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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연극 산파' 박동화의 삶

전북연극협회 '1930~50년대 활동 조명' 8월께 무대로

박동화 作 '여운' 의 공연 모습. ([email protected])

“나는 행복한게야. 연극인이 무대에서 살다 무대에서 죽은 것 아닌가. 후회는 없네. 다만 연극을 맘 편히 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박동화. 그는 전북연극사의 신화같은 존재다. 1956년 전북대 대학신문 편집국장으로 전주와 인연을 맺은 그는 전북대 극예술연구회를 중심으로 지역에 연극판을 일궜다. 대학극을 익힌 이들을 중심으로 전문극단인 창작극회를 발족시킨 이도 그이며, 70년대말까지 20여년이 넘게 전북연극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연극인 양성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으며, 창작극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연극판의 성격도 정립시켰다.

 

그는 연극뿐아니라 지역문화예술계 토양을 가꾸는데도 앞장섰다. 예총 전북지부 창립위원장을 맡아 예총을 발족시키는데 기여했으며, 예총 전북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국연극협회 전북지부장은 초대에서 7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리였다.

 

전북연극의 산파역인 박동화. 그를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 전북연극협회(회장 류경호)가 올해 기획사업으로 연극 ‘박동화(가칭)’를 올린다. 그를 통해 전북현대연극사의 일면을 정리하고, 그의 삶을 통해 당 시대상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한다.

 

연극은 그의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1930∼50년대 활동에 무게가 실린다. 전남 영암출신인 그는 1928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중학교를 퇴학했으며, 서울로 올라가 신극운동에 동참한다. 36년 일본으로 건너가 그는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극작연출수업을 받은후 조선연극협회 회원으로 창작활동을 했다.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 한글잡지 목포호남평론 편집국장, 경향신문군산지국장, 군산민보 편집국장, 목포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내며 일본과 공산당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극작을 맡은 최기우씨는 “지난연말부터 박동화선생 관련 자료를 탐색해왔는데 그의 항일전력때문인지 자료가 없어 애를 먹었다”며 “작품은 박동화선생 작품의 기저를 이룬 30∼50년대 활동이 중점적으로 다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양면성·부조리성에 대한 풍자가 중심을 이루는 그의 작품의 기저가 그 시대에 형성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란다.

 

작품에는 전북연극인이 대거 참여하기로 했다. 스승이자 선배인 그에 대한 존경심에서다. 연출은 류경호 연극협회장이 맡기로 했고, 곽병창 소리축제 총감독이 예술감독으로 참여한다. 정두영 김영주 최균 이덕형 이부열 전춘근 공동규 정경선 염정숙 등 30여명의 회원들이 함께하기로 했다.

 

작품은 8월경 무대에 올려질 예정이다.

 

류경호회장은 “박동화선생 추모 사업은 곧 전북연극사 정리”라며 “후속사업으로 영상다큐제작과 관련유품전, 관련책자발간, 홈피제작 등도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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