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의 하나가 소위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무엇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이유 같은 것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사과를 꼭 ‘사과’라고 불러야 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사과’라고 불러도 좋고, ‘애플(apple)’이라고 불러도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가령 우리가 제각각 가지고 있는 자기 이름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이름자로 쓰는 글자들은 대개, 착하다, 예쁘다, 밝다, 똑똑하다 등의 뜻을 가진 말들이다. 그냥 아무렇게나 붙인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가 합쳐져서 된 말이다. 그렇다면 ‘판’은 무엇인가. ‘씨름판’, ‘노름판’, ‘놀자판’ 등을 생각해 보자. 이럴 때 ‘판’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벌이는 장소’라는 뜻이다. 씨름판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씨름을 하는 곳이고, 먹자판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먹는 장소이다.
‘소리’는 ‘우선 청각에 의해 느끼는 공기의 진동’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소리에는 자연의 소리, 물체의 소리, 사람의 목소리, 짐승의 소리 등이 다 포함된다. 그런데 판소리에서 쓰는 것과 같은 ‘소리’란 말은 남도소리, 서도소리, 논매는소리 등에서 보인다. 곧 민속음악에서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소리’란 말은 목소리로 부르는 성악곡에만 쓴다. ‘가야금 소리’라고 쓸 수도 있지만, 이럴 때 ‘소리’는 음악이란 뜻은 아니다. 그리고 또 정악에서는 쓰지 않는다. ‘시조소리’, ‘가곡소리’ 등의 말은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판소리’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부르는 민속음악 성악곡’이라는 뜻이다.
뜻밖에도 ‘소리’는 ‘전주소리축제’에서 문제가 되었다. 소리를 ‘청각에 의해 느끼는 공기의 진동’이라고 보면, 전주소리축제에서는 모든 소리로 된 음악,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음악(전위음악까지 포함해서)이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소리를 ‘민속음악 성악곡’이란 뜻으로 보면, 판소리나 민요가 그 중심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 최동현 (군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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