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부터 '이희중의 문학편지'를 연재합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는 문학이 결코 우리 삶과 따로 있지 않음을 다양한 풍경으로 전해줍니다.
상처와 맹목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필자의 글쓰기가 독자들을 문학의 진정한 향기로 안내 할 것입니다.
97년부터 전주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중인 필자는 1960년생으로 고려대 국문과과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대시학'(89년)에 시가, '경향신문신춘문예'(92)에 평론이 당선된 이후 시집 '푸른 비상구'(민음사)와 '참으로 오래쓴 가위'(문학동네), 평론집 '기억의 지도'와 '현대시의 방법 연구'를 펴냈습니다.
'이희중의 문학편지'는 수요일의 '책과 세상'에 격주 고정물로 독자들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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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개론 수업을 시작할 때 학생들에게 장난삼아 물어본다. 소설을 읽다가 운 적이 있는지, 영화나 텔레비전 방송을 보다가 운 적이 있는지. 줄잡아 문과쪽 학생들은 70%, 이과쪽 학생들은 30% 정도가 그런 적이 있다고 한다.
이 간이조사 결과에 놀라는 이들이 많을 듯하다. 소설을 읽다가 운 적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음에, 운 적이 없는 사람은 운 적이 있는 사람이 많음이 놀랄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부끄럽고 나약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을 걸어잠그고 혼자 울거나 마음속으로만 울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부터 막무가내로 고여오는 슬픔을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쉬운 일도, 권할 일도 아니다. 물론 그런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정이 더 심각하다고 해야겠지만.
우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평소에 억눌러온, 자신의 진정한 내면과 만나는 일이다. 참담한 삶의 곡절을 담은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참으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정서적으로 더 건강한 사람이다. 찾아보면 내 일도, 이웃의 일도 그럴 가능성이 많다.
옛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시대에 유행한 슬픈 연극을 보고 사람들이 무더기로 우는 현상을 설명하면서, 카타르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는, 소화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이 말을 공포, 연민, 안도감 등의 말로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 설명이 꼭 들어맞는다고 하기는 어렵다. 현대의 어떤 소설과 영화가 독자나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슬픔은, 공포와 안도감으로는 다 설명하지 못할 만큼 복잡하다. 현대의 소설과 영화는, 왕족과 귀족의 삶을 그린 옛 그리스의 슬픈 연극과 달리, 평범한 이들의 삶을 그리는 수가 많다.
외디푸스의 삶이 드러내는 운명적 좌절과 조세희가 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난쟁이의 삶이 봉착하는 사회적, 실존적 좌절은 같은 종류가 아니다.
후자의 슬픔은 불치의 병에 신음하면서 운명과 대결하는 어떤 인간의 일상이나,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을 담아낸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슬픔과 종류가 같다.
이런 유의 슬픔을, '진실과 직면하는 감동'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이 고민의 끝에서 대개 죽음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보다 정도가 덜한 다양한 불행의 가능성들이 우리를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누구나 불안과 두려움을 잊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우리는 크고 작은 잔치를 장만한다. 생일 잔치, 기념회, 환송회, 환영회, 기념회, 술자리, 농담, 우스개, 반가운 인사말 등, 이 수많은 문화적 장치들은 우리를 위로하고 한 순간의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두려움은 우리들 삶의 참모습에 닿아 있다. 따라서 두려움을 외면하는 일은 진실을 가리는 일이 된다. 잠시 행복할 수는 있겠으나 영원히 진실을 등질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어떤 소설이나 영화는 삶의 참모습을 눈앞에 불러다 놓고, "이게 삶의 참모습이야"라고 속삭입니다. 믿기 싫은, 우리 삶의 보잘것없음, 누추함, 억울함, 이런 진실에 직면하여 우리는 드디어 울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은폐와 기만으로 삶의 참모습이 왜곡될 수 없으며, 삶의 참모습을 날 것 그대로 대면해야만 영혼의 성숙을 기할 수 있다는 준엄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저녁 뉴스를 보다가, 영화나 소설을 보다가, 마음이 기우뚱거리기 시작하면, 즉 슬픔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하면, 헛기침하지 말고 그 파도에 실려 슬픔을 맘껏 즐기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우리 삶의 참담한 조건을 확인한 후 오늘의 소중한 의미를 곰곰이 따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이희중(전주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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