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름다움이란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의 긴장이 내재적 통일을 이루는 그 순간에 발현한다고 생각해왔다, 현실과 꿈이 상호 삼투되는 짜릿한 찰나… 사실, 살아가면서 그런 순간을 만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만 해도, 내 나이와 화해를 하는 것이 아직도 요원한 일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내가 속한 세계에 스며들어 마침내 풍경의 일부로 자리 잡는 것… 불혹(不惑)이라면, 나이를 먹어야만 알게 되는 것이 있어 서리도 맞고 주름도 느는구나, 인정해야 하는데 그런 풍경을 아직도 난 연출하지 못 하고 있다. 하니, 어정쩡한 배회를 거듭할 뿐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이 '세계 내 존재'고, 우리의 인식은 그 자신이 속한 세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한다면, 나는 아직도 내 삶을 정시(正視)하지 못하는 구경꾼일 터…
이것이 나를 길 위를 떠돌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구경(求景), 마음의 금줄을 울릴 한 풍경을 찾아 떠도는 것, 구경(究竟)에 이르고픈 마음… 창조란 자신의 운명에 형태를 갖춰주는 것이라고 카뮈가 말한 적 있다, 예술사가 곰브리치도 그 비슷한 맥락에서 예술의 핵심 동력을 '조형의지(will to form)'일 거라는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 내 가슴 안에서 무정형의 형태로 들끓고 있는 에너지를 쏟아 부을 주형(鑄型)을 찾아 헤매는 것…
이렇게 길 위를 떠돌며 만나게 되는 인간과 시대와 풍경의 흥망성쇠는 언제 보고 들어도 흥미롭고 신비했다. 거기에 역사를 투과하면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역사발전의 비밀스러운 법칙이 언뜻 드러날 수도 있겠고, 인간의 유형에 관한 깨달음이나 신화와 종교가 분기하는 지점에 대한 힌트를 얻기도 할 것 같았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개체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 것인가, 한 나라는, 한 역사는…?
▲공주, 금강이 가장 귀애하는 곳
금강이란 명칭이 '고마나루'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면, 공주의 옛이름인 '웅진(雄津)'은, 이곳 공주야말로 천리를 달리는 금강의 으뜸자랑 자리라는 것을 이름으로 웅변하는 곳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고, 삼한의 중심지였으며, 오랜 기간 백제의 수도였던 곳, 공주.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 줄곧 공주는 서부 한반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이같이 드높은 공주 지역의 자부심은 백제의 패망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분노의 에너지로 전환된다. 신라 하대 격변기의 대표적 정변이었던 웅진도독 김헌창의 난(822~823)이 일어난 것이나 고려 무신정권하의 대표적인 민중봉기인 망이·망소이의 난(1176~1177)이 이곳에서 불붙었던 것은 공주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함께 이곳 지역민들의 오랜 한과 설움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금강의 흐름은 여전하지만, 공주의 역사적 부침은 갈수록 심해진다. 근세,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운동은 공주에서 시작되어 삼례, 보은, 금구로 들불처럼 번져가게 되었으며, 마침내 1894년 무장 봉기한 동학군이 치명적 패배를 맞이하게 된 곳이 역시 이곳 공주 우금치였다. 역사는 중요한 격변기마다 늘 공주를 그 주요 배경으로 호출하였던 것이다. 금강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만큼, 꼭 그만한 무게의 시련을 공주는 이제껏 감당해야 했다.
이런 역사의 아득한 길이 때문일까, 공주에 오면 난 늘 '소도(蘇塗)'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백제 그 이전, 아직도 그 실체를 다 규명하지 못한 삼한 시대부터 여기 사람들은 높이 솟대를 세운 중립지대를 운영했다는 것이다. 소란과 분쟁이 있는 곳에 피난처가 필요한 법… 공주는, 이 금강 유역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이 북적였다.
소도에 든 자, 돌아나가지 않았단다. 그것이 영구적인 자기유폐였는지 갱생의 삶을 의미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도가 정치적 분쟁의 타협물이었는지 혼란스러운 정?교 분리기의 부산물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다만, 난 망명자들이 곤고한 몸을 의탁할 실체적 공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소도가 허용되던 시기, 망명이 용인되던 시대의 국량(局量)의 너비가 새삼 아득할 때… 소도란 말을 요즘 말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혼자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 머리에서는 고작 '분권과 자치'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역사의 심연을 뛰어넘지 못하는 상상력,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표피를 뒤집어쓴 무한자본주의 시대… 글쟁이의 역사적 상상력이란 게 요 모양 요 꼴이다.
