됐다 소리를 들었을 때, 정말로 내가 내린 커피를 돈을 받고 팔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 남편에게 흐드러지게 자랑을 했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게 되어 돈까지 벌다니. 노동강도에 비하면 박봉이지만 출근길에도 퇴근하고 싶던 회사에 다닐 때와는 달리 새벽에 출근을 해도, 한밤중에 퇴근을 해도 좋았다. 내내 톱니바퀴같이 어디에 껴 있는지도 모르게 살던 나는 그제야 내 의지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책방은 처음 카페에서 일을 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이왕 삶을 바꾸기로 한 거, 좋아하는 것들만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어쩌다 책방을 하게 되었냐는 질문에는 ‘카페에서 일을 했었는데요,’ 다음에 ‘책 읽기를 좋아해서요.’ 라고 대답한다. 이제야 책에 대한 애정을 밝히기는 새삼스럽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좋아서 자발적으로 꾸준히 해 온 일은 사실 책 읽기다. 안 팔리면 내가 읽으려고 한다는 농담 뒤에는 사실 내가 잘해온 것,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삶을 꾸리려는 마음이 가장 크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제든 찾아오고 싶은 취향의 은신처, 소도시에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엄연히 존재하는 공간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녹슬지 않는 커피 맛과 독서의 경험을 제공하며 오래오래 지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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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9 16:41

WK리그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합니다

최근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열정의 대상은 여자축구이다. 평생을 한번 빠지면 끝장을 내는 불도저로 살아온 성미였지만, 이번엔 나조차도 “이게 맞나?”라고 몇 번이나 다시 묻고 의심하는 일을 벌였다. ‘여자축구 문화 전문지’ <STAND>를 8월 31일 창간하게 된 것이다. 운명처럼 접한 2023 호주·뉴질랜드 FIFA 여자 월드컵 조별리그를 계기로, 대표팀 경기를 ‘직관’하고 싶어서 고민도 없이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 티켓을 구매하고 보러 간 지 약 1년이 되는 2024년 8월, 기어이 자비 약 천만 원을 들여 책까지 낸다. WK리그는 2009년 출범한 한국여자축구 실업 리그의 명칭으로, 프로 리그가 없는 현재 한국여자축구 최상위 리그이다. 여자축구 리그는 전 세계적으로 34개 국가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WK리그도 그중 하나다. FIFA가 2023년 발행한 ‘Setting the Pace: FIFA benchmarketing Report Women’s Football‘에 따르면, 전 세계 34개 리그 중 WK리그가 눈에 띄는 부분은 여성 감독 비율이 8개 구단 중 5개 구단으로 가장 높다는 점이다. 필드를 달리는 선수도 여성, 심판도 대부분 여성인 WK리그에는 우리 사회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여성의 모습이 있다. 거침없이 드러내는 승부욕,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체력적으로 힘들어도 이기겠다는 의지로 치달리는 끈기, 살짝 걷은 소매에서 선명히 드러나는 햇볕에 그을린 노력의 흔적. 득점과 승리 그리고 우승이라는 목적을 향해 함께 달려가며 자신의 능력과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몸을 사리지 않는 걸 보고 있으면 반할 수밖에 없다. 무패 행진을 하던 1위 팀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고 끝까지 실점 없이 지켜내 승리하여 첫 패배를 안기는 하위권 팀. 후반 경기 추가 시간의 추가 시간까지도 골을 넣고 먹히는 반전과 투지 속에서 기쁨과 환호와 아쉬움과 한탄이 섞인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후 필드에 누워버리는 선수들을 보고 있으면 인생이란 게 그곳에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이런 아름다움을 혼자 보기 아쉬워 더 많은 관중 속에서 선수들이 경기를 치르고, WK리그가 부흥하길 바라며 한 명의 팬이자 여성으로서 매거진 <STAND>를 창간하는 것이다. 8월 31일 군산북페어 2024에서 최초 공개되는 매거진 <STAND>는 영어단어의 의미 그대로 저항과 경기장에서의 관중석 그리고 의견을 뜻한다. 창간호인 1호는 ‘여자축구 WK리그 A to Z’를 주제로 하여 A부터 Z에 속하는 단어를 활용해 각각의 키워드로 WK리그를 훑는 간단한 흐름으로 WK리그를 안내하는 가이드북이다. WK리그 출범 후 현재까지 운영되면서 고쳐야만 하는 고질적 문제는 분명하다. 매거진 <STAND>는 그런 문제점을 짚음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선수와 함께 고전하는 구단 스태프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고 즐기는 팬의 뜨거운 애정에 보다 집중한다. 책을 접하는 독자가 WK리그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기를. 더 나아가 현재는 2015년 화천군으로 연고지를 옮긴 KSPO의 전 연고지였던 전북에 다시 한번 WK리그 팀이 창단되어 멋진 WK리그에 다채로움을 더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람이 담겨있다. 이 칼럼과 매거진 <STAND>를 읽고 언제나 여러분을 환영하는 WK리그 세계로 구경 와보는 건 어떨까.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출판사 우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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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2 16:06

