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시인 최형선생(75)이 모처럼 시집을 냈다. 서사시집 '다시 푸른 겨울'에 이어지는 '들길'(신아출판사)이다.
시집의 시편들은 10여년의 세월을 안고 있다. 시인은 "서사시집 '다시 푸른 겨울'에 끼어들지 못한 시편들을 모아냈으니 근작들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76편 그의 시들은 예전의 시에 비해 한결 소리 낮추어져 있지만 여전히 '푸른' 빛이고 뜨겁다. 자청해 교직에서 물러난지 20년. 익산 용동면의 시골집에 칩거해 창작에 전념하면서도 민주화와 관련된 싸움현장에서 여전히 청년으로 살아온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 현실에 가하는 비판, 농촌의 암울한 풍경을 향한 절박함, 확연한 역사의식이 관통하는 이 시들은 시인이 치유할 수 없는 상처이자,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단정하지만 여운이 깊은 시들의 존재는 고통스러운 역사를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껴안는 시인의 고행을 그대로 보여준다.
'눈 덮인 들을 걷는다. 논두렁 밭두렁도 지워지고 들을 누벼나간 강줄기 허연데 억새풀 동둑만 둥두렷이 이어졌다.-중략- 억새풀은 눈 속에 엎디어 비록 흐린 날일수록 꽁꽁 추울수록 되레 환한 빛을 안고 눈 덮인 들을 걷는 것이다./들길4'
치열한 운동의 현장에서 가쁜 숨쉬며 목소리 높였던 노시인이 숨 고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인은 '역사에 대한 각성과 그 각성 끝에 얻은 낙관과 기대감'으로 서정성 짙은 '들길' 연작을 얻었을 터였다.
1부와 2부가 사회와 개인적 삶에 대한 비판과 성찰의 의식이라면, 3부는 역사에 대한 그의 신념이 그대로 살아나는 영역이다.
시인은 이러한 특성을 살려 비교적 비판적이거나, 좀더 긍정적 시각의 서정적인 것, 그리고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것들을 나누어 엮었다. 독자들을 위한 배려라고 했다.
시인은 저항적인 시를 '사나운 것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사나운 시와 사납지 않은 시의 경계는 없다. 현실에 역사에, 그리고 삶을 향해 한결같이 깨어있는 그의 시들은 개인적 성찰을 통해 생명을 얻은 것들. 그러나 그 생명은 사적인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곧 최동현시인의 말처럼 '민족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함께 안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상처이고 각성이다.
"시골에서 자란 나로서는 이제 내 진짜 삶터를 찾아돌린 시늉이다. 그런 시골살이다. 땀 흘릴 수 있는 젊음이 가버린 것만 허전하다.”고 말하는 시인은 "몸이 부실해지니 창작도 예전 같지 않다”지만 사회변혁을 위한 뜨거운 현장에 나서는 일만은 지금도 미뤄놓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파장의 호박잎처럼 내놓았다'는 시인의 시들은 우리에게 역사를 일깨우고,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그것은 때로 절망이지만 종국에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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