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한 도심을 떠나 산골마을을 찾아든 화가는 행복했다. 혼자가 된 공간, 철저하게 외로워졌으나 어느때고 침묵하고 싶을때 침묵할 수 있고, 대나무 숲에서 사각거리는 바람소리 방문 열면 머뭇거림 없이 문턱 넘어오는 소통의 삶이 좋았다. 화가는 이곳에서 두번의 봄과 겨울을 났다. 그 사이 섬진강변 아름다운 풍경들은 계절을 담아 생명을 얻었다. 화폭 속 풍경들이 살아나 숨을 쉴때 화가는 비로소 자연의 존재에 눈뜨게 되었다.
화가 송만규(48)의 작업실은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 있다. 나지막한 뒷산, 흙담과 돌담이 이어지는 구미마을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풍경화다. 고려말에 형성된 이 마을은 6백년 전통이 숨쉬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예전에는 3백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3분의 1로 줄었다.
전주 풍남동 동학혁명기념관 지하에 작업실을 얻어 5년동안 지냈던 그는 아는 스님의 소개로 구미마을의 작업실을 얻었다. 큰돈 들지 않았다. 집주인은 오랫동안 비어둔 살림집에 화가가 들어오겠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반가워했다.
"늘 꿈꾸었던 공간이었어요. 흙담과 마당, 뒤편의 대나무 숲, 꼬불꼬불 이어지는 골목길까지 그 모두가 마음 설레게 했습니다. 아내와 두딸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기와를 얹은 한옥 두채, 그의 작업은 윗채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서까래를 훤히 드러낸 작업실은 구들장에 기름얹힌 장판을 발라 온돌의 특성을 그대로 살렸다. 아래채는 밥짓고 쉬고 자는 공간이지만 한밤중 잠에서 깼을때는 곧바로 작업 공간이 된다. 공간은 분리되어 있으되 작업실은 따로 있지 않다.
새벽녘, 눈을 뜨면 화가는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집을 나선다. 마을에서 십리쯤 떨어진 장구목까지 걷거나 차로 달려 새벽강에 이르면 안개 자욱한 섬진강 물줄기는 화가를 맞아 서서히 눈을 뜬다. 두번의 사계절을 거치는 동안 그가 만났던 새벽강과 강으로 이르는 길위 풍경들은 모두 화폭에 담겼다. 손바닥 몇개면 가릴수 있는 작은 풍경으로, 혹은 10미터에 이르는 대작으로 태어난 풍경들을 서울과 전주의 관객들은 오는 6월 도심의 전시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일상과는 분명하게 분리된 형태로 이루어졌어요. 그러나 지금은 일상 그 자체가 온전하게 그림으로 가는 행위입니다. 화가로서 더이상 행복할 수 없지요.”
길이 새로 나 전주에서 1시간 30분이면 족히 도착하지만 그는 가능한 전주와 구미마을을 오가는 일을 경계한다. 70년대부터 문화운동의 현장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가 온전한 화가로서의 자리를 다시 찾은지 10여년. 세상일을 밀쳐두고 작업에만 전념하는 일이 아직도 쉽지 않아 스스로 마음 추스리기 위한 방편이다.
화가는 창작이란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때 비로소 뜨거워졌음을 알게됐다고 말했다. 그는 구미마을 낯선 공간 속으로 들어가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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