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들에게 힘든 계절이 왔다. 온몸을 휘감는 찬바람이 허전한 옆구리를 파고드는 가을이다. 파란 물감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기가 버거운 듯 낙엽들이 나뒹구는 이때, 하필이면 알콩달콩 사랑이야기가 나란히 선보인다. ‘내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과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 애써 피하고 싶지만 ‘농도’짙은 로맨틱코미디를 외면하는 게 그리 쉽지않다. 한편에선 무더기 스타들이, 다른 한켠에선 아역배우출신 드류베리모어가 눈물과 웃음과 감동을 넘나들며 오감을 자극한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하는 법. 옆자리의 다정한 커플에 눈길을 주지말고, 오랜만에 가슴떨리는 사랑과 만나보자.
△내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감독 민규동·주연 황정민 엄정화 임창정)
충무로에 ‘기획영화’란 게 있다. 관객들의 기호도를 파악한 뒤 만들어지는, 관객의 눈높이에 맞춘 영화를 말한다. 아무래도 의미보다는 재미에 치중한 상업영화에 가깝다. 역사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충무로에 PD시스템이 도입된 90년대 초반으로, ‘결혼이야기’가 원조격이다.
‘내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도 기획영화다. 지난 2003년 콜린 퍼스·엠마 톰슨·휴 그랜트·로완 앳킨슨(미스터 빈) 등 영국의 내로라하는 연기파배우들이 거의 망라됐던 ‘러브 액츄얼리’와 99년 톰크루즈 주연의 ‘매그놀리아’가 ‘내생애…’의 참고서 노릇을 한다. 인해전술을 앞세운 사랑이야기라는 게 공통분모다.
‘내생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섯쌍의 사랑이야기가 입체적으로 엇갈린다. 마치 모양이 제각각인 초콜릿세트를 막 꺼내들었을 때의 ‘골라먹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생애…’은 기획영화의 관성만큼은 거부한다. 허전한 트렌드류에 머물지않는다는 점이 ‘내생애…’의 매력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울다웃다를 반복하고 엔딩자막이 올라간 뒤에도 쉽사리 여운이 가시지않는다.
똑부러진 이혼녀 의사-터프한 노총각 형사, 사랑만으로 험난한 세상을 헤쳐가는 신혼부부, 잘생긴 아이돌스타-예비수녀, 변두리 극장사장-만년소녀, 중년의 남자-가정부로 취직한 젊은 남자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일주일을 보낸다.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재료들을 맛깔스럽게 담아낸 감독의 역량이 돋보인다. ‘내생애…’가 단순한 기획영화에 머물지않는 것은 사랑놀음에 머물지 않고 지난한 세상살이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때문에 얼굴을 파묻고, 동성을 사랑하는 성적소수자의 비애가 깃들어져있다. 마치 ‘내생애…’는 “당신이 행복을 알아?”라고 묻는 듯하다. 현실은 고달프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 견딜만하다고 말이다. ‘내생애…’는 올가을 ‘러브홀릭’의 마법사가 아닐까. 15세 관람가.
△날 미치게 하는 남자(감독 패럴리형제·주연 드류 베리모어 지미 팰론)
주변에서 무언가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관심사를 위해 가족과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랑까지도 말이다. 재치있고 자상한 고교 수학교사 벤(지미 팰론)은 야구광이다. 아니 집착에 가깝다. 보스턴 레드삭스를 23년동안이나 응원하며 단 한경기라도 놓치면 좀이 쑤신다. 자나깨나 야구생각에 빠진 그에게 한 여자가 묻는다. “내가 좋아? 야구가 좋아?”
머릿속에 온통 야구뿐인 남자의 로맨틱코미디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
국내에도 번역출간된 닉 혼비의 자전적 소설 ‘피버피치’가 원작이다. 원작에서의 축구광이 헐리우드로 건너오면서 열혈 야구팬으로 종목을 바꿨다.
‘날 미치게…’는 헐리우드 로맨틱코미디의 지존으로 불리는 패럴리형제와 ‘ET’의 앙증맞은 아역배우출신 드류베리모어가 만났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은다. ‘덤앤더머’‘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등으로 이미 화장실유머를 과시해온 패럴리형제는 이번에는 섬세한 감성을 앞세운 로맨틱코미디에 승부수를 띄웠다. 하지만 헐리우드식 사랑방정식에 식상한 관객들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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