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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범 칼럼]시를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도 35분의 거리를 걸었다. 집으로부터 매일 나가고 있는 '문예관'까지의 거리이다. 나의 발걸음 폭으로는 약 3천5백보, 아침산책을 겸하고 있는 셈이다.

 

곡우(穀雨)가 지나고 입하(立夏)의 절기가 다가오는 요즘의 아침보행은 여간 상쾌한 것이 아니다. 볼을 스치는 바람결도 삽상하고, 눈길을 이끌어가는 가로수의 잎잎도 삽연하기만 하다. 자연 발걸음 또한 가든거리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이 계절을 읊은 시구가 절로 떠오르기도 한다. '청일난풍생맥기 녹음유초승화시'(晴日煖風生麥氣 綠陰幽草勝花時)는 당나라 시인 왕안석(王安石)의 시구라해도, 18세기 우리의 시인 박제가(朴薺家)의 절구는 걸음걸음 읊조려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

 

'하늘빛 진정 푸르고 넓어/오늘은 거닐기 꼭 좋아라/흰구름 바라만 보아도 배부를 만하고/걸으며 읊조리자니 노래가 되네'(天光正綠闊 今日好逍遙 白雲望可飽 行吟以爲謠)

 

박제가는 널리 알려진 18세기 당시의 현실을 깊이 파고들어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던 실학파예술가의 한 분이었다. 이 어른이 푸르른 이 철의 청산·백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만하다는 서정이었으니 놀랍다.

 

1950년대의 후반, 채 50도 못되어 일기를 마친 노천명(盧天命)시인의 아름다운 서정도 떠오른다. '청자빛 하늘'에 '라일락 숲'을 바라보며 이 철에 대하여 '푸른 여신'·'계절의 여왕'이라는 찬사였다. 다음 시행도 볼 수 있다.

 

'기인 담을 끼고 외따른 길을 걸으며 걸으며/생각은 무지개처럼 핀다/풀냄새가 물큰/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청마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마치도 내 아침길을 미리 노래하여 준 것만 같아 흥결이 돋는다.

 

물론 나의 아침길에 꿩소리까지 들을수는 없다. 그래도 침엽(針葉)·활엽의 가로수들이 신록의 옷들을 날로 새빛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볼 수 있고, 참새소리·까치소리·뱀새소리·휘파람새 소리 또 때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푸른 계절의 아침길에 시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더러는 세상살이 마음과 같지 않더라도, 박제가의 '백운망가포'마타나 '녹음망가포'의 마음으로 아침길을 흥얼거려 본다면 어떨까. '…까짓것'. 상쾌한 마음이 갈아들기도 할 것이다.

 

옛어른들은 '낙의생향'(樂意生香)이란 말을 즐겨 쓰기도 하였다. '즐거운 뜻으로 이어지니 새들도 서로 말을 하고, 새로운 향기가 끊기지 않으면 나무도 꽃을 사귄다'는 뜻이 담겨 있다.

 

조지훈(趙芝薰)시인은 '나라가 흥하려면 시인이 많아지고 또 나라가 망하려면 시인이 많아진다'는 긴가민가의 말을 남긴 바 있다. 시인흥국론엔 쉽게 이해가 가나, 시인망국론은 무엇인가. 이는 시인의 자세를 강조하고자한 역설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한 편의 시작품은 그 시인을 성장시키거나 타락시키거나의 어느 한 쪽에 속하게 된다. 그만치 냉엄한 인식이 없고는 예술적인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충고로 받아들여 좋지 않을까.

 

비단 시·예술만이랴. 크게는 나라의 일도 작게는 개인의 일도 시창작의 냉엄한 정신이 앞서야 한다. 4월의 선거도 끝났다. 이제 모두 푸르고 개운한 마음으로 새 앞날을 위한 각자의 무지개같은 시를 생각하였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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