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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포-사람과 풍경] 6.25참전 두 눈 잃은 김록준씨

"전쟁 참상 절대 잊혀져선 안돼"...아내의 헌신적 희생에 4자녀 훌륭히 성장

6·25전쟁때의 포탄파편을 맞아 두 눈을 잃은 김록준씨를 만나 50년 넘게 헌신적인 내조를 하고 있는 부인 최정혜씨. ([email protected])

해마다 6월이면 6·25참전용사인 김록준씨(79·전주시 원동)는 가슴앓이가 다시 도진다.

 

50여년전 집중 포화와 총성속에서 밤낮없이 벌였던 치열한 전투현장, 국가를 위해 초개와 같이 젊음을 산화한 전우들의 외침과 상흔이 뇌리에 파노마라처럼 생생하게 펼쳐지면서 다시금 전장의 참상이 전율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당시 생사를 넘나들던 전우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합니다. 살아 남아있다면 한번만이라도 만나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인데...”

 

하지만 김씨는 50여년이 지나도록 평생의 소원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전투중 포탄 파편을 맞아 양쪽 눈이 모두 실명한 탓에 생사도 모르는 전우들을 찾아 나서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실정이다.

 

대신 6·25 등에 참전한 국가유공자들이 모여 사는 전북무용촌 동료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서로 의지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위안이다.

 

경남 거창서 태어난 김씨는 3살때 일본 군수공장으로 징용을 당한 부모를 따라 나고야현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다 해방과 함께 46년 귀국, 부안에 정착했다.

 

하지만 고국에 돌아온 기쁨도 잠시뿐, 50년 6월 북한군이 남침해 물밀듯이 밀고 내려오면서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김씨는 50년 11월 당시 23세때 국민병으로 입대했다.

 

진주에서 6주간 기본군사훈련을 마치고 5사단 직할 병기중대에 배속 받은 김씨는 이듬해 8월 강원도 인제 현리에서 첫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자동차 정비소대원인 김씨는 직접 전투대신 후방에서 실탄 등 보급품을 최전선으로 공급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사단병력 중 사상자가 계속 늘어나면서 전투병이 크게 줄어들자 후방 지원병까지 전투에 직접 나서야만 했다.

 

김씨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운명의 날인 51년 11월 5일. 전략적 요충지인 강원도 양구지구 가칠봉 1500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5사단과 북한군이 대치하면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김씨는 이날 고지 사수를 위해 동료 80명과 함께 차출돼 빗발치는 총탄과 포연으로 인해 피아(彼我) 구분이 안되는 상황 속에서 혈투를 벌이던 중 갑자기 얼굴에 엄청난 통증과 함께 눈 앞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린 김씨는 고성군 간성야전병원에 후송된 사실을 알게 됐지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보다 두 눈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 됐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더 컸다고 전했다.

 

“후송돼 전우들의 생사를 묻자 당시 동료들이 거의 대다수가 전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전우들을 지켜주지 못한 자괴감과 함께 평생 앞을 못보고 살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나도 전장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씨는 이후 속초와 묵호 제59 육군병원을 거쳐 부산 제5 육군병원에 후송됐다. 상처가 아물자 군에선 전역하라고 강권했지만 김씨는 앞을 볼수 없어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 때문에 무작정 버텼다는 것. 그러다 54년7월 전역, 실명자 수용시설인 부산 중앙광명원에 입소한 뒤 부안의 고향집을 오가며 생활했었다.

 

그러나 고향 집 역시 전쟁의 참화속에서 풍비박산이 났다. 경찰에 투신, 줄포지서에 근무하던 남동생은 공비토벌 전투중 전사했고 아버지는 동생의 죽음과 자신의 실명소식에 충격을 받아 실성하고 말았던 것.

 

장남으로서 가족생계를 책임지지 못한데다 부친마저 정신이상으로 집안이 파산지경에 이르자 김씨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하루하루 암울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 찾아왔다. 51년째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준 부인 최정혜씨(69)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도 바뀌었다.

 

당시 18세 꽃다운 처녀였던 최씨는 부안읍에 있는 외할머니집에 놀러왔다가 뒷집에 사는 젊은 청년이 전장에서 두 눈을 잃고 시름속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과 함께 연민의 정이 싹텄다는 것.

 

최씨는 “처음 남편을 보았는데 측은한 마음이 들면서 눈물이 나더군요. 나라를 위해 두 눈을 잃고 아무 것도 못한채 허송세월을 보내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고 며칠째 꿈속에서까지 보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의 손발이 되어줘야겠다고 맘 먹었지요”

 

하지만 최씨는 부모와 가족들의 결사 반대에 부딪쳤다. 최씨는 “죽어도 친정에 와서 밥 먹여달라 안할테니 시집만 보내달라고 수도없이 간청했죠”

 

마침내 부모로부터 겨우 승낙을 받아 결혼을 했지만 이들 부부에게 처한 현실은 너무 암담했다. 당시 유공자에 대한 예우로 1년에 쌀 몇 포대가 고작이어서 당장 가족들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자연히 남편대신 가족들 생계에 대한 책임은 최씨가 떠맡을 수 밖에 없었다. 막노동과 농삿일, 과일·생선행상 등등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이후 국가유공자에 대한 처우도 개선되면서 2남2녀를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켰고 장남 병오씨(48)는 서울서 고교교사로, 차남 용오씨(46)는 회사원, 장녀 안순씨(51)는 전주시공무원, 차녀 영희씨(50)는 개인사업을 하는 등 4자녀 모두 사회 역꾼으로 성장시켰다. 이같은 헌신적인 자립·자활의지로 최씨는 지난 2000년 전북보훈대상 배우자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남편 김씨는 “가족을 위해 평생을 희생해 온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과 미안함 뿐이다”며 “하늘나라에선 내가 섬기고 봉사하겠다”며 부인에 대한 애틋함을 표했다.

 

56년째 맞는 6·25에 대한 소회를 묻자 김씨는 “요즘 젊은이들이 6·25의 참상을 잘 모르고 많은 국민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가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면서 “특히 소위 식자층에서 6·25를 김일성의 통일전쟁이니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니 하며 생각없이 떠드는 것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구친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권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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