내가 한 게 귀촌이라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할까

귀촌이라는 단어는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다.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인데 완주로 오고 나서 귀촌 청년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귀촌과 귀농은 엄연히 다르지만 묶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확실하게 다른 것은 귀농은 정말 농사를 짓겠다는 결심 혹은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농사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지만 귀촌은 그러기엔 애매하다는 점이다. 삶의 터전을 시골로 이동하는 것은 같지만 직업은 농사를 짓고 사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하다 보니 하나의 교육으로 묶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본적으로 내가 사는 지역에 대한 이해는 내가 살면서 터득하고 배워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어떤 이웃을 만나는지에 따라 영향도 많이 받는다. 막상 귀촌했지만 뭐 먹고 살아야 하나 그 막막함을 첫날부터 느꼈다. 그렇게 일주일은 동네를 탐방하며 뭘 하기 전에 일단 지리부터 파악했고 기웃기웃 궁금하고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 뽈뽈 돌아다녔다. 그러다보면 나에대해 이야기 할 곳이 생긴다. 동네에 이런 청년이 있구나 하며 관심 가져주는 어른들이 계셨던 것은 감사한 일이고 운이 좋았다. 그리고 귀촌을 장려하는 지자체 별로 다양한 교육들이 많다. 그 교육들을 살펴보면 관심 있는 것들 생각도 못해 본 교육들이 있다. 일단은 별로 흥미가 없어도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육을 신청해서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다 보면 거기서 기회가 생긴다. 나 역시 교육을 통해서 사회적경제 중간지원조직에서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일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귀촌을 하고 나서 많은 청년들이 대부분 이런 중간지원조직에서 근무를 하며 지역을 배워가는 비율이 높다. 한정된 일자리, 농사가 아닌 일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다는 것이 지역을 떠나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겐 지역으로 오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걸 느낀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을 때도 이왕이면 작은 마트, 큰 마트,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전문점 등이 있으면 고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그런 편하고 다양한 선택지 때문에 어느순간부터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순간이 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모든 생활에 100% 만족은 어려운 것처럼 여기서의 아쉬움, 저기서의 아쉬움 말하자면 끝이 없으니 그냥 내가 선택한 이곳에서 지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행복감을 느끼려한다. 여기에도 노력은 필요하고 도시에서의 노력과 결이 다를 순 있다. 그렇지만 귀촌을 장려할 수 있냐고 내 스스로 물어본다면 50%이다. 나에겐 맞는 부분이 더 컸지만 아닌 경우도 많았고 나 역시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 그건 더 살아봐야 아는 것이니까 다만 이쯤되니 이젠 언제까지 더 있지? 이런 고민에서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많은 준비를 해서 온 친구들도 있었지만 떠난 친구도 있고 준비 없이 와서 나처럼 사는 친구들도 있고 그 사이 다른 지역으로 고향으로 각각 떠난 친구들도 많다. 여전히 시골에선 할 일이 많다. 그게 세상이 말하는 멋짐과 다를 수도 있지만 거기서 흔들리는 나, 비교되는 나 그럼에도 그 안에 있는 행복을 누리는 나도 나다. 비교는 끝없고 어딜 가도 나를 따라올 것이다. 내게 귀촌은 비교하는 나를 멈추고 일단 나를 바라보는 작업의 연장선이다. /조아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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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5 15:34

