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철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물로 오래 눈을 씻었다
―‘우물 무덤’ 중에서
정인섭 시인(47·해성고 교사)이 네번째 시집 ‘꿈을 꾼 뒤에’(문학동네)를 펴냈다. 80년대 말 ‘어둔 밤’(문학과지성사·1987)‘무진 일기’(문학과지성사·1989) 이후 13년 만에 낸 시집이다.
안도현 시인이 “전주 하늘 아래 같이 살면서도 몇 년째 정인섭 형은 두문불출”이라고 말한 것처럼 매주 한번 서점에 들러 책 한 무더기를 안고 사라지는 모습만 보였을 뿐 그 어느 모임에서도 시인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모처럼 펴낸 그의 시집은 그래서 더욱 관심을 모은다. “술집과 유곽 대신 상처의 마을을 쉬지 않고 들락거렸던 것”으로 보이는 그의 시들은 13년의 여백속에 침묵하며 90년대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역사와 종교 안에서 세상을 보는 일에 더 치열해져 있다.
‘내 종교 외투가 다 낡아서 몸은 춥고/옛사랑 역사는 내 귀싸대기를 치며/넋에 울타리를 치는군/나 지친 사나이, 낭떠러지를 더듬더듬 가는 사람’(‘사람처럼’ 중).
90년대 초 잠시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수도생활을 한 경험때문이었을까. 그는 지난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종교와 역사의 속박을 끝내 벗어 던지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김수이씨는 “역사와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생생한 언어와 육화된 사유를 확보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역사와 현실에 놓였던 무게중심은 보편과 서정으로 옮겨갔고 명료한 표현에 담긴 그의 메시지는 구체적인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더 의미심장해졌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시인 스스로도 “소박하고 개인적인 것에 관심을 보였고… 예전보다 서정적인 모습이 많아진 것도 같다”고 털어놓는다.
그 동안 시인이 끈질기게 매달려온 이미지는 ‘우물’. 김현 김주연 성민엽 등 문학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시인이 그려낸 우물은 비극의 역사와 수난의 종교사, 민중의 생명력과 화합, 어두운 내면의 상징으로 다양하게 그려지고, 그것은 시인과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시인은 “이 시집에 나타난 우물도 ‘만지니 묻어나는 다 못 한 사랑’처럼 개운하지 않다”며 “끝까지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말하지만 많은 평론가들은 ‘먼 땅 밑 우물의 나라’(어둔 밤, 1987)가 표상 했던 지하·죽음의 세계는 이번 시집을 통해 삶과 죽음의 고리를 잇는 ‘부활의 우물’을 거쳐 화합과 연대의 공간으로 변화했다고 평가한다.
“오랫동안 하나의 상징을 탐구하고 완성시킨 끈질긴 노력은 이즈음의 시단에서 발견하기 힘든 귀하고 귀한 덕목”이라고 말하는 김수이씨의 평이 아니더라도 그의 시들은 우리 시에서 ‘우물’이 보여주는 최대 진경을 정말 진진하게, 감동적으로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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