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초, 우연히 이곳 연길에 머물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친 여동생이 되는 윤혜원(尹惠媛, 83) 여사와 부군 오형범(吳瀅範, 82) 장로를 만나게 되었다. 두 부부는 현재 호주에 거주하고 있지만 1년중 상당기간을 이곳에 머물면서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도 돌보고 또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윤동주문학상’운영에도 고문 자격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더욱 반가운 것은 부군 오형범 장로가 60년대에 전주기전여중·고 교목으로 재직하였던 고 오형기(吳瀅基) 목사의 친동생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모습도 오목사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이 두 부부는 80대의 고령임에도 기억력이나 표정이 60대를 방불케 하는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윤여사는 거의 주름살도 없는데다 홍조를 띠며 수줍게 웃는 모습은 마치 소녀와도 같았다. 이 모두는 윤동주 가계에 나타나 있듯 대대로 내려온 독실한 믿음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차 대접을 받으면서 4시간여 동안 윤동주에 관한 여러 일화들을 듣던 중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첫째, 인구에 회자하고 있는 동주의 ‘序詩’에 관해서다. 동주가 생전에 육필로 된 자선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편), 3권중 고 정병욱 교수의 소장분이 윤동주 시집의 최초의 원전이 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 ‘서시’는 동주 스스로가 19편중 맨 앞에 내세웠을 뿐 당초엔 제목이 없었다. 이후 1948년 정음사에서 간행된 초판부터 무제(無題)였던 이 작품이 편집자의 자의에 의해 제목이 ‘서시’로 굳어져 온 것이다.
물론 그 시가 놓여진 위치로 보나 작품 성격으로 보나 ‘서시’라고 명명해 큰 흠이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시집 앞에 내세울 만한 작품으로서의 ‘서시’와 당당한 작품제목으로서의 ‘서시’와는 텍스트 확정이라는 면에서 크게 다르다.
그리고 ‘서시’(1941. 11. 20일자 탈고)의 자필원고와 1948년 초판부터 시집에 수록되어 온 ‘서시’와는 표기법에 차이가 있다. 예컨대 ‘우르러→우러러’, ‘죽어가는것을→죽어가는 것을’, ‘나안테→나한테’, ‘거러가야겠다→걸어가야겠다’ 등이다. 이는 표준 표기법에 맞춘 것으로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나 참고 대상은 된다.
다음, 그동안 윤동주에 관한 연구자들에 관해서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거나 거두고 있으나 그중 특별히 외곽적 접근의 공로자로는 단연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오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 교수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오오무라 교수는 학부에서는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중국문학을 전공하던 그가 1956년경부터 관심을 한국문학으로 돌렸다. 그는 한국어와 그 문화에 접근키 위해 가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주도 출신의 한국여성과 결혼을 할 정도로 열의가 대단하였다. 특히 윤동주의 시집을 손에 쥔 그는 이로부터 온전히 윤동주에 심취하게 된다. 마침 1984년 일본에 와있던 동주의 실제 윤일주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윤동주의 묘소가 있음직한 용정의 약도를 입수하여 다음해 5월 14일, 연변대 조문학부 권철(權哲), 이해산(李海山), 그리고 이 지방 지리에 밝은 용정중학의 한생철(韓生哲) 등 제씨와 동행, 천신만고 끝에 허름히 방치되어 있는 ‘詩人尹東柱之墓’라는 묘비명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오오무라 교수는 이후에도 윤동주에 관한 여러 자료발굴을 위해 쉬임없이 이곳을 오고 갔으며 또한 많은 글을 썼다. 지난 1995년에 쓴 ‘나는 왜 윤동주의 고향을 찾아갔는가’라는 글에서 자신의 심회를 “… 그것은 윤동주를 요절케 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죄책감 같은 착잡한 심경에, 그를 훌륭한 시인으로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 그의 한(恨)을 위무하며 그를 더욱 진실하고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가 고향에 남겨놓고 간 흔적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며칠 전 필자와의 통화시, 작년에 이어 금년 여름에도 꼭 가려고 하였으나 강의 때문에 못 가게 되어 아쉬움이 크다고 하였다.
그동안 윤동주의 시는 1948년에 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의 경우 31편이었던 것이 1955년 중판에서는 그 수가 3배인 95편으로 늘어났다. 그 이후 1976년에 나온 3판에서는 또다시 증가하여 116편이 되었다.
이러한 기현상을 답답해하던 유족들이 드디어 윤동주가 생전에 남긴 모든 육필 초고를 사진 자료로 공개키로 하였다. 그리하여 지난 1999년 3.1절을 기해 이 ‘사진판’ 출간은 윤동주 원전 연구에 큰 업적이 되었을지언정 마침표가 될 수는 없었다. 이후 또다시 이를 보강하는 ‘정본 윤동주 전집 원전 연구’(홍장학)가 출판되어 이 분야 연구자들의 눈길을 끌게 하고 있다.
그동안 윤동주에 관한 연구는 문단비평을 비롯하여 석·박사학위논문에 이르기까지 수백 편에 이른다. 그러나 윤동주연구는 아직도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는, 아니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지니면서 윤혜원 여사의 숙소를 뒤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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