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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운 사람] 명창 안숙선

- 판소리에는 인생과 우주가 있어요

 

우리 판소리를 대중들의 가슴속에 자리잡게 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다. 소리꾼의 고난에 찬 일생을 가슴 절절하게 그려낸 이 영화속 장면치고 어느 것 하나 인상깊지 않고 감동적이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애잔하게 마음을 앗은 장면은 역시 눈먼 소녀 소리꾼 오정해가 부르는 ‘심청가 ’ 대목이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그 애절하고도 슬픈 소리가락. 가슴 에이는 슬픔과 한으로 관객들을 감동시켰던 그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그이가 바로 우리 시대의 명창 안숙선이다.

 

“소리꾼은 무대를 떠나면 안되지요. 나는 언제까지나 무대에 서는 소리꾼이 되고 싶어요. 오십을 넘어선 지금, 비로소 무대를 알 것 같으니 이제 다시 시작인 셈이지요.”

 

명창 안숙선씨(50). 말을 아끼는 그답지 않게 거침없이 쏟아놓는 말 한마디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어서일까. 그는 절제하면서도 단호한 표현으로 자신의 예술을 이야기했다.

 

춘향가부터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그리고 여자 소리꾼으로서는 좀체 하기 어려운 적벽가까지 다섯바탕을 완창해낸 욕심많은 소리꾼. 가야금병창으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명인. 창극무대에서는 관객들을 사로잡는 끼많은 배우. 사물놀이부터 클래식음악,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와의 만남을 시도하는 클로스오버나 퓨전작업에도 가장 열정적인 국악인. 그가 문화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명창이라는 바탕에는 이런 화려한 역할이 올려져 있다. 이 만만치 않은 활동의 반경을 얻기 까지 40여년 소리길 연륜속에 어찌 고난과 고통이 없을까마는 어찌 됐든 명창 안숙선의 예술은 오늘에 이르러 한국문화의 중심에 당당하게 서있으니 그 삶의 과정 또한 눈물겹지만 아름다운 여정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 소리길에 들어섰다. 명석하고 재기 넘쳤던 그를 소리꾼 재목으로 눈여겨 보았던 이는 그의 이모. 역시 가야금명인인 이모 강순영씨는 그이 아홉살때 소리꾼 주광덕에게 입문시켰다. 두번째 스승은 외당숙이자 동편제 소리의 마지막 적자로 끝내 고향을 떠나지 않았던 남원의 명창 강도근. 그의 소리가 애절한 서편제 품새에서도 곧고 치열한 소리속을 배어 내는 까닭은 바로 이 두번째 스승으로부터 받은 소리 물림 덕분이다. 어린시절부터 소리재주가 유난히 빼어났던 그는 동네 애기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일찌감치부터 명창재목으로 싹수를 보인 셈인데 덕분에 학교에서도 민요나 판소리, 무용 창극무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의 차지였다. 공부도 남들에 뒤지지 않았지만 근근한 가정형편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아예 국악인이 될 요량으로 남원국악원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열다섯살에는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까지 작고했다. 어머니와 남동생과 여동생 넷이 그에게 오롯이 남겨졌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 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배움에 대한 욕심은 긑이 없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김소희 박귀희씨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당시 김소희 박귀희씨는 국악계의 쌍벽을 이루는 명인들이었다. 따라서 선의든 아니든 서로를 경계하고 경쟁하는 의식이 없었을리 없는 이 두명의 스승을 오가며 소리와 가야금병창을 익힌 그의 예술적 욕심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의 예술인생이 본격적으로 열린 것은 79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그는 창극무대에서 더욱 돋보였다. 신재효가 일렀던 명창의 요건이 무엇이던가. 첫째가 인물치레요, 둘째가 사설, 세째가 득음이요, 네째가 너름새 아니던가. 안숙선은 이 네가지 요건을 두루 갖춘 흔치 않은 재목이었던 것이다.

 

“국립극장 무대는 정말 나에게 오랜 꿈을 실현시켜줄 그런 공간이었어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지요. 이 무대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요. ”

 

별생각 없이 들은 이 말의 의미가 특별했다. 그래서인가. 그는 79년 이래 지금까지 단 한번도 국립창극단을 떠나지 않고 있다. 98년에는 국립창극단 단장을 맡기도 했지만 지난 연초에 미련없이 단장직을 그만두고 예술감독으로 앉았다. 내심으로는 자기 시간을 더 벌어볼 요량이었다지만 그의 분주한 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처럼 보였다.

 

그의 무대 활동에 대한 열정은 바로 이곳 국립창극단에서 꽃을 피웠다. 86년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던 판소리 대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가했다. 고향 남원에서 열리는 춘향제를 기념한 판소리 명창대회였는데 그는 보란듯이 단한번의 도전으로 대통령상을 거머쥐었다. 그사이 그는 여러명의 명창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더늠을 물려받았다. 적지 않은 수입의 대부분이 그 몫으로 오롯이 들어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강도근 박봉술 정광수 정권진 성우향. 그리고 먼저 입문했던 김소희와 박귀희씨까지 친다면 당대의 명인 명창들을 모두 스승으로 모신셈이다.

