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옛 문서의 향기]족보에 이름 올리려 갖은 방법 다 동원

 

요즈음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에서 치루는 시험을 보려고 하거나 외국 여행을 하기 위해 여권을 발급받으려고 할 때 즉 신원 확인이 필요할 때에 언제든지 나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만을 대면 담당자들은 곧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등은 나의 신원을 파악하는 1차적인 요소가 아니다. 따라서 국가에서 치루는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안하고는 전적으로 나의 능력에 달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이와는 전혀 달랐다. 조선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개인이 속해 있는 가(家) 혹은 호(戶)였는데, 편의상 여기에서는 이를 집안이라고 하자. 따라서 나의 신원을 파악하는데 나 개인의 실력이나 능력보다는 내가 속해 있는 나의 집안의 가세(家勢)나 지위가 결정적이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치루는 시험 예컨대 과거시험을 보려고 하면 먼저 응시자의 사조(四祖) 즉,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및 외할아버지가 어떤 인물인가를 먼저 파악하였다. 원칙적으로 이들 조상 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관리[顯官]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비로소 과거 시험장 출입이 허용되었으니 결국 응시자의 신원이나 능력은 2차적인 요소에 불과했으며 응시자 집안의 가세나 지위가 1차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이 집안과 유리된 개인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는데 조선시대에 씨족(氏族)제도가 크게 발달하게 된 근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따라서 양반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의식주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평민들은 어떻게 해서든 씨족이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특정한 씨족에 속해야만 비로소 ‘공민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국민’이 되었다. 씨족이 바로 이러한 공민권을 보호해주는 일종의 울타리였던 것이다. 어느 특정 씨족의 일원이 되면 우선 번거로운 군역(軍役)으로부터 벗어날 수 가 있었으며 자유로이 과거 시험장에도 출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살았던 양반들은 집안의 가세나 지위 등을 유지하여 평민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는데 이는 곧 씨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이에 반하여 평민이나 천민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씨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하였다. 씨족이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서 말하면 곧 족보에 그들의 이름이 오르도록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조선후기에 있었던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전라도 구례현에 살았던 평민 출신인 김귀현은 본관(本貫)을 몇 차례 바꾼 끝에 김해김씨 ‘선김해파’ 족보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후에 자신의 10촌 형은 ‘후김해파’ 족보에 등재된 사실을 알고서 수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자신이 어느 파에 속해야 하는지를 결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수령이 씨족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울 뿐이다.

 

/전경목(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전북대박물관 고문서공동연구원)

 

전북일보
다른기사보기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정부尹대통령, 6시간만에 계엄 해제 선언…"계엄군 철수"

정부尹대통령 "국무회의 통해 계엄 해제할 것"

국회·정당우의장 "국회가 최후의 보루임을 확인…헌정질서 지켜낼 것"

국회·정당추경호 "일련의 사태 유감…계엄선포, 뉴스 보고 알았다"

국회·정당비상계엄 선포→계엄군 포고령→국회 해제요구…긴박했던 15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