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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화의 발견] ⑪ 판화가 지용출씨

조각칼로 새긴 '과거의 흔적'

지용출 판화가가 그의 데뷔작 '개발지구' 앞에서 작품설명을 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동문 네거리. 문화예술판 사람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대여섯 평 남짓한 2층 낡은 술집. 이곳에서 한동안 가장 좋은 목을 차지하고 걸려있던 크고, 연두 빛이 나는 판화작품을 기억하는가?

 

이 작품이 바로 판화가 지용출의 것이다. 지난 2004년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완산을 보다'라는 주제로 전시했던 작품 중 하나인데, 작가는 이때부터 역사와 판화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꽤나 많은 발품을 팔았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람들은 옛 지도의 형식으로 만났던 오목대, 동고사, 한벽당, 남고산성, 관성묘 등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전주의 숨결과 전주의 혈맥이 도시의 아스팔트와 매연, 바쁜 일상 속에서 가려지고 있는' 것을 못내 안타깝게 여긴 그는 '되풀이 되는 행보로 지난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것을 근거로 자료조사를 하며' 밑그림을 그렸을 만큼 우리지역을 아끼는 작가다. 또 노력하는 작가다.

 

단풍구경을 나선 인파로 도로가 북적거리는 지난 주말, 김제 금구면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요새는 전라북도 판소리지도를 판화로 제작하는 일로 눈코 뜰 새가 없단다.

 

지용출은 서울 토박이다. 6수를 해서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에 89학번으로 들어갔지만, 이렇게 들어간 대학에서는 학업보다는 학생운동에 빠져 살았다. 전주에는 부안 곰소에 있는 중학교로 발령받은 아내를 따라 무작정 내려온 것. 이때가 1994년 봄이다.

 

"전주에 와서 아는 사람도 없고, 대화할 사람도 없었어요. 가끔 서울에 대한 향수를 느끼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4년을 보냈죠. 인간적인 공허함, 경제적인 어려움, 문화적인 차이 등이 더 외롭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효자동 새벽(위), 변산리 마을 입구에서(아래) ([email protected])

 

전주생활을 시작하면서도 한동안 그에게 전주는 이방인의 도시였다. 송만규 화백과 함께 전북민족미술인협회 창립멤버로 활동했지만 여전히 그는 공적인 일 외에는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꺼려했었다.

 

"그 땐 정말 '나는 다시 서울로 갈 거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가끔씩 지인들이 그때의 얘기를 꺼내면 정말 염치없어요."라면서 내심 부끄러운 웃음을 짓는다. "특별한 사람만이 농사를 짓는 줄 알았는데, 주변에 농사 한번 안 지어 본 사람이 없더라고요. 나는 서울사람이라는 문화적 우월주의가 있었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차츰 전주사람이 돼 가더라고요."

 

예술의 사회참여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예술가는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확실해야 합니다.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작가가 예술작품을 통해 미적인 아름다움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 거에요. 예술가들이 무조건 자기만족을 위해서 '유희성'을 추구하다보면 '나 홀로 예술'이 될 수 있어요. 예술이 사회에 참여하기 위해 관심을 갖고, 또 참여할 때 사회와 문화의 질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거든요. 결국 대중에 대한,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작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남강병원 앞 융성아파트 지하실이 그의 첫 작업실이었다. 효자동에서 삼천을 건너면 논과 밭으로 그득했던 시절. 지금은 빠르게 도시화가 이뤄져 아파트, 골프연습장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지만 10여 년 전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포크레인이나 용머리고개는 당시 이방인으로서 내가 느끼는 전주의 어두움이었어요. 어쩌면 닫혀있던 나의 생활이 투영됐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당시 작품은 정말 어둡고, 삭막했다. 시커먼 색 일색이고, 송곳으로 그린 수백 갈래의 거친 선들이 집과 나무, 산과 들을 만들고 있었다. 삼천은 도시와 시골, 개발과 미개발의 경계였다.

 

그의 첫 전시는 서울 종로 관훈동 '갤러리 나무'에서 열렸다. 1997년 4월 30일부터 단 7일 동안 열린 전시는 '풍경의 내면'전. 작품은 모두 15점이었지만 1점만 팔리는 불운의 작가였다. 팔리지 않았던 작품을 잘 간수하고 있는 작가가 작품을 설명해 준다.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강한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남아있었죠. 우리사회의 어두운 현실이나 불합리한 부분을 고발하는 제 시각이 투영돼 있어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받지 못했어요."

 

어두컴컴한 아파트 지하실을 벗어난 작가는 김제 용지로 작업실을 옮겼다. 본래 누에창고로 사용되던 곳인데, 작가는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자연물에 상당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이 시기가 판화가 지용출의 제2기 작업의 시작이었다.

 

"이 즈음엔 질경이며, 도라지, 파 같은 생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소재도 변화되었지만 작업방식 또한 그냥 종이에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든 황토종이를 이용했었죠."

 

그런데 사람들이 좋아하긴 했지만 왠지 작품의 크기가 작아 장식품 이상의 만족감을 주지 못해서 과감히 포기.

 

지금은 제3기 지도작업 시기. 작가는 '완산을 보다' 이후 꾸준히 판화로 그리는 현대판 지도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전주부성을 판화로 재현해 보고 싶어요. 지도작업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답사와 공부가 필요한 작업이잖아요. 그리고 기존 판화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방식으로 작업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에게 제2의 고향은 전주와 전라북도다. 그래서 우리지역의 흔적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나보다. 머릿속에서 빙빙 맴도는 생각의 갈피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사대문을 돌았는지 모른단다. 역사박물관에서 「축성계초」 국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귀띔을 했더니 금새 표정이 밝아졌다.

 

지용출은 대학에서부터 판화를 전공하고 판화작품만을 고집해 온 유일한 작가다. 전북판화가협회장으로 오랫동안 일을 하고 있는 판화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평소에는 회화를 하다가 전시회가 있을 때만 판화작품을 하는 게 좀 서운해요. 물론 회원들이 있어서 큰 힘이 되고 있지만 제 욕심 같아선 '판화'만을 고집하는 작가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예술가가 많은 지역이지만 판화가는 찾아보기 힘든 현실. '아내에게 미안해 아침 일찍 작업실로 나온다'는 그는 한시도 쉬지 않는 작가다. 비록 그의 판화인생의 시작이 힘들었고, 초창기 전주에서의 생활이 외로웠지만 이제는 아니다. 앞으로 진행될 작품의 테마를 잡은 것처럼 판화가로서의 삶에 자신이 붙은 것이다.

 

아마 다음 주말쯤엔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서문에서 북문으로, 다시 동문에서 남문으로 페달을 밟는 판화가 지용출을 스쳐볼 수 있지 않을까.

 

/정훈(문화전문객원기자·학예연구사·전주역사박물관 교육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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