자생2

사람은 사는 모양새가 다 다르니 내가 사는 방향과 속도는 알아서 나아가야 한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딱히 내 인생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걸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살, 고등학교 졸업 후에 나는 독립을 했다. 아버지의 술주정이 심해 이사를 자주 했던 난 마지막 초등학교로 전학갔을 때 만난 괜찮은 친구들을 어머니가 보신 후 더 이상 전학을 가면 안된다고 생각하신 거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지역으로 어머니와 이사를 갔고 난 살던 동네에 남아 다니던 학원에 보조강사로 취업해 독립했다. 아버지 술주정 때문에 어머니가 걱정되긴 했지만,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에 뭔가 좋기도 했다. 그곳에서 벗어났으니 하루빨리 내 스스로 성공해서 어머니를 모셔야겠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주정을 안보면서 생긴 안도감일까, 안쓰러운 어머니를 자주 못보면서 무뎌진 독함이었을까. 방울만 달리고 독은 다 잃어버린 방울뱀처럼 성공을 위한 이야기만 뱉어낼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나태하기 짝이 없는 나였었다. 그렇게 군대를 가게 됐다. 전역할때쯤에는 이미 친구들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위한 준비에 바빴었고 휴가때마다 뵙는 어머니는 갈수록 늙어가는게 눈에 보였었다. 많은 복기를 한 뒤에 전역할때는 다시 난 독기를 품을 수 있었다. 26살에 대학교를 신입생으로 다시 들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으로 꿈에 다가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수업이든 학과생활이든 후회없게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중에..일이 터졌다. 1학년 방학 전 쯤에 아버지 전화로 전화가 왔었다. 음주로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에 어머니도 동승을 하셨고 큰 사고가 나서 어머니가 많이 위독하다는 전화였다. 하던 기말고사 과제는 내팽겨치고 택시를 타고 어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갔었다. 도착한 병원 응급실에서 어머니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셨고 아버지는 조금 떨어진 병원침대에서 아직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수술에 들어간 어머니는 결국 다리를 하나 잃으셔야 했다. 이 후에는 모든게 다 무너졌다. 그냥 난 나를 지웠다. 그냥 돈이나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봤던 일이 학원강사일이니 일했던 미술학원 강사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곳에 먼저 있던 만화반 동료강사인 형이 있었다. 그 형은 나에게 계속 이야기를 했다. 네가 아깝다. 네 작품을 시작도 안해보고 꿈을 놓기에는 너무 아깝다. 라고. 처음에는 그냥 위로를 받는다 생각하고 넘겼다. 그렇게 한해,두해가 지나도 형은 사석에서 만화이야기를 나눌때면 그 얘기를 꼭 나에게 말해줬다. 그리고는 웹툰제작을 위한 디지털 작업방법도 많이 알려줬다. 그러면서 용기를 얻었던거 같다. 죽어가던 나에게 만화가가 되고 싶단 불씨에 바람을 불어줬다. 그렇게 형과 함께 공모전을 준비하고 대상을 탄 뒤 웹툰작가가 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꿈으로 가는길엔 형의 도움이 젤 컸지만 사는데 여러번의 좌절에서 친구들에게도 많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자생1에서 나를 인정하고 그에 어울리는 무기가 될만한 숙련도가 필요한 이야기였다면 이글에선 나의 모자른걸 가르쳐주고 채워주는 인생의 동료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그래도 살만한 인생이지 않을까란 이야기다. /홍인근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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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8 18:38

