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류 가운데에는 등장(等狀)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문서들이 있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연명으로 기재되어 있고, 맨 끝에 기재된 사람의 이름에 뒤이어 흔히 ‘等’자가 써있는 데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곧 여러 사람들이 공동 명의로 관에 제출하는 진정서 내지는 탄원서인 셈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집단민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집단민원이 사회 내 각 집단의 다양한 욕구와 불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등장도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공동 관심사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 보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우선 등장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 대부분이 유생(儒生)이거나 같은 종인(宗人)들이며, 또는 한 동네에 사는 동인(洞人)들이다. 이들이 집단적인 탄원서를 올리면, 이를 접수한 관에서는 반드시 그 문서의 말미에 답을 써서 돌려 주었다. 그 답을 제사(題辭) 또는 제음(題音)이라고 하였다.
민원을 제출한 이후에 하염없이 관청의 처리를 기다리는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예컨대 고을의 효자나 열녀를 표창하여 줄 것을 청하는 유생들의 탄원에 대하여 수령은 좀더 여론을 들어 보자거나, 아니면 다른 좋은 기회가 있으면 그때 고려하겠다는 식으로 제사를 내렸다.
된다는 것도 아니고, 안된다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의 답변으로 일관하였던 것이다. 가능하면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려는 관료들의 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다음으로 등장의 내용들을 한번 훑어보자. 1862년에 전라도 무장현에 거주하던 함양오씨 일족은 수령에게 제출한 등장에서 자신들의 선산에 누군가가 몰래 무덤을 썼는데, 이 투총을 즉각 파가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말기의 어느 땐가 전라도 동복현 내서면 묘산리에 살던 김진구와 최동문 등은 수령에게 등장을 올려 물방아의 소유권을 관이 공증하여 줄 것을 탄원하고 있다. 일찌기 마을의 공납금을 해결해 주는 조건으로 마을 공동 소유의 물방아를 차지하였던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권을 정식으로 인정받아 봉이 김선달식의 이익 추구에 나서고자 한 것이다.
1720년에 경상도 예천과 풍기 등지에 살던 예안김씨 일족이 관에 올린 등장은 제위답(祭位畓)을 문중의 노(門中奴)의 이름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해달라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좀더 흥미를 자아낸다. 옆의 사진에 보이는 고문서가 바로 그것인데, 그 사연인즉 이렇다. 위의 예안김씨 일족의 조부 형제들이 오갈 데 없는 외조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노비와 전답을 각출하고 그 중 둘째가 제사를 받들어 왔다.
이른바 외손(外孫) 봉사(奉祀)이다. 그런데 뒤에 그 둘째의 장손 김아무개라는 자가 이를 다 들어먹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 심성이 ‘토지’의 조준구를 뺨치는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하여, 일족들이 다시 전답을 마련하여 제사를 받들되, 종족 가운데 파렴치한 인물이 나와서 똑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아예 문중의 노(門中奴)의 이름으로 그 전답의 등기를 올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문중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심성 고약한 자들이 어느 시대인들 없으랴마는, 멀다면 멀다고 할 수 있는 외고조부의 제사를 기어이 지키려는 일족의 노력이 참으로 가상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유호석(전북대강사, 전북대 박물관 고문서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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