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가려졌던 전주부성 축성과정에 대한 전모를 밝혀줄 수 있는 축성기록이 발견됐다.
성곽 전문 연구자인 유재춘 강원대 교수가 전주부성 관련 「축성계초」를 찾아내 지난달 역사학계에 보고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발견된 축성기록은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해 헐리기 전의 전주부성 현황을 가늠하고, 조선후기 전주부성의 모습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자료는 특히 「화성성역의궤」를 제외하고 축성 관련 기록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시대 축성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전주성 축성기록은 앞서 기존 경기도 화성 축성기록보다 약 60년 앞선 기록이다.
자료는 유교수가 춘천 풍양조씨 문중 소장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했으며, 표지에 별도 제목 없이 ‘계축십일월이십일축성계초’(癸丑十一月二十日築城啓草)로 시작하고 있다. 기록의 주인공은 당시 전라감사로 재직하며 축성을 주관했던 조현명(1690∼1752) 관찰사며, 1733년(영조 9년 계축년)부터 2년에 걸친 전주부성 축성 과정이 기록됐다.
총 126면에 필사체로 이루어진 「축성계초」에는 전주부성 수축 배경에서부터 착수 과정, 인력동원과 자재 갹출 내역, 소요 비용 등이 상세히 기록됐다.
기록에는 특히 당시 수축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4대문 옹성(큰 성문을 엄호하려고 성문 밖에 반달 모양으로 달아 쌓은 성) 중 북문을 제외하고 3대문의 옹성을 없앤 것으로 드러나, 현재의 풍남문 옹성 복원에 타당성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유교수는 “개축 이전의 전주부성을 복원한 것이라면 가능하지만, 이 경우 풍남문 위치 문제가 있어 여전히 논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함께 풍남문 문루가 2층루로 기록되어 있어 그동안 일각에서 제기된 3층루에 대한 논란에도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계초에는 또 전주부성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로 전주부성의 중요성이 이야기됐고, 축성 이전의 전주부성 현황도 보고됐다. 새로 개축된 전주부성의 전체 둘레가 크게 늘어난 이유와 관련, 기존의 좋지 않은 성터 모양을 고치려면 민가를 많이 헐어내야 하기 때문에 대략 옛터를 따라 굴곡진 곳에 치성을 설치한 때문으로 설명되고 있다.
계초에 따르면 대대적인 성 개축을 위해 전라도 전역에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됐으며, 연 인원 17만명이 동원된 사실도 계초에 드러났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전주감영 복원문제가 거론되는 상황에서 이번 계초가 갖는 의미가 적지않다”며, 이번 기회에 자료의 면밀한 검토를 통해 전라감영의 신중한 복원을 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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