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만갑은 스승 박만순의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하루 아침에는 부모에게 절하고 표연히 객지에 나섰'다고 하였다. 그가 언급한 곳은 순창, 담양, 광주, 전주, 곡성, 충주, 제천, 부여, 강원도와 경상도 등이다.
가는 곳마다 송만갑의 소리 들어보자는 사람이 많아서 아무 불편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서른일곱 살(1902)부터 마흔여섯 살 되던 해(1911)까지 서울에 머물렀다고 하였다.
그가 서울에 온 시기는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칭경식)를 위해 협률사라는 극장을 짓고, 전국의 명인명창들을 불러들인 때와 일치한다. 이 때 상경한 소리꾼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까 협률사 극장이 생긴 이후 판소리 창자들이 서울에 오래 머물며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장이라는 출연 공간이 생기면서 서울에 머물게 된 것으로 보인다. 송만갑이 궁내부 별순검이라는 벼슬을 한 것도 이 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송만갑은 서울에 있다가 나라의 명을 받고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기차도 기선도 놓이지 않은 이 산천을 막대 끝이 닳도록 이리저리 잘도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그런데 송만갑의 자서전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이 있다. 그가 민영환을 모시고, 상해를 들러 미국에까지 가서 3년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봉천, 북경, 상해 등지를 골고루 보았다고 하였다.
판소리 명창이 궁내부 별순검이라는 실제 직을 수행했다는 것만도 신기한 일인데, 그에 더하여 송만갑은 중국, 미국까지 여행을 했다니, 가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연유로 민영환을 송만갑이 모시게 되었는지도 알 수는 없으나, 본인이 기술한 자서전이고 보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송만갑은 송기덕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역시 판소리를 해서 몇 장의 음반을 남겼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높은지 꼭 여자 목소리 같았다. 그런데 송기덕은 그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송순섭 씨가 부산서 공연할 때 같이 공연했던 박록주를 어떤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는데, 아마 송만갑의 아들 송기덕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만 한 번 들었을 뿐이었다.
송만갑은 평소에도 마음씨가 너무 좋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리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박동진 씨도 돈이 없어 배울 수가 없었는데, 아침부터 조선성악연구회에 열심히 나가는 것을 본 송만갑이 방안으로 불러들여 박타령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송만갑은 1939년 1월 1일 하필이면 새해 첫날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 판소리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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