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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벚꽃 동네를 행화촌으로 바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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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호 시인. 

 

'행화촌'이란 말은 옛사람들이 주막집을 은유 한 말이다.

 은유란 말은 암유(暗喩)란 말과 동의어인데, 그 '아름답게 숨겨짐'을 이미지로 씌운다. 이런 주막집이란 으레 길손 나그네가 가만가만 찾아들게 마련인, 적막한 시골길 외딴 길섶 어디쯤에 없는 듯이 자리한 칸막이 초막집이다.

 외로움으로 마냥 눈시울 붉힌 주모 아낙 하나 덩그러니 뜰을 지키는 주막이다. 궁색한 나그네에게는 돈이 없어도 그냥 탁배기 한 잔 쯤은 넌즈시 정내미로 건네는  소박한 주막 말이다. 실바람으로 머릿결 살랑이는 청보리 이랑이 시야 가득 펼쳐지고, 언뜻 초막을 비껴 살구나무 한 그루 산뜻하게 서 있다.

 느긋이 봄기운이 만창할 때 저녁노을 지피면 살구꽃 피고 이어서 막걸리 한 잔까지 연상되는 그런 정경이 우리네 추억으로 오버랩된다. 살구꽃에 얹히는 백야의 그림 한 폭으로 은은한 달빛 서리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때 보름달은 아니고 막 배불러 오는 상현달이 소슬한 초막에 어리비치면 더 좋을 성 싶다.

 노을빛은 신선이 마신다는, 저 멀리 소동파의 적벽부에 언급되는 유하를 연상시킨다. 한국 고유의 서경이며 서정성 여문 한국 시골 동네의 정경은 그야말로 별유천지 비인간 시인 셈이다. 이 때 이호우의 시조 <살구꽃 피는 마을>이 가슴 출렁이며 읊조려지는 것이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내 고향은 남원 덕과 만도리다. 산 겹겹 휘휘 둘러 시냇물은 산자락 감아 돌고, 안에 감춰진 시골 동네이지만 지금은 앞길 신작로레 살구나무를 줄줄이 심어서 일컬어지기를 행화촌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몇십 년 전에 내가 주동하여 출향인들에게 모금해 벚나무를 심었었다. 벚꽃이 만발할 즈음 고향에 가면 너무 벅찬 환희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동구에 들어서면 우선 벌 소리 윙윙거리고 봄은 무르익어서 춘정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얼마 후 나의 조부가 왜정 치하에서 독립운동한 사실이 밝혀지고 나 또한 독립유공자 유족으로 정부의 증서를 받은 이후에는 벚꽃 마을을 조성했던 사실이 부끄러워진 것이었다.

 또한 동구에 호암시비공원湖巖詩碑公園을 축성한 뒤로는 그 부끄러움이 더했다. 꿈속에서도 부끄러움에 소스라쳤다. 벚꽃은 일본 국화가 아니던가. 시비공원은 임진, 정유왜란에 맞서 항 일 투쟁하던 선비들 시비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고경명 장군을 비롯해 우리 선조 소산복 할아버지 등 항일 선비들 20여기 시비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뜻을 세워 벚나무는 모두 베어내고 역시 출향인 모금으로 살구나무 동네를 조성했던 것이다.

 벚나무 원산지는 제주도라 했고 살구나무 원산지는 중국이라 알려졌기로 이 교차된 아이러니로 인해 묘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제 그야말로 행화촌이 된 우리 동네는 이 전라도 땅에 자랑스런 마을이 된 셈이다. 

 살구꽃 핀 마을엔 배타도 아니고, 벽을 치고 지나는 동네가 결코 아니다. 술 익고 정 익는, 인간 정신이 샘솟는 동네다. 우리 동네에 산뜻한 주막집 하나 세우고 싶다. 오는 이, 가는 이 옷소매 잡고 술잔 나누고 싶다. 한국 고유의 인심을 모락모락 가꾸고 싶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럴 순 없고, 잘 아는 시인 묵객 몇이라도 불러 살구꽃 그늘에 멍석 펴 놓고 술잔치 거나하게 벌이고 싶다. 내 인생 마무리될 즈음 팔순 잔치를 이렇게 한 번 벌려봐? 상상만 해도 마냥 즐겁다. 이 삭막한 세상 한 귀퉁이라도 인정이 꽃 피는 그런 그림 하나 그리고 싶다.

 

△소재호 시인은 <현대 시학> 시 천료했다.  전북예총회장, 전북문인협회장, 석장문학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녹색시인상과 성호문학상, 목정문화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집 <압록강을 건너는 나비> <초승달 한 꼭지>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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