 

“스승들의 소리빛깔, 이를테면 각 바디의 특징을 고루 익히고 싶었어요.” 소리에 대한 욕심이 하늘을 찌르지만 당대 명창들의 소리의 골기를 자기것으로 만들어 독창적인 자기 소리 세계를 구사해내려는 그의 노력은 새삼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또 한가지, 자기 소리의 연마를 위해 스스로 절제하고 자기 안주를 극복해내려는 그의 노력 또한 눈물겹다. 다른 음악 장르의 전문가들이 그의 음악세계를 주목해 줄곧 결합을 시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소리에는 우리 인생이 들어있어요. 우주가 있고 자연이 있지요. 나는 웃음과 눈물로 바로 우리들의 인생과 우주를 담아내고 싶어요.”

 

작은 체구, 크지 않은 음성. 도대체 그이의 어디에서 그 깊고 넓은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

 

“소리를 몸으로 하나요? 정신과 마음으로 하지요. 그래서 의지가 중요해요. 예술은 곧 정신이니까요.”

 

지난해 연초 전주에서 공연했던 국립창극단의 창극 ‘천명’의 장면이 떠올랐다. 농민군의 아내로 분해 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끌어오르는 슬픔과 한의 소리를 울려냈던 명창 안숙선의 예술이 빛나보이는 바탕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 안숙선 경력 - 나이 오십에도 무대에서는 꽃같은 만년 ‘춘향’

 

안숙선은 1950년 남원 산외에서 태어났다. 아홉살때 소리를 시작했고 초등학교를 졸업한뒤 남원국립국악원에서 소리를 배우다가 서울로 갔다. 69년부터 명창 김소희 문하에서 소리를 받았고 70년대 초반에는 가야금병창의 명인 박귀희 문하에 들어가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박귀희는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해 후계자로 지목했고 그 덕분에 판소리 명창으로보다 가야금병창 명인으로 먼저 이름을 얻기도 했다. 86년에 남원 판소리 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명창의 반열에 오른 그는 당대의 명창들을 찾아다니며 소리를 배워 명창들의 더늠을 고루 익히는 특성을 갖추었다. 86년부터 해마다 한바탕씩 다섯바탕을 모두 완창한 것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스승에 따라 각 더늠을 고스란히 살려낸 무대로 높은 관심과 호평을 받았다.

 

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이후, 장막창극 ‘춘향전’과 ‘심청전’을 비롯해 수많은 창극무대에서 주역으로 섰으며 특히 춘향전으로는 나이와 관계없이 줄곧 춘향역을 맡아 ‘만년 춘향’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중요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지난 연초 국립창극단 단장을 그만두고 예술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이후에도 국립창극단에서 그가 할일은 여전히 많다. 국내는 물론 해외공연무대를 통해 판소리의 예술성을 널리 알린 그는 98년 프랑스 정부가 주는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큰딸 최영훈씨(국립창극단 반주단원)가 거문고를 전공, 그의 뒤를 잇고 있다.

 

◇ 취재뒷얘기 - 판소리가 아닌 가야금병창으로만 기능보유자된 사연

 

인터뷰가 있는날, 국립창극단장실에서 만난 그는 분홍색 티셔츠에 회색스커트가 소박하고 단아했다. 7월 마지막주부터 제자들과 청평에 여름공부를 들어가있다가 인터뷰와 오후의 방송 출연으로 서울에 나온 그는 창극단장실에 곁방살이하고 있는 처지(?)가 내심 불편해 보였다.

 

“예술감독 방이 따로 없어 불편함이 적지 않지만 책상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예요.” 그는 창극단장을 그만두면 자기 시간을 많이 갖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무대 활동에 전념하고 자기 소리 공부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겠다는 욕심이라고 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되지 않는단다.

 

국악 대중화를 위해 자신의 공연활동이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그에게 무대 공연은 곧 대중들을 국악으로 끌어들이는 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어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무대 공연을 쉽게 외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그는 요즈음 걱정이 하나 늘었다. 2학기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전임교수로 임용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 충분히 활동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무래도 전임으로 자리를 잡으면 개인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을 털어버릴수가 없다고 했다. 기회가 된다면 작창에도 손을 대고 싶다는 무대공연에 대한 열정에 비추어 그의 우려는 무리가 아닌듯 싶었다.

 

그의 아픈 대목(?)을 끄집어 냈다. 그가 판소리로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지 못하고 가야금병창과 산조로 기능보유자가 되어 있는 까닭을.

 

“뭐라 설명할 수 없어요. 복잡한 문제가 얽혀서지요.” 사실 국악판에서 그는 질시의 대상이다. 유난히 독보적인 활동으로 워낙 자리가 큰 탓이다. 누구보다도 김소희선생의 소리를 오롯이 받았다고 하는 그가 소리 기능보유자 반열에서 밀려나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그는 의연하다. 사진을 위해 모처럼 한복이 아닌 양장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싫은 내색하지 않고 그는 감색 원피스를 입고 나섰다. 무궁화꽃 옆에서 활짝 웃는 모습이 색다르고 아름다왔다.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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