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농민들의 삶이 괴로웠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계속되는 자연재해, 이로 말미암은 흉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어만 가는 각종 세금, 이런 환경 속에서 농민들의 처지는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세금은 농민들에게 가장 괴로운 부담이었다. 이 점은 매매문서인 명문이나 진정서인 소지들을 통하여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금 외에도 농민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경제적 부담도 감당해야 했다. 예를 들어 신임 사또가 왔을 때 벌이는 잔치 경비도 그들 몫이었고, 또는 자기가 사는 고을에서 만약 살인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사인(死因)을 밝히기 위해 실시하는 검시(檢屍) 비용 역시 피할 수 없는 족쇄였다. 특히 이 검시 비용을 둘러싸고 수령이나 아전, 그리고 힘 있는 자들이 부리는 농간(弄奸)은 한마디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느 고을에서는 검시할 때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명목이 무려 90여 가지가 넘는 예도 있었다. 그 중 몇 가지 특이할만한 항목을 들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즉 죄인 호송한 자들 및 길 안내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급여, 이들이 먹고 마시는 밥 값 및 술 값, 시신 운반할 때 이용한 말과 그 말을 몰았던 마부 일당, 그리고 그 말의 먹이 값, 검시보고서 작성할 때 사용한 종이 값, 검시 과정에 참여한 자들이 피우는 담배 값, 시신 운반비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니 살인사건이 나도 보고조차 하지 않은 사례도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이러한 부담은 어느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다.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부담해야 하는 일종의 공동납(共同納) 형식이었다. 그러니 만약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 일년에 두 어 차례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면 모든 것이 거덜 나지 않을 재간이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수백 년 살던 정든 고장을 버리고 이리 저리 떠돌며 걸인(乞人)생활을 하는 자들이 왜 그렇게 많이 발생했는지 또 하나의 이유를 여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잡아 여비까지 주면서 어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지만, 한번 고향을 등진 자들이 다시 고향을 찾은 예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모두 다 견뎌내기 힘든 경제적 부담 때문이었던 것이다.
얼마 전 조선시대의 법의학 지침서인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이라는 책을 소개하며 조선시대의 법의학이 매우 과학적이었다는 말씀을 한 분이 있었다. 그 분은 조선시대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두 번 검시를 하였는데, 이것은 “백성들의 원통함을 없게 함이 어진 정치의 기본이라 여기는 위민(爲民)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였다.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고자 한다면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이라도 그 누가 뭐라 하겠느냐 만은 한 번의 검시에 무려 90여 가지나 항목을 들어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간다면 그 누가 진실이 밝혀지기를 원하였겠는가.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교훈을 얻자는 데 있다. 과거의 잘못된 일을 보면서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의 교훈이다. 사회의 악을 물리치는 일에 참여하도록 만들고 싶다면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범죄 신고를 해서 범인을 잡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은, 신고자의 처지를 감안한 처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송만오(전주대 문화콘텐츠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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