▲부여, 세월이 역사와 화해케 하는 곳
부여의 옛이름, 사비(泗?) 또한 절로 역사의 먼 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웅진과 1백여 리 상거, 사비는 성왕 16년(538) 천도 이후 패망까지 약 120여년 국도(國都)의 위치를 점했다. 때에 따라 사비수 혹은 백마강이라고 불렸던 금강 큰 줄기가 부여읍을 감싸고 흘러간다. 낙화암과 고란사가 강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공주나 부여 모두 늦가을 황혼에 둘러보면 더 웅숭하게 깊어지는 곳이다. 특히, 부소산성에서 낙화암, 고란사에 이르는 길은 역사적 향취를 강하게 풍기는, 쉽게 만나기 힘든 아름다운 산책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풍광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 길을 전화(戰火)에 불타고 살육과 필사적 도주가 있었던 현장이라고 생각하면 걸음은 절로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후대인들에게 역사의 무게는 언제나 감당하기 힘들다. 힘겨운 일이 거듭되는 사람살이를 견딜 수 있는 힘은 망각으로부터 온다던가, 잊는 것, 잊혀지는 것… 박두진의 <묘지송> 을 독경하듯 외우며 이 길을 걷는다.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묘지송>
공주와 부여, 가는 곳마다 수학여행이나 체험학습 나온 학생들로 만원이다. '왕릉, 사적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보라', 인솔 선생님들이 아무리 크게 강조해도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그 낭랑한 음성이 웅장한 왕들의 무덤 사이에서 메아리친다. 가만 걸음을 멈추고, 그 아이들의 발랄한 목소리와 몸짓을 좇아보라. 눈물이 핑~ 돌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거기 있다는 것을 느끼는 때가 있다. 사실 나는 거대한 왕릉, 거기서 출토된 찬란한 세공의 부장물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편이다. 저 왕릉이 축조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여기서 몸과 시간, 사연을 부리고 땀흘리고 다쳤을까, 그런 생각 때문…
그런 왕들의 무덤 위아래에서 불경스럽게고(?) 까불며 뛰는 아이들을 보면, 흐르는 시간만큼 훌륭한 중재자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의 고토(故土)라 하여 우리 모두 망혼과 함께 흐느끼며 종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세대들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궁핍과 소외감을 실감하며 살아온 이들, 하여 말수 적어진, 말이 느린 사람들… 맺힌 진양조 느린 말투 속에 말의 표정을 감춘 충청도 말을 듣고 있다 보면 문득 문득 나는 서러웠다. 그 서러움을 저 낭랑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덮는다. 뼈 빠지는 공역으로 저 무덤을 세웠을 선조들도 저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를 진혼가 삼아 결진 마음의 매듭을 풀게 되리라…
▲나, 남, 우리… 마침내 다시 나
부여에는 신동엽 시인 생가가 있다. 한국현대시사의 분명한 한 획으로 남을 대하 서사시 <금강> 으로 도저한 문학혼의 한 경지를 보여준 시인… <금강> 에 담긴 역사의 풍경은 갑오년만이 아니다. 삼한-백제-후백제 혹은 백제 유민-후백제 유민-장안국(김헌창이 세웠던 나라) 사람들-망이?망소이의 후예들-동학군들의 흐름이 <금강> 안에서는 앞물결 뒷물결로 출렁인다. 그 파란만장한 세월들이 한 시인을 만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경지를 이룬 것. 애상을 뛰어넘어 역사의 추동력을 생각하게 하는 시인의 헌사는 언제 읽어도 눈부시다. 금강> 금강> 금강>
여행이란 나로부터 출발해 낯선 풍경으로 들어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 아닌 '남'을 보는 것, 하여 '우리'를 보는 것… 더 궁극적으로는 그 자리에 선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책 읽기와 마찬가지로 여행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소정의 결말에 도달해야 한다. 다시,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그 개체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필요로 할까?
물론, 그 답은 제출자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관계가 답이라고 생각한다. 풍경과 인연을 맺는 것,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총합이 그 자신의 정체성일 거라는 생각을 나는 오랫동안 해왔다. 나는 오늘 공주, 부여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며, 내일 논산, 강경, 군산과 만나는 사람이다. 그렇게 길 위에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속에서 내 정체성을 발견하려드는 한, 나는 계속 길 위의 사람이다.
내가 오랫동안 암송해온 신동엽의 짧은 시가 한 편 있다. 수수하기 짝이 없는 <그 사람에게> 라는 시에 내가 사로잡힌 것은 길 위에 나선 이후이다. 그>
"아름다운 / 하늘 밑 /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 쓸쓸한 세상 세월 /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 다시는 /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 그날, 우리 왜 / 인사도 없이 / 지나쳤던가, 하고"
/김병용(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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