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고문서들 가운데에는 인근 고을의 효자를 기리고 포상해줄 것을 요청하는 유생들의 상서가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문서에 사용되는 상투적인 표현가운데 '王祥의 獲鯉'라는 것이 있습니다. 왕상의 모친이 추운 겨울에 살아있는 물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옷을 벗고 얼음을 깨서 고기를 잡으려할 때 얼음이 저절로 갈라지고 고기들이 저절로 얼음위로 올라왔다는 이야기로 패악한 계모에 대한 왕상의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켰다는 이야기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조선 후기가 되면 왕상처럼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의 효자 효부들이 이 고을 저 고을에서 많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 성심 성의껏 모신다거나 오랫동안 부모의 무덤을 지킨다거나 하는 등의 전통적인 방식의 효행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고 이제는 부모의 임종 때 손가락을 째서 몇일간 목숨을 연명시킨다거나 허벅지 살을 도려내고 피를 먹이어 목숨을 소생시키는 자기 고행적 효행의 사례들까지 적지 않게 나타납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극단의 사례들까지 점차 많아져서일까요 .하늘을 감동시켰다는 효행이 정부를 감동시키지는 못했는지 이런 효행을 모두 포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세기 중엽 순창에 살았던 최우의 효행은 하늘만 감동시키고 정부의 포상이라는 사회적 지지는 획득하지 못한 당시 효자들의 일반적인 행적을 보여줍니다. 모친이 이질에 걸렸을 때는 소변의 맛을 보아가면서 치료에 임하였고 병중의 모친을 위하여 꿩을 잡으려 하면 날아가던 꿩이 저절로 화살에 꿰어지고 한겨울에 약으로 쓸 쑥을 찾으면 눈 속에서 쑥이 나타납니다.
종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친을 위해서 살아있는 물고기를 잡으러 한겨울에 강으로 가서 얼음을 두드리면 흰 물고기들이 뛰어오르고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소의 간이 필요해지면 인근에 있던 소가 그 집 마당 기둥에 부딪혀 죽어줍니다. 그는 90세 된 모친이 노환으로 병석에 눕게 되자 미음을 떠드리고 대소변으로 젖은 이부자리를 직접 세탁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홀아비도 아니고 집안의 여자들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했다고 합니다.
병석에 오래 누워 있던 모친이 너무 수척해져서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되면 때때로 모친 등에 업고서 통증을 가라앉기를 7-8년 동안이나 하였다고 합니다. 최우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인내심을 요구하는지는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도의 효행이라면 그 사례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일까요. 인근 지역의 유생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우에게는 정려가 내려지지 않습니다.
최우의 경우를 보면서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난세의 충신보다는 태평성대의 양신(良臣)이 낫고 육체적 고통을 감수해야하는 효자보다는 입신양명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나으며 열녀보다는 현모양처가 낫다"는 어떤 분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최윤진(고문서팀연구원, 전북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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