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좌우명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었다. 곧 광대한 도리에는 가리고 막힐 것이 없다는 것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많이 사용한다. 실사구시는 실효성 없는 이론만을 일삼는 송(宋), 명(明)나라의 이학을 배격하는 표어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등을 들수 있고 그들의 과학적 학문태도는 우리의 생활과 거리가 먼 공리공론을 떠나 마침내 실학(實學)이라는 학파를 낳게 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의 헌왕덕전(獻王德傳)에 보면 ‘학문을 닦고 옛 것을 좋아하며 현실에 충실하고 옮음을 탐구하라’는 용어로 실사구시를 기록하였다. 허황된 논리와 미려구사보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를 거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통하여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심장하다.
청(淸)나라 초기에 고증을 중요시한 학자들이 실학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이 실학사상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조선조 영조(英祖), 정조(正祖)때에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생들인 이서구(李書九) 이덕무(李德懋)등의 시문을 유탄소(柳彈素)가 ‘건연집(巾衍集)’이라는 표제로 엮어 청나라에 소개하자 청나라 실학파 연구가들이 감탄하여 실학4대가로 호칭하게 되었다.
실학자들은 당시 지배계급의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배격하고 실학문화를 정착케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김정희(金正喜)와 같은 실학파들이 모든 탄압과 모략을 감수하면서 실사구시의 학문방법이 추구되었다.
실사구시는 이학이나 예학 등 전래의 방법을 탈피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개혁하자는 것이 근본 취지다. 그러므로 보수세력의 압력과 지탄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근대지향적인 사실과 고증으로만 대응하기에 누구도 항변하지 못하고 수긍하였기에 실학문화가 급진전하여 조선조 후기에는 성해응(成海應), 이규경(李圭景), 이제마(李濟馬)등 많은 실학자들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실사구시의 정책이 미급하나마 시작하게 되었다.
실사구시책이 정착되기도 전에 왜제 침략과 개화기를 맞아 구심점이 흐려진 면도 없지 않다. 실학파인 정약용(丁若鏞)은 실학을 개신(改新)학이라 부르면서 서양문명에 눈과 귀를 기울여 근대지향의식의 개혁에 초석을 놓았고 정서도 닦았다.
김대통령이 주창하는 실사구시도 허세나 허풍을 배제하고 내실있는 국정쇄신으로 국민성을 개혁하여 세계화된 오늘의 현실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자는 것이라면 과장된 해석일까?
/양복규(명예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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