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15·6년 전의 일로 생각됩니다. 당시 '100세 퀴즈쇼'라는 TV프로그램에서 한 출연자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통정대부'였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모르는 것 같아 의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초라해도 내 조상은 부와 귀를 상징하는 '금송아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진짜 금송아지라면 그 위력이 대단했겠지만, 그중에는 도금한 금송아지도 많았습니다. 바로 도금된 금송아지 중의 하나가 공명첩(空名帖)입니다.
공명첩이란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관직임명장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재정이 궁핍할 때는 이 공명첩을 발행하여 백성들로부터 전곡(錢穀)을 받고 팔았습니다. 대개 지방관이 일정한 양의 전곡을 받고 그 사람의 성명을 공명첩에 기입하여 교부하였는데 이 공명첩에는 가선대부니 통훈대부니 하는 관계(官階)와 참판 오위장 능참봉 등등의 관직명이 기재되어 있었지만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사람에게 관직임명장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마는 이걸 가지고 장사가 될 것 같다고 정부가 판단한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관직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공명첩에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고 관계 혹은 관직만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렇게 무성의하게 발급된 관직임명장이 도대체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혹자는 신분상승을 꾀하는 하층 양반이나 평민 또는 천민이 공명첩을 사길 원했으며 이를 구매하여 실제로 신분을 상승시킨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기장현 동면 이서리에 살았던 최동건(가명)이 수령에게 올린 탄원서를 보면 공명첩이 신분상승의 사다리 노릇을 하기는 커녕 어쩔 수 없이 떠맡아야 되는 짐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분상으로는 평민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었던 최동건은 기장현감이 배당된 공명첩을 자신에게 팔려하자 수령에게 탄원서를 올립니다. 비록 현재에는 넉넉하다 할지라도 수령이 요구할 때마다 공명첩을 살 경우 그의 생활이 크게 어려워 질 것을 걱정한 그는 수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공명첩 구매요구를 거두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합니다. 이에 탄원서를 받은 수령은 이후에는 더 요구하지 않을테니 이번만은 사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명첩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엿보게 됩니다. 배당된 공명첩을 다 팔아야만 하는 수령의 곤혹스러워하는 모습도 그러하고 거의 강매되다시피 하는 공명첩을 사지 않으려고 버티는 최동건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공명첩이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변화시킨다거나 댓가로 지불한 전곡에 해당되는 것 이상의 어떤 유익함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토록 간곡하게 구매요구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을까요 . 최춘건은 이미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공명첩에 자신의 이름 석자가 기재되는 것이 허공에 이름을 새기는 것 만큼이나 허망한 일이라는 것을.
/최윤진(고문서팀 연구원·전북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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