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기는 붓을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어서 어서 문서에 서명하라는 정호규의 말에 그저 정신이 멍할 뿐이었다. 선대 어른들이 남겨주신 그 많던 논밭을 다 팔아 먹고 마지막 남은 것인데, 이마저 없앤다면 조상 뵐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이 땅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살림 밑천이라는 큰 딸년마저 팔아먹은 처지였다. 작은 딸 아이 시집보낼 일은 이제 꿈같은 일이 되 버렸다. 긴 숨으로 들이 마신 담배 연기가 한숨이 되어 나올 뿐이었다.
서영기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옥답(沃畓)을 팔기 시작한 것은 30년 전부터였다. 비록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처지는 되었다. 그러나 그 독한 세금은 피할 길이 없었다. 특히 환곡(還穀)인가 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난한 농민들을 보호하려는 제도라고 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수령이나 아전들이 환곡을 가지고 부리는 농간에 배겨 낼 재간이 없었다. 떠맡기다시피 하여 가져다 쓴 환곡이, 그리고 여기에 붙은 이자는 상상을 뛰어 넘었다. 서영기가 처음으로 전답을 팔게 된 것은 바로 이 환곡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 때는 남은 전답이 있어서인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다. 화병(禍病)에 마음 달랜다고 투전(投錢)에 손댄 것이 화근이 되어 아내 몰래 이웃 마을에 있는 천자답(天字畓)을 처분한 일도 있지만, 그 정도로는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노름 빚 대신 땅 넘겨 줄 때 작성한 쓴 문서에 서명을 할 때만해도 이렇게 마음이 허전하지는 않았다. “땅을 팔게 된 이유는 뭐라고 써야죠?”라는 사기꾼 놈들의 말에도 그저 웃으면서 “그냥 돈이 긴히 필요해서라고 쓰시지요!”라고 말 할 정도로 삶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왜놈들이 이 땅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었다. 남아 있던 전답도 하나 둘 없어지고 있었다. 나라님들이 하는 일이라 원망한번 못해 본 일이지만,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세금들이 목을 죄어 오고, 환곡에 대한 수령이나 아전들의 등살도 전보다 더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무슨 놈이 하늘이 그리도 무심한지 몇 년 동안 비 한번 제대로 온 적이 없었다. 논밭이 다 타들어가도 하늘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일년 농사 지어봐야 식구들 입에 풀칠할 정도도 되지 못하였다. 쌀을 산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왜놈들이 쌀을 다 가져가는 바람에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조상님들에게 죄인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지막 남은 땅 지켜보겠다고, 큰 딸을 이웃 마을 김부자 소실(小室)로 팔아먹을 때 서영기는 자신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버님의 묘 옆에 앉아 그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죽고 싶었지만 뜻대로 안 되었다. 혼자 편하자고 남은 처자식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영기는 두 눈을 감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놈의 나라에서는 이제 더 이상 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떠나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붓을 움켜쥐는 그의 손에는 나라와 왜놈들에 대한 원망과 한(恨)이 짙게 묻어 있었다.
/송만오(전북대박물관 고문서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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