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는 ‘고대(古代) 7대 불가사의’라고 일컬어지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영국의 스톤헨지나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것들은 ‘현대(現代)의 7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불가사의든 불가사리든 나는 그런 구조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내가 가끔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 따로 있다. 바둑하고 음악이다.
바둑판에 돌을 놓는 자리는 기껏해야 361개다. 돌도 희거나 검은 것 두 가지뿐이다. 수가 몇 가지 안 될 것 같은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기보(棋譜)가 만들어진다. 하긴 나도 인터넷 바둑을 10년 넘게 두었지만 똑같은 판은 하나도 없었다. 음악도 다르지 않다. 몇 가지 안 되는 음표를 오선지에 연결해서 교향곡이든 소나타든 대중가요든 하나의 곡을 완성한다. 그런데 들어봤지 않은가.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곡이 이미 만들어졌고, 지금도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는 걸.
통계학을 전공한 선배한테 원리를 물었더니 온갖 용어를 들이대면서 설명을 해주는데 숫자 놀음에는 까막눈에 가까운 나로서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선배는 이런 말로 내 입에 빗장을 걸었다. “한글은 글자가 몇 개야? 자음하고 모음 합쳐봐야 스물네 개밖에 더 돼? 그런데 그걸로 쓴 문학작품은 얼마나 다양하고 많으냐고….”
바둑이나 음악보다 훨씬 불가사의한 건 따로 있다. 사람 얼굴이라는 게 기껏해야 강호동의 손바닥 넓이 이쪽저쪽이다. 거기에 달린 거라곤 눈썹하고 눈동자 둘씩에 코 하나, 입 하나가 전부다. 그런데 어쩌면 생긴 게 그토록 제각각일 수 있단 말인가. 생김새뿐일까. 저마다 성격이나 취향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세상에 꼭 같은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쌍둥이조차 예외가 없으니 그만하면 말 다했지 않은가. 조물주의 위대한 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처음 만난 사람한테 혈액형을,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물어서 은근히 편을 가르려고 싶어하는 이들을 가끔 볼 수 있다. A형은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을 갖고 있단다. B형은 말이 많고 감정기복이 심하며. O형은 리더십이 강한 기분파이고, AB형은 감정표현을 잘 안 하는데 성격은 쿨하다는 것이다. 과연 맞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O형 남자지만 스스로를 기분파라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초중고등학교 12년 동안 그 흔한 반장 한 번 못 해보고 졸업했으니 그만하면 빵점 리더십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을 재단하려 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나도 혈액형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식의 ‘아재 개그’로 응대한다. “우리 집은 남자 형제가 셋인데요, 그중에 제가 맏이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무슨 형이냐면요, ‘큰형’이에요. 동생들이 저를 ‘좋은 형’이라고까지 생각할지는 자신이 별로 없지만요.”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읽다 보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전 혈액형에 대해서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꼭 자기의 혈액형이 나타내 주는, 그, 생물책에 씌어 있지 않아요? 꼭 그 성격대로이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세상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성격밖에 없을 게 아니에요?” “그게 어디 믿음입니까? 희망이지.” “전 제가 바라는 것은 그대로 믿어 버리는 성격이에요.” “그건 무슨 혈액형입니까?” “바보라는 이름의 혈액형이에요.”
/송준호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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