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너는 내 운명’의 촬영진과 박진표 감독을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슬픈 영화가 만들어질 줄은 몰랐다. 당시 전주지법을 배경삼아 여주인공인 전도연이 재판받는 장면을 화면에 담았는데, 출연배우는 물론 스탭들의 표정이 그렇게 밝아보였다. 박진표 감독은 ‘잘 돼가느냐’는 질문에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예감이 좋다”라고 답해줬다. “뻔뻔한 멜로극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전주지법외에도 강원도 동해의 묵호항, 충남 당진의 외목마을, 전남 해남의 땅끝마을 등이 모습을 드러낸 ‘너는 내 운명’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대로 된 신파극이다. 어지간히 눈물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영화 후반부에 터지는 강력한 최루장면에 눈물·콧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억지눈물도 아니다. 영화관을 나와서도 좀처럼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제대로 된 신파극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상투적이다. 그리고 감독이 귀띔한 대로 뻔뻔하다. 시골 노총각(황정민)이 사랑에 빠졌다. 동네 다방에서 일하는 레지 은하(전도연)다. 노총각은 그녀에게 지극정성으로 구애에 나서고, 그녀도 그런 그가 싫지않다. 젖소목장을 꿈꾸는 착한 노총각이 은하에게 수줍게 건네는 선물이라야 자신이 직접 짠 소젖과 하얀밤과 맞바꾼 구애편지가 고작. 은하는 어떤가. 겉옷을 벗기니 총천연색 물방울무늬의 팬티와 브래지어를 입고 있다. 그렇고 그런 여자라는 얘기다. 우여곡절 끝에 은하는 남자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결혼식을 올리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은하는 에이즈선고를 받고, 자신이 떠나면 그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고 남자곁을 떠난다. 남자는 은하를 찾아 헤맨다. “어차피 죽을 거, 은하씨랑 살다 죽을래요”라고 울부짖는다.
‘너는 내 운명’은 제목도 줄거리도 신파조다. 하지만 뻔한 내용인데도 사람들의 심금을 후벼판다. 그 이유를 곱씹어보니 감독의 진실성과 연기자들의 군더더기 없는 호연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영화는 현란한 스타일도, 자극적으로 눈물을 강요하는 통속적인 장치로 포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도 그저 인물들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사건들을 좇아간다. 다만 감독은 영화 초반부터 보는 사람의 감정선을 차근차근 건드리고 종반부에 한껏 부풀려진 눈물샘을 터트린다. 감독이 지향하는 건 진정성이다. 결코 과장하지 않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한다. 역설적으로 그런 어눌한 연출력이 두고두고 가슴이 와닿는다.
여기에 영화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도연·황정민의 물오른 연기가 녹아들면서 ‘절대신파’를 완성한다. 팔색조 전도연에 대해서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겠지만, 황정민의 우직한 연기에 더 눈길이 간다. “이쁜 것만 봐도, 맛있는 것만 봐도 은하씨 생각만 난다”며 하얀 이를 드러내는 황정민은 사랑에 눈이 먼 시골노총각, 그대로다.
참고로 박진표 감독은 전주국제영화제가 낳은 스타감독. 지난 2002년 제3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소개돼 큰 화제를 모았던 ‘죽어도 좋아’를 연출했던 그는 여태껏 직설화법을 추구해왔다.
방송사 다큐멘터리PD 출신인 그는 실제 노인 커플을 등장시킨 ‘죽어도 좋아’에서 성행위의 소리까지 카메라에 담아 노년의 성을 파격적으로 들춰냈다. 국가인권위원회프로젝트 ‘여섯개의 시선’에서는 영어발음을 제대로 내기 위해 혀수술을 감행하는 치맛바람을 고발하면서 실제 수술현장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너는 내 운명’에서도 직설화법을 꺾지 않고 애절한 순애보의 전과정을 압축·비유·생략없이, 가감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혹자는 파격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무장한 첨단 애정영화들이 난무하는 이때에, 뜬금없는 신파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너무 요란하게 포장해 정작 내용물은 눈길도 안주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시대의 반작용은 아닐까. 무엇이든 5분안에 끝내야하는 인스턴트 세상에 일체의 과장없이 애절하고 정직한 사랑을 해봤으면 하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춘 영화라고 본다.
며칠째 가을비가 그치면 곧바로 가을이다. 이 가을에 뭉클한 신파를 만나고 싶다면 ‘너는 내 운명’이 제격이다. 상영시간 122분. 18세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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