대체불가한 ‘그런 것’

가끔 큰 도시에 살다가 정읍으로 이주해 온 손님들을 만난다. 작은 책방의 존재가 신기한지 ‘원래 정읍 사람이냐’ 하는 질문의 다음은 어쩌다 정읍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 없는 것들이 많아서 불편하지는 않은지 등등이다. 각자의 불편함을 토로하기에 앞서 나오는 문장은 ‘여기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인데, ‘그런 것’의 존재는 지역의 인구와 직결된다. 정읍시 규모에서는 유지가 불가한 종류들이다. 그리고 그 종류는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다양한 취향을 유지하려면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수가 필요하다. 손님과의 대화는 여기에서 조용히 다른 화제로 넘어간다. 누군가에게는 음식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물건일 수도 있고 혹은 무형의 분위기일 수도 있는 ‘그런 것’의 부재를 채우는 ‘다행인 것’이 있기에 정읍에서의 삶을 꾸릴 수 있다 하는 소소한 만족을 주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각자의 ‘다행인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의 경우에는 마당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집 마당의 잡초를 대신 뽑아주는 엄마가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서 얻은 행복은 그 비웃음을 견뎌내고도 남을 만큼 매우 크다. 단순히 취향을 만족시키는 ‘그런 것’들과의 일상을 포기하는 기회비용이 겨우 마당이라고 하면 공감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때때로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떤 존재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때가 있는데, 마당이 생긴 직후에 코로나 펜데믹이 발생했고 우리의 경계는 어디까지였을까 떠올리면 이 이야기기가 조금 더 설득력을 얻게 될 것 같다. 마당이 주는 기쁨이 단순히 취향을 포기하고 자연과 가까워지는 삶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코로나 펜데믹 때문에 시작한 마당에서의 시간이 처음에는 내게도 ‘다행인 것’이었다. 지금은 대체불가한 ‘그런 것’이 되었다. 사실 마당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들은 1년에 몇 일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짧아서 소중한 그 날들이 주는 기쁨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따뜻한 볕이 들기 시작하는 3월에서 5월, 여름의 더위가 벌레들의 극성이 살짝 사그라드는 10월에서 11월 사이, 문을 활짝 열고 마당과 거실, 부엌을 오가며 안팎을 자유롭게 누린다. 조금은 좁은 듯 했던 실내가 확장되고, 볕과 공기를 마음껏 즐긴다. 일부러 마당에 상을 차려 이웃과 친구를 초대하고, 계절이 주는 축복을 마음껏 누린다. 볕에 타는 것도, 벌레도, 까끌거리는 모래나 흙이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질색했던 나는 이제 앞장서 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연다. 누구에게든 정읍에서 살면서 없으면 안 될 ‘그런 것’의 존재를 자랑할 수 있다. 얼마 전 서울에 갔다가 경복궁 뒤 인왕산을 보고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서울에 살던 때 광화문의 풍경은 광화문과 그 앞 8차선, 광장이 전부였다. 늘 차가 빽빽하게 밀리던 도로였고, 사람이 많은 광장이었다. 뒤로는 빛나는 야경을 보러 올라가는 곳에 불과했던 인왕산 기슭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늘을 배경 삼은 인왕산이 보인다. 계절에 걸맞는 푸르름이 보이고, 그 아래 사람과 건물과 차들이 뒤섞인 혼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당이 없었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의 방식을 바꾸면 보이는 것들도 달라진다. /유새롬 작은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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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17:52

