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입에 물고 권총 한자루씩을 양손에 쥔채 사람숲을 헤쳐간다. 도대체 탄창에 총알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수 없을 만큼 총성이 끊이질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트렌치코트는 핏빛으로 물든다. 80∼90년대를 풍미했던 홍콩누아르다. 주인공들은 곧잘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힘이 곧 법이다”
90년대 후반들어 급전직하하고 있는 홍콩누아르가 2006년들어 한국에서 부활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동갑내기 권상우와 유지태가 의기투합한 ‘야수’. 전성기때의 홍콩누아르를 보는 듯하다. 음울한 갈색톤화면에 말초신경까지 짜릿해지는 폭력미학이 똬리를 틀고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홍콩누아르와 달리 회피하지 않고 직설적이다. 엔딩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 날것 그대로의 폭력을 토해낸다. 치열하게 싸우고 분노하고 악다구니를 쓴다.
‘야수’는 본능적이고 무모하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야수로 살아가야하는 남자들의 이야기. 법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깡패형사’ 장도영(권상우), 법과 원칙을 맹신하는 엘리트검사 오진우(유지태). 권력에 기생하며 공권력에 대한 조롱을 일삼는 조폭보스 유강진(손병호). 이들은 갇힌 철장에선 한순간도 참지 못하는, 야수의 본성으로 살아간다.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결말을 알면서도 불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야수’는 거친 화면, 배우들의 호연, 기존의 관성을 거부한 결말 등 삼박자가 조화를 이룬다. ‘하드보일드 누아르’를 표방한 만큼 각목과 쇠방망이는 물론 총격신까지 겹쳐지면서 거친 대결이 이어진다. 뼈와 살이 튀는 화면이 관객들의 소름을 돋게 한다.
그동안 연기력에선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던 권상우는 비교적 빼어난 연기를 소화해냈고, 특유의 저음을 앞세운 유지태는 냉혈검사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가끔씩 불안해보이는 젊은 톱스타들의 간극은 손병호가 지탱해준다. 성공한 사회사업가와 악랄한 조폭보스의 양날에 선 손병호는 “이기는 게 정의”라는 우리 사회의 속물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야수’의 미덕은 허무하면서도 쉽사리 지워지지않는 결말에 있다. 온몸을 피범벅으로 물들이고 손에 총을 쥔채 담배에 불을 붙인뒤 벌집이 되는 권상우의 최후처럼, 이성과 법은 실종되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8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야수’는 당초 지난해말 개봉하려다 후반작업을 이유로 새해들어 첫번째 블록버스터가 됐다. 참고로 ‘야수’의 김성수 감독(35)은 ‘비트’와 ‘무사’의 김성수 감독(45)과는 동명이인이다. 블록버스터를 지향했으면서도 18세 이상 관람가등급을 받았을 만큼 폭력적인 장면이 난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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