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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집'에 숨겨진 이념붕괴의 사회상

「모란시장 여자」펴낸 민중문학 작가 정도상씨

처마 아래엔 거미줄이 가득했고 유리창엔 금이 가 있다. 스무살 무렵부터 살아온 집으로 돌아가 문을 열어보니 온통 낡아있다.

 

처음 그 집에 들어왔을 땐 열정으로 착각했던 오만방자한 혈기로 똘똘 뭉쳐있었다. 그러다 문득 작가는 ‘낡은 것은 집이 아니라 내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미치게됐다고 했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이 나이가 들면서 무서워졌다는 소설가 정도상(45). 스러져간 이념을 ‘낡은 집’이라고 말했지만, 민중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꼽히는 그의 단편집 「모란시장 여자」(창작과비평)는 여전히 시퍼런 칼날을 숨기고 있었다.

 

“오래된 소설을 묶고보니 헌책방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있는 무명작가의 절판된 작품집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민망하고 부끄러웠지요.”

 

이 책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쓴 단편 여섯편을 묶은 것. 이념에 따른 지식인의 철학과 고뇌를 다뤘던 80년대 이야기와 이념 붕괴에 따른 정신적 혼란 같은 90년대적 서사 대신, 작가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하류층과 자본주의의 쾌락에 빠져있는 최상류층의 이야기를 들여놓았다.

 

표제 「모란시장 여자」는 첫 작품 「개잡는 여자」의 제목을 한결 순화된 언어로 바꾼 것.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작가의 성향은 매일 십여마리의 개를 올가미로 조여 죽이고 칼로 내장을 긁어내는 미자의 악다구니같은 일상을 극악스럽게 옮겨놓았다.

 

내 꿈과 달리 내 앞에 놓여진 삶. 다른 여자에게서 아이를 얻은 남편은 이혼을 요구하고, 아버지는 북에 두고온 젊은 여자의 사진만 들여다 본다. 정씨는 “미자의 모습은 무너지지 않고 힘겨운 삶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소시민의 슬픔”이라고 말했다.

 

보험업에 손을 댔다 가정 파탄을 부른 주부 「달빛의 꿈」, 아들의 병역비리를 눈감아줄 것을 청탁하는 대기업 중역 「오늘도 무사히」 등은 각각 하류층과 최상류층을 보고있지만, 결국 ‘하류인생’의 아픔이 깔려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통일운동을 하고 있고, 내 문학의 출발도 분단문제입니다. 분단체제에서 평화체제로 나아가야는데, 지금 우리는 그 과도기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딸의 금고에서 조금씩 빼낸 돈으로 금강산 관광을 신청하는 아버지 「개잡는 여자」, 간첩 출신 장기수 아들에게 구순 노모가 보내는 편지 형식의 「부용산」, 월북했다 간첩으로 잠깐 다녀간 남편을 평생 그리워하는 어머니 「그토록 긴 세월을」 등 정씨의 관심은 여전히 미국과 중국, 일본 사이에서 휘둘리고 있는 남과 북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분단 문제는 이제 그의 마지막 소재가 될지도 모른다. 분단문제야말로 감정이 아닌, 사회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도 완고한 이념도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도 한 때는 영원한 것을 꿈꿨지만 시간을 견디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낡은 집이여, 낡은 ‘나’여, 안녕.’

 

낡은 ‘나’를 떠나려는 작가는 이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정씨는 전북대 독어독문학과와 전북대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광주항쟁소설집 「일어서는 땅」에 단편소설 「십오방 이야기」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누망」으로 제17회 단재상을 수상했다.

 

도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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