언니, 안녕

여러 지역을 다니다 군산에 자리 잡으며 속으로 가장 많이 되뇐 단어는 ‘언니’였다. 이모도, 선배도 하물며 엄마도 아닌 언니라는 호칭에 담기는 친근하면서도 기댈 수 있는 느낌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다. 관광지의 맛집에서 현지인들만 아는 메뉴를 시키는 것처럼. 군산살이 7년 차, 의지할 수 있는 언니들을 많이 만났다. 말은 ‘00 님’이라고 하지만 ‘00 언니’라고 속 발음한다. 월명동에서 사람들이 편히 드나드는 방앗간 역할을 하며 여러 소식과 필요한 사람 간 연결을 해주는 책 언니, 인생의 풍파를 거닐며 어떤 일에도 초월한 미소를 보이는 호탕하기 그지없는 왕 언니, 세상에 복수하고 싶은 발칙한 마음이 들 때 찾아가서 속 풀이를 하면 깜찍한 해법을 제시해 줘서 결국 세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청 언니.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면 한 사람이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언니들이 필요할 것이다. 스포츠에도 언니가 있다. ‘멋있으면 다 언니’라는 말이 불길처럼 번진 여성 스포츠를 사랑하는 J는 언제나 언니를 입에 달고 사는데, 그는 언니는 조금 늘어트려서 ‘언니이-’로 발음한다. 호칭을 마무리하는 길이와 부호에 따라 감정이 드러나는데. 경기에 진날은 ‘언니..’, 걱정되는 날은 ‘언니..!’, 너무 멋진 날은 ‘..! 언니!’다. 세상 곳곳의 언니들을 찾아 헤매며 어릿광대 역할을 하던 나도 어느새 언니 역할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굴고 싶다가도, 대부분의 모임에서 내가 연장자가 된 걸 알아차리면 사회적 얼굴을 갖춘다. 그럴 때 명확한 얼굴이 아닌 추상적인 ‘언니’가 더 그리워지지만, 내가 누군가를 불렀든 다른 이가 나를 ‘언니’라고 부를 때면 내가 받았듯, 모든 걸 주고 싶어진다. 우는 아이를 어찌 달래줘야 할지 몰라 손에 화려하고 소리 나는 모든 걸 들고 흔드는 사람처럼. 그대, 나를 언니라고 부르면 나 그대에게 언니가 되리. 백은선 시인의 시 중 <언니의 시>가 있다. 두 번째 문단에서 “언니, 언니가 그렇게 썼잖아 나는 그걸 읽고 언니,”라고 언니를 애틋하게 부르기 시작하여 계속 반복하는 이 시는 ‘언니’라는 호칭이 가지는 판타지의 결정이다. 시의 화자처럼 왠지 나도 “언니의 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영원히 내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언니”와 경험을 한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시 속의 ‘언니’라는 호칭에 담긴 간지러운 느낌을 이해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칠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이런 언니 예찬의 글을 쓰다가도, 슬픔과 화가 담기는 ‘언니’의 세계도 있다는 걸 떠올리면 가슴이 뻐근해진다. 반성매매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H에게 ‘언니’는 다른 의미이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유령 같은 언니들을 만나기 위해 친구는 밤에 바삐 움직인다. 군산에도 ‘언니’들이 있다. 대명동·개복동 성매매업소화재참사(2000년, 2002년) 이후 언니들은 사라진 것 같지만, 우만컴퍼니 사무실이 자리 잡은 월명동의 밤거리를 거닐다 보면 언니들의 그림자를 만날 수 있다. 새벽, 주차된 차로 걸어가는 나를 향해 “언니, 노래방 어디 가야 해?”라고 묻는 취한 남자를 마주친 골목. 남자들은 왜 ‘언니’라고 부를까. 온몸에 소름 돋는 징그러움을 떠오르다보면 ‘언니 최고’보다는 그저 얌전히 모든 언니들의 안녕과 행복을 바라고 만다.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출판사 우만컴퍼니 대표 △김나은 대표는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이자 출판사인 우만컴퍼니를 운영하고 있으며, 군산시청년정책위원회와 군산시청년협의체 위원과 함께 전북양성평등센터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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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5 16:59

완주 거기가 어디야? 대구 거기서 왜 왔어?

