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 명창의 소리와 주봉신 명인의 북장단으로 흥보 내외가 박을 탄다.
‘요순 시절 태평 노인 나 정도나 먹었으며, 배부르고 등 따순들 나 정도나 즐겼던가 (중략) 형제는 원망도 화도 없다. 어이 그리 모르는가…’. 소리꾼의 발림과 아니리, 고수의 추임새가 워낙 좋은 탓에 웃음보와 눈물샘에 흥이 절로 난다. ‘강구노인 함포고복 날만치나 먹었으며, 엽피남묘 전준지회 날만치나 먹고 즐기든가’나 ‘형제는 불장노 불숙원을 어이 그리 모르는가’ 식의 한시나 고사성어·한자어 사설이 우리말로 바뀌어 불리는 소리여서 내용을 알아듣기도 쉽다.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판소리연구단이 마련한 ‘판소리 영문자막 시연 및 현대어 개작 판소리 시연회’가 5일 오후 7시 전주전통문화센터 경업당에서 열렸다.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 육성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판소리 사설의 채록 정리 주석 번역 및 실용화시스템 개발에 관한 연구’ 두 번째 보고회다. 지난해 5월 영문자막을 선보인 첫 번째 보고회처럼 각 대학에서 강의하는 외국인 강사나 미국·베트남·키르키즈스탄 등 외국인 교환학생, 판소리연구자, 판소리 매니아들로 객석은 발디딜 틈 없이 찼다.
영문자막 스크린을 배경으로 젊은 소리꾼 장문희가 박봉술 바디 적벽가 중 ‘군사 설움 대목’을 불렀고, 김연 명창은 김연수 바디 흥보가 중 ‘흥보 박타는 대목’을 현대어 사설 판소리로 바꿔 불렀다. 낯선 현대어 사설 초연이 떨리기도 했을테지만 김연은 무르익은 발림으로 예전보다 더 흥이 나 소리를 풀며 좌중을 휘어잡았다.
하지만 기대가 커진 탓인지 이번 보고회를 앞세운 판소리 현대화에의 주문도 적지 않았다. 보고회에 대한 제언도 이어졌다. 주최측은 “창자와 청중을 배려해 쉬운 부분으로 준비했다”고 했지만 현대어로 개작된 사설 ‘흥보 박타는 대목’은 의태어·의성어가 많고, 다른 사설들에 비해 그다지 한자투가 많지 않아 굳이 현대어 개작사설의 예로 선보이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는 지적이었다.
또랑광대의 새 판소리 등 현대어로 개작된 사설의 갈 길도 여럿있다는 사실은 소리꾼들의 반응으로 증명되었다. 이 날 참석한 이일주 명창은 “뜻을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어 객석에서 이해하기 쉽겠다”면서도 “스승(김연수)이 오랜 소리길을 통해 남긴 사설이 훼손(?)되는 것 아니냐”며 우려를 보였다. 한 참석자는 “판소리 현대어 사설의 의미는 현재까지 불리던 판소리 사설과 현대어 사설이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며 각각의 향유층을 늘려나가는 것이어야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군산대 최동현 교수는 “판소리 사설을 현대어로 바꾸는 작업은 거의 끝냈지만 완벽하게 번역된 상태가 아니고, 원문과 번역물의 차이도 있다”며 “쌓여진 자료를 바탕으로 판소리전문가와 영문학자, 문학인 등의 지속적인 감수를 받아 예술성을 갖춘 사설을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시간이 갈수록 계속 늘어갔던 이 날 객석의 풍경. 변화를 꾀하는 21세기 판소리의 여정은 충분한 가능성이 엿보였다.
판소리 현대어 사설 공연에 참가한 키르키즈스탄 교환학생
“영어가 서툴어서 어떤 내용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노래하는 분의 소리와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무대였어요. 몇 번 더 들으면 내용도 알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두 달 전 키르키즈스탄 교환학생으로 전북대와 인연을 맺은 아나라씨(23·전북대 경제학과)와 아미나룰씨(21·전북대 교육학과). “키르키즈스탄 동양대학교에서 3년간 한국어를 배웠다”는 두 사람은 “판소리 선율이 고향을 떠올리게 할 만큼 친근하게 느껴졌다”고 익숙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판소리를 처음 접한 것은 지난 2월 설날 무렵. TV를 통해 듣게된 판소리는 ‘마나스’를 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줘 큰 여운을 남겼다. 마나스는 ‘고무르’라는 전통악기를 기타처럼 어깨에 띠를 두르고 손으로 줄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키르키즈스탄의 전통음악.
두 사람 모두 “한국에 머무르는 시간은 짧지만 기회가 되면 한국 전통음악인 판소리를 듣는 것뿐 아니라 배워가고 싶다”며 판소리를 배울 수 있는 방법을 물기도 했다. 현재 전북대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들은 오는 9월 고국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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