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엔 관심도 없는 통감자는 휴게소에서 마주치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떡볶이, 핫바 등 다양한 군것질 중 고민하다 동그란 통에 담겨 초록색 투명 녹말 이쑤시개가 꽂힌 통감자를 들고 차에 다시 몸을 싣는다. 차를 산지 겨우 2년하고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주행 누적 거리 100,000km를 채운 나에게 휴게소와 고속도로 풍경은 집 근처 동네의 풍경만큼이나 익숙하다. 심적 친밀도와 익숙함을 기준으로 동네라고 한다면, 군산에서 화천까지도 다니는 나에게 동네는 계절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오는 철새들처럼 넓다.
한 달에 많으면 5~6,000km를 주행하다 보면 ‘자동차’라는 기계 기술에 감동하게 된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하늘에 구멍이 난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로 쏟는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적지로 이동할 때면 나의 연장된 신체인 발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사방을 단단히 둘러싼 철로 나를 보호해 주는 ‘기계’가 생명처럼 느껴진다. 한낱 철 더미에 불과한 기계에 애칭을 만들어 부르고, 인생의 여러 중요한 목적지로 가는 길을 함께했다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며 자동차를 매각할 때 슬퍼지는 건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날씨와 여러 외부 환경으로부터 오는 모든 일을 ‘함께’ 지나치는 자동차는 인생의 동행자이자 집이 되어주기도 한다.
한자 家(집 가)를 보면 지붕이 있다.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누구나 지붕과 벽을 그린다.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집’의 내부에 있는 것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단단한 외부선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빗줄기로부터, 매서운 겨울바람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든든함. 그래서 어떤 것이 ‘집’에 비유하게 될 때면 그 단단함과 안락함을 내포된다.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유행가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집이 되어주라.”라고 속삭이고 어떤 연애편지에는 “You are my home.”이라고 쓰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집은 명사로,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의 의미가 있지만 공간적인 의미를 넘어 공감각의 감각을 준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내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곳, 어떤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곳, 바깥의 소란스러움을 잊을 수 있는 곳. 그 모든 의미가 섞여 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구성한다.
공간뿐만 아니라 사람이 집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순간이 집이 되기도 한다. [정기 휴무: 일요일. 단! 비 오는 날엔 열어요.]라는 사랑스러운 문구가 적혀있는 전 집에서 사장님의 손맛이 듬뿍 담긴 알타리 무김치에 라면을 안주 삼아 식탁을 둘러싼 친구들이 저마다의 취향에 맞춰 누군가는 막걸리, 누군가는 맥주 또 누군가는 소주를 각자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곳이 ‘집’이 된다. 그 어떤 외부의 평가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존재하게 해주는 내 집단으로서 인생의 지붕이자 벽이 되어준다.
새벽 도로를 달리며 마주하는 차를 볼 때면 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해진다. 각자의 사연과 시간이 휴게소에서, 고속도로에서, 카페에서 섞였다가 흩어진다. 모두가 어딘가에 닿기 위해서 출발해서 수많은 도로와 신호를 통과하여 도착을 하고, 다시 출발지로 돌아간다. 차에서 내릴 때면 가끔 ‘뒷자리 짐을 확인하세요.’라는 안내를 해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몇 시간을 달려 함께 이동한 그곳에 뭔가를 두고 내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몇 시간 동안의 여러 생각과 고민 그리고 순간들이 그곳에 쌓인다. 떠난다는 것은 떠날 곳이 있어야 가능한 말이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은 다시 돌아올 곳이 있기에 밖을 탐험할 수 있다. 그곳은 모두에게 집일 것이다.
김나은 여성주의 문화 기획사·우만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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