2019년 3월,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홀연히 완주로 왔다. 그리하여 어느덧 1인 가구 6년차에 접어들었다. 홀로 왔지만 진짜 혼자는 아니었고 고향 친구가 먼저 완주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렇다. 친구 따라 완주로 온 것이다. ‘아니 너는 무슨 삶의 터전을 바꾸는 걸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하냐’하면 할 말이 없다. 터를 옮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간다고 결정했으니 왔고 그 곳이 완주였다. 처음부터 완주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온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마침 완주에 왔을 때 청년들의 귀촌이 붐처럼 시작되고 있었다. 지역살이에 관심을 가진 친구, 타 귀촌으로 유명한 지역에서 살아본 친구들도 많다는 것을 와서야 알게 됐다. 완주로 가기 전 이민 가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낯선 지역으로 간다고 하니 친구들과 모이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마다 친구들의 반응은 완주? 거기가 어디야? 혹은 강원도 원주로 가는 줄 아는 친구들이 많았다. 왜 만주로 가냐고 정말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물어보던 친구가 잊혀지지 않는다. 원주까지는 예상했었다. 나도 그랬기 때문에. 그렇지만 만주는 정말 생각도 못했던 곳이라 깔깔 웃었다. 내 완주행을 설명할 때 가장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완주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면 억양 때문에 금방 내 고향이 탄로난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사투리를 덜 쓴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내 생각일 뿐이다. “나 사투리 안 쓰고 있지?”라고 물어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쓰고 있다”는 답을 듣는다. 말투에서 티가 나다 보니, “왜 완주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건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통과의례가 됐다. 대구에서 왔다고하면 유독 더 놀라는 친구들이 많다. 아무래도 동서 간의 왕래가 잦지 않아서일까. 그 다음 질문은 보통 “직장 때문에 완주로 왔냐”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아니다. 완주로 오기 전 당시의 나는 혼란스러운 취준의 시기를 겪던 취준생이었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 나름의 계획과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일은 나와 맞지 않았다. 내 인생 최초의 암흑기였다. 출근길 버스에서 ‘크게 다치지 않고 회사만 안 갈 수 있을 정도로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자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해 초강수를 뒀다. 내 삶을 바꾸려면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을 바꿔야 한다는 마음으로 완주행을 택했다. 한 번도 가족을 떠나 살아본 적 없었다. 막연하게 언젠가 독립을 하겠지 했지만 그게 혼자 연고가 없는 타지로 가는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 못 했다. 그러나 삶이 다 그렇지 않은가 예상치 못한 변수는 늘 있고 마침 그때의 내게 찾아온 것이다. 퇴사 후 일주일만에 완주로 왔다. 바로 직전까지 일을 하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었다. 대구보다 더 조용한 이곳에서 무얼 해야할지, 좋으면서도 막연했다. 기껏 짐 싸들고 와서야, ‘무작정 온 것은 아닐까’, ‘여기서 내가 뭘 하고 살 수 있을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눈물이 났다. 그럴 때는 밖으로 나가 동네를 탐험하며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비비정마을부터 삼례문화예술촌과 책방 그리고 삼례성당까지, 돌이켜보니 그곳에서 참 위로를 많이 받았다. 조용하면서도 쉬어갈 수 있는 곳, 아무도 내게 닦달하지 않는 동네. 그렇게 나의 완주 정착기가 시작됐다. /조아란 프리랜서 △조아란 프리랜서는 2019년 완주로 귀촌해 완주소셜굿즈센터 청년정책담당, 완주청년공간 청촌방앗간 대표를 거쳐 현재 결혼이주여성과 중도입국자녀들의 한국어 강사와 풀뿌리교육지원센터 마을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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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8 15:21

