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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99)바람을 전하는 부채

합죽선(사진 제공 = 국립무형유산원)
합죽선(사진 제공 = 국립무형유산원)

“펴지고 겹쳐지는 것은 대쪽 때문인데 / 맑은 바람이 솔솔 이는구나 / 유월 손에 들고 부치면 / 무더위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몰라 / 그러니 여러 사람과 마땅히 나눠야 하네 / 청량한 맛을 어찌 차마 혼자만 차지할꼬” 관청에서 보낸 부채를 받은 심정을 담은 고려 문인 이규보(1168-1241년)의 시구이다.

“여름 생색에는 부채, 겨울에는 책력”이라는 속담과 옛 시구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부채는 여름을 준비하며 주고받는 선물로 인기가 많았다. 선조들이 여름을 맞으며 부채를 선물한 데에는 무더위를 잘 견디는 것은 물론이고 나쁜 기운까지도 날려 버리라는 바람도 담겨 있다. 그 귀한 의미가 담긴 여름맞이 풍속은, 생활방식이 변하면서 선풍기와 에어컨 그리고 다양한 디자인의 손 선풍기의 등장에 희미해졌다.

부채는 오랜 세월 더위를 쫓는 등 생활에서 사용하며 의례와 주술 용도로 큰 나뭇잎이나 새의 깃털 등을 이용하다 점차 바람을 일으키기 편리하게 만들고 종이가 발명되면서 발전했다. 부채란 명칭도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채’인 ‘부치는 채’의 줄임말이다. 부채의 한자어 ‘선(扇)’은 새의 깃털인 ‘우(羽)’와 드나드는 문인 ‘호(戶)’가 합하여 새의 날개처럼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이며, 그 명칭은 모양과 재료 쓰임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다호리 유적의 부채자루, 정선의 서화선(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안악3호분 묘주초상 모사도(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다호리 유적의 부채자루, 정선의 서화선(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안악3호분 묘주초상 모사도(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부채는 풍속화와 부채에 그림이나 글을 새긴 서화선(書畵扇)과 다양한 문헌의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흔적으로는 기원전 삼한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다호리 유적의 부채 자루와 북한의 국보 제28호 고구려 고분인 안악3호분에 그려진 깃털 부채를 든 인물의 모습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견훤(867~936)이 고려 태조 왕건의 즉위 소식을 듣고 공작선(孔雀扇)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접는 부채 등 다양한 부채를 사용한 고려 시대에는 비단으로 만든 부채의 매매를 금지하며 백성들의 사치를 경계한 법령이 『고려사』에 전해진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부채는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선비들은 올곧음을 상징하는 대나무와 기품 있는 한지로 조화롭게 만들어진 부채를 극찬했다. 특히, 대의 껍질을 얇게 깎아 맞붙여 부챗살을 만드는 합죽선을 선호했으며, 부채를 멋과 풍류를 즐기는 삶의 도구로 팔덕선(八德扇)이라 칭했다. 부채가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고, 방석으로 쓰이며, 밥상으로도 쓰고, 머리에 이고 물건도 나르며, 햇볕을 가리고, 비를 막으며, 파리나 모기를 쫓고, 얼굴을 가리는 쓰임으로 인해 여덟 가지 덕을 지녔다 한 것이다.

매년 단옷날이면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영·통제영이 부채를 만들어 조정의 관원들에게 두루 선물하는 일이 예로부터 전해 오는 것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대나무를 조달하기 쉬운 전라도와 경상도의 주요 산지에는 종이를 뜨고 관리하는 지소(紙所)가 있어 부채를 만드는 환경이 좋았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대나무의 주산지인 담양, 구례, 장성, 나주 등과 최상품 한지를 생산하는 전주(당시 완산)가 부채의 생산지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전주에 있는 전라감영은 각 지역에서 제작된 부채를 모아 임금에게 진상했다.

'보물 제1876호 완산부지도 부분도'와 '1940년 6월 매일신보 등에 실린 전주부채'
'보물 제1876호 완산부지도 부분도'와 '1940년 6월 매일신보 등에 실린 전주부채'

전라도 관할기관인 전라감영 내에 부채를 제작하고 관리하는 ‘선자청(扇子廳)’과 ‘지소’를 두었는데, 『완산부지도』를 비롯한 여러 고지도에 잘 묘사되어 있다. 현재 완산경찰서 민원실 뒤편으로 위치가 추정되는 큰 규모의 선자청을 보면 전주가 부채의 주요 생산지임이 확인된다. 전주의 선자청이 활성화되자 타지방의 부채 장인들이 전라감영 근처로 모여들어 공방을 형성했고, 일제강점기인 1920년 폐쇄되기 전까지 선자청은 부채를 제작했다.

선자청이 없어진 이후에도 전주 부채는 일본인이 자본을 대고 부채 장인들이 부채를 제작하여 전국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당시 전주 부채의 명성은 ‘풍류와 향기를 실은 이 여름의 부채’라는 신문의 기사 제목에 “조선의 부채라고 하면 전주를 생각한다”는 것과 “전주의 합죽선을 제일로 친다”는 기사로 엿 볼 수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김동식 선자장(좌 = 가족 제공 / 우 = 국립무형유산원 제공)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김동식 선자장(좌 = 가족 제공 / 우 = 국립무형유산원 제공)

해방 후 부채 장인들은 부채골로 불리는 인후동의 가자미 마을과 아중리의 석소마을 그리고 새터, 성황당, 안골 등에 집단 거주하며 부채를 제작했지만, 선풍기의 보급에 따라 부채의 수요가 줄어들자 영세함을 면치 못했다. 대다수의 부채 장인들이 부채 제작을 그만두었지만, 부채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장인을 칭하는 선자장의 명맥은 김동식(1943년생) 선자장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김동식 선자장은 가자미 마을 출신으로 14세가 되던 1956년 아버지의 권유로 외가에 들어가 부채 제작 기술을 배웠다. 나주와 장성을 거쳐 석소마을에 정착한 그의 외가는 합죽선으로 유명한 집안이었다. 오롯이 옛 기술을 그대로 전승받은 김동식 선자장이 제작하는 부채는 기품이 있고 부챗살이 탄력이 있으면서 바람이 잘 일어난다.

2007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2015년에는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아들인 김대성(1976년생)이 합죽선의 가치를 5대째 이어가고 있으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자장들이 전통 부채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하지를 지나 점점 더워지니 옛 선조들의 취향을 더한 부채가 그리운데, 이규보의 “이로부터 해는 더디기도 하여 / 사람은 붉은 불이 되는구나 / 언제나 하늘까지 뻗친 부채를 얻어 / 키질하듯 온 천하를 부채질하리”란 시구가 눈에 들어온다. 비록, 천하를 키질하듯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킬 부채까지는 아닐지라도, 부채의 고장 전주를 찾아 얼굴에 송송 맺히는 땀방울을 다스리며 마음 한 가닥 청아한 바람을 일으키는 멋과 여유를 느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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