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전을 보면 무용지용(無用之用)이란 말이 눈에 띈다.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은 쓸모 있는 것이란 뜻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견 필요 없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절대로 필요한 요소라는 것을 잊은 채 지내는 일이 많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육 현장에서도 이런 일들은 많다.
일선 학교에서 학급을 경영하다 보면 으레 소위 지도하기에 힘겨운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교사 역시 인간인 이상 자연 힘이 덜 드는 아이쪽에 자주 시선이 끌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학교의 모든 교육 행사가 대부분 상 받는 아이들을 기준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칭찬 받을 행동, 상 받는 아이 그것이 곧 교육의 목표인 양 전개되는 것이 교육 현실이란 것이다.
따라서 가르치기 힘겨운 아이들쪽은 항상 꾸지람 아니면 무관심 속에 교사의 시야를 벗어나 있기 일쑤다. 그들에겐 기껏해야 잘하는 아이들을 위해 박수를 쳐주는 일만이 있다. 아무도 왜 그들만이 박수를 치고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거론치 않는다. 그러나, 알다시피 잘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저 소인국에서 거인국에 간 걸리버처럼 아무리 잘하는 아이라도 더 잘하는 집단 속에 가면 열등생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학급을 경영하다 보면 잘하는 아이들과 못하는 아이들간의 집단 이질화 현상은 심각하다. 학기 초 학급 아이들의 소시오그램을 작성하다 보면 많은 아이들의 선택을 얻는 아동들을 보는 시각과 아동들이 아동들 자신을 보는 눈의 차이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시각에서 보면 결코 이상한 사태는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 모두가 물건을 흘리지 않게 잘 싸 왔던 비닐 봉지를 용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헌신짝처럼 아무 데나 내버리듯 교사의 시계권 밖에서 말없이 앉았다 가는 아이들의 말없는 기여를 잊고 있는 교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솝우화에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가 있다. 개미는 다 알다시피 근면하고 성실한 동물이다. 반면에 베짱이는 늘 먹고 노는 성실치 못한 동물이다. 우리는 그러한 이들을 보고 당연히 개미에게 찬표를 던진다. 이야기의 결말 역시 춥고 배고픈 베짱이가 비굴하게(?) 개미의 집을 찾아가는 걸로 결말 지어져있다. 그러나, 과연 베짱이는 그처럼 무용지물이었을까? 그건 아니라 본다. 개미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 그 또한 즐거운 음악으로 지나가는 개미의 피로를 씻어주는 공로가 없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어느 날 매일 먹고 잠만 자는 위를 보고 손과 발 그리고 입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들은 늘 열심히 일만 하고 맛있는 것은 저 위가 혼자 다 먹으니 내일부터 우리 모두 일을 하지 말자"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음식을 먹지 않으니 위는 영양분을 만들 수 없고 그 결과 입도 손도 발도 모두 힘을 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가치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열려진 생각 속에 저마다 '거기 있음'에 긍정적으로 인정해 주고 나아가서 보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우리 주변의 사물을 바라볼 때 불교에서 말하는 '처처불상'이라는 심경에 이르지 않을까 한다.
그 어느 것도 버릴게 없다는 의식개혁이 없이는 이 사회는 항상 살벌한 경쟁의 마당이요, 사랑은 언제나 외톨이로 남게 될 것이다. 버리려고 하는 한 장의 비닐봉지에도 나와 우리를 의식하는 더불어 사는 시민 정신과 아울러 저마다의 보이지 않는 존재 가치를 인정해 줄 때 우리 사회는 보다 밝고 명랑한 맑은 사회가 되리라 믿는다.
/ 최남호 (이리부천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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