자생1

나는 왜 나인 것일까. 다른 모든 사람들은 내가 볼 수 있지만, 나는 거울을 통해야만 나를 볼 수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큰 머리, 평범한 이목구비 등 이 몸은 내가 선택한게 아닌 태어나보니 이 몸이었다. 부모님도, 집도, 태어난 곳도, 모든 게 내 선택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건 살면서 한번쯤 고민할 이야기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했다. 나의 존재가. 난 태어났다. 1985년 아주 가난한 집에서, 말 그대로 집에서 태어났다. 무슨 말이냐면, 주위 또래 친구들에게 물어도 병원이 아닌 집에서 태어난 나같은 아이는 거의 볼 수 없었다. 허름한 시골 할아버지댁 단칸방에서 날 낳은 어머니는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할머니가 시키는대로 집안일을 해야했다. 그러다 내가 태어난지 보름만에 부모님은 할머니댁에서 쫓겨났다. 뭐, 아버지가 새로 사오신 작은 냉장고를 부엌에 안두고 어머니가 지내시는 단칸방에 뒀다는게 이유라고 들은 거 같다. 고작 그 이유에 갓난아기를 업고 길바닥에 친할머니에게 쫓겨 나가야했던 것이다. 커서 들어보면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집 구할 돈 한푼이 없어 어머니가 친정에 겨우 사정해 돈을 빌리고 허름한 달방을 구한 뒤에야 부모님과 나는 또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흔하다. 이게 또 무슨 말이냐면, 드라마나 영화에 흔히 나오는 클리셰처럼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개차반이 되고 가정에는 신경을 거의 쓰지 않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자식만 바라보며 온갖 힘듦을 다 안고 사는 그런 분이었다. 초등학교때쯤에 나는 이런 집이 명확하게 뭐가 잘못됐고 싫다기보다는 그냥 마음이 뭔가 허전했다. 친구 사귀는건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술주정 때문에 한곳에 오래 살지 못하고 이사를 자주 가야 했기 때문에 초등학교만 학교를 7개를 다녔다. 그러니 진득한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고 텃세에도 많이 시달리기도 했다. 내가 사춘기를 겪고 큰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사춘기를 얘기하라면 꽤나 일찍부터였었나보다. 그래서 그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 나는 만화책을 많이 보기 시작했다. 당시 책방에서 100원, 200원에 만화책을 빌려봤었는데 처음봤던 게 '짱구는 못말려'였던거 같다. 그러면서 노트에 낙서를 끄적이기 시작했는데 참 재밌고 설레였다. 내가 원하고 상상하던 것들을 만들고 그것들이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대로 그려나가는 게 친구를 만나거나 어디 놀이동산을 가는 것보다 더 환상적인 놀이였다. 그렇게 만화에 미쳤었다.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고 단행본도 직접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대여를 해주며 작은 용돈도 벌기도 했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엄청난 재능도 아니었다. 나 말고도 만화를 그리는 친구들을 만나보면 나보다 훨씬 잘 그리는 친구도 있었다. 처음 그 경험을 했을 때는, 아! 일반 친구들이 나를 봤을 때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소름 돋는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에 또 그림을 열심히 그렸었다. 만화를 그리는 건 나에게는 단순 취미가 아니었으니까. 다 말하지 못할 힘든 가정사에 어머니의 든든한 사랑과 만화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내가 아닌 망가진 내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부모, 환경, 신체 등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받은 삶이 어떻게 생각해보면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의 끝에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인 나의 이 삶에서 살아가는데 한가지 쯤은 미치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미쳐서 쌓인 숙련도는 외면의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내면의 방어구가 될 수도 있다. 삶은 전쟁터와 같으니까. /홍인근 웹툰작가 △홍인근 작가는 네이버 카카오페이지 등에 웹툰을 연재하고 있으며 T스토어 OSMU 웹툰 공모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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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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