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윤리적 삶을 살아가야만 하며 어떻게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만남, 즉 인간의 관계성에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듯이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우리는 항상 타인과 관계하며 삶을 영위하고 자신의 내면적인 세계를 성찰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일상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만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히 값어치를 갖는 수단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이라는 존엄성을 갖는 목적적 존재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인격을 갖는 '나'와 '너'의 만남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버는 이를 대문자 '나(Ich)'와 '너(Du)'의 관계, 즉 근원어의 관계라고 말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분명 나와 그것(it, 사물)의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는 타인을 나의 욕망의 대상이나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내 경제적 사회적 이해관계의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인간과의 참된 관계를 맺으며 깨어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레비나스는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있음의 차원에 만족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라고 말한다. 인간다운 삶이란 타인과 관계하는 삶이며, 타인과 얼굴을 마주하며 타인의 삶을 깨닫는 삶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몸 전체가 바로 관계의 얼굴이며, 얼굴의 관계는 그 누구도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윤리적 몸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윤리란 나와 관계있고 내게 얼굴로 다가오는 것에 대한 책임성이며, 사심 없이 타인을 섬기라는 거룩함의 요청이기도 하다.
우리가 타인과 인간으로 만난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책임성과 상호 인정이라는 윤리적 태도를 전제로 한다. 인간 사이의 연합이나 아우름이란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서로 마주하는 어울림이다. 인간의 어울림은 동일성과 종합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전제로 한다. 다름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전제이며, 만남이란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인격적으로 어울린다는 것을 말한다.
현대 정신분석학이 내놓는 최후의 결론 역시 헤겔이 말한 '인정(認定)'의 문제로 귀결된다. 갈등과 공격성, 폭력의 문제는 바로 인격적 의사소통의 왜곡에서 발생하며 타인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마음에서 유래한다. 타인을 자기 자신에로 동화시키지 않고 하나의 인격적인 타자로 인정하는 윤리적인 만남이야말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의 출발점이요, 서로 인정하고 어울릴 수 있는 인간의 진정한 소통의 토대인 것이다. 우리에게 현재 필요한 것은 타인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격적으로 어울릴 수 있는 만남과 소통의 정신일 것이다. 인간다운 삶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타인과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성숙한 삶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김정현(원광대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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