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를 들여다봤다. 마지막 힘을 짜내 완성한 곡, 그러나 사람들은 그 곡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어쩌면 먼 미래에, 그들보다 더 안목있는 사람들은 감흥을 느낄지도 모른다.
26일 그의 연구실을 찾으니 그는 건반 앞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온몸의 솜털을 곤두세우며 악보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작곡가 이준복 교수(59·전북대 음악과). 그는 한번 '필'이 꽂히면 이렇게 몇 시간이고 무섭게 몰입한다. 마음에 드는 곡을 쓰기까지 수십 번도 더 지웠다 썼다를 반복한다고 했다.
"순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면 누가 머리를 마구 때리는 것 같아요. 생각이 손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라요. 그 순간 악보에 옮겨야지, 안그럼 달아나버려요."
브람스는 '영감은 석달에 한번 온다'고 했지만, 그는 가만히 앉아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마음속 풍경을 담기 위해 펜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오래 전 자신의 곡을 수십 번도 넘게 듣기도 한다.
그는 기존 3도 화성의 틀을 깨고 4도 화성으로 작곡의 체계를 세운 장본인이다.
지난 1982년 전북대로 부임하면서 3년동안 줄곧 4도 화성체계에 '푹' 빠져 있었다.
서양음악에서 주로 쓰이는 3도 화성 진행 방식대로 나가면, 협화음과 불협화음, 긴장과 이완이 살아있다. 하지만 불협화음이 끼면, 반드시 협화음으로 바꿔야 했다. 그는 이 둘을 구별하기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고 싶어 4도 화성에 주목했다. 여기선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경계가 없다. 어떤 느낌을 더 살리느냐 차이일 뿐, 불협화음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새로운 음빛깔을 받아들여 다채로운 색을 표현해나간다.
그는 인생의 가장 힘들고 비극적인 시기가 작곡가로서 재능을 발굴했던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털어놨다. 노래를 잘 해서 주변으로부터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여겼던 고등학교 시절, 그는 성대를 결절했다.
대학교 시절엔 피아노를 처음 본 그는 떨리는 가슴으로 건반에 손을 올렸다. 작았지만, 손마디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손은 엄청난 연습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디가 파열됐다. 그래서 신을 원망하며, 작곡에 더욱더 매달리게 됐다.
그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28년째 매년 작곡발표회를 열고 있다. 언젠가는 자신의 존재도 사라져버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영원하지는 않지만 좀 더 생명력이 오래가는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싶다. 인간의 삶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어떤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싶어진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일엔 다 장·단점이 있죠. 반드시 절대적으로 좋고, 나쁜 건 없어요.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주류와 타협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작곡하는 제자들을 많이 키워내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평생 스스로를 꾸짖었던 엄격함, 새로운 곡이 아니면 무대에 올리지 않으려는 자존심. 그것이 그의 시련을 견뎌낼 수 있도록 했고, 작곡가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회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의 연주회를 찾고, 여행을 다니는 일 외엔 자신의 재능이 가져다준 명예나 돈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음악, 신의 세계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쓰고 싶어요. 난해하다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게 목표죠."
그러니 음악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는 그 날이 그의 생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 열정적인 가슴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들의 공감과 동참을 기대한다는 그는 다음달 10일 교수음악회에서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伸의 나라에서 no 2' 곡으로 공연을 한다.
※ 4도 화성이란… 서양 음악 '도(度)'를 단위로 음정을 표시하는데, 예를 들어 1도를 기준으로 4단계 높아지거나 내려짐에 따라 '도 파 솔'을 4도 화성이라 부른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