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줄타기·가무음곡·재담·농악 등을 공연한 협률사(協律司)는 조선 후기 창악인들이 조직한 예술단체. 이들의 연예활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자 1902년 고종은 170여명에 이르는 명인·명창들을 모아 희대(臺:舞臺)를 만들고 이를 관장하는 협률사를 두었다.
이 무렵, 예술단체인 협률사가 연희하던 무대도 똑같이 ‘협률사’로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최초의 관립극장, 5백석 규모의 옥내 극장이다.
전북예술회관에서 31일과 9월 1일 오후 7시에 공연될 창극단 협률의 ‘협률사-광대의 길’(연출·대본 이보근 작곡 한상일)은 조선 창극 1백년의 역사를 통해 조선 창극사를 조명하는 작품.
연출 이보근씨(48)는 “창극의 탄생·변화 과정을 객관적인 고증을 통해 재현했다”며 “광대의 길이란 부제에서 느껴지듯 판소리의 새로운 모습을 찾으려는 소리꾼들의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그 해 흉년과 일본 ·러시아 등과의 국제적 문제로 협률사(協律司)도 협률사(協律社)로 바뀌고 그 이듬해 경영권도 민간으로 넘어가 사설극장으로 변하면서 한국 연예계는 일대 변혁을 겪는다.
“서양식 실내 극장인 ‘협률사’로 인해 공연환경이 바뀌지만 일제의 문화정책에 의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때부터 다섯 명창의 소리길에 대한 또다른 고뇌가 시작됩니다”
관립 극장 협률사는 문을 열고 닫기를 거듭하다가 공연장의 풍기문제 등의 이유로 1906년 4월17일 문을 닫았다. 예술단체의 활동도 위축되어 갔다. 그 뒤 1908년 이인직에 의해 원각사(圓覺寺)로 재출발한다.
“원각사는 주로 신극만을 상연했고 생업에 위협을 받게 된 전속 창극단체 협률사는 지방 순업(巡業)으로 전락, 해산되었습니다”
소리와 광대의 길에서 방황하며 전국방방곡곡을 떠도는 소리꾼들.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운동은 창극을 최고의 융성기에 도달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동백, 정정렬, 송만갑 선생 등 당대의 다섯 명창들은 하나둘 세상과 등지게 되지요”
작품은 창극의 태동부터 변화 발전 성쇠 부침 등 변모과정을 돌아봄으로써 한 단계 성숙한 고유 전통예술의 앞날을 예견한다.
이보근씨는 “창극의 중심은 소리이고 소리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창극 ‘협률사’의 본래 의미라고 설명한다.
협화(協和)와 율려(律呂)를 조합해 극단 이름을 만든 창극단 ‘협률’도 서로 협력하고 화합하는 속에서 우리의 음률을 발전시키고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맛을 담고자 하는 뜻에서